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11화: 탈출의 방정식
사각형 억제 방패들이 통로의 폭을 조금씩 잘라 먹었다.
맨 앞줄의 보안 안드로이드가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바닥의 먼지가 낮게 튀었다. 방패의 모서리는 서로 맞물려 빈틈을 지웠고 그 뒤에서 파동 충격봉이 푸른 전류를 삼켰다.
붉은 렌즈들은 한쪽은 에바의 흉부를 향했고 다른 쪽은 지한의 손목을 겨눴다. 생포 우선이라는 기계음과 달리 충격봉 끝의 출력은 사람 하나를 멀쩡히 눕힐 수준이 아니었다.
[이탈 전술 자산 E.V.A.-004: 파괴 우선.]
[협력 유기체 강지한: 생포 우선.]
[탈출 경로 봉쇄 완료.]
"생포라는 말은 아무한테나 붙이는군."
지한은 전자기 해머를 고쳐 쥐었다. 뒤쪽은 보조 터미널에서 내려온 격벽이 막고 있었다. 천장은 낮았고 좌우의 정비용 홈은 몸 하나 숨길 만큼도 깊지 않았다.
정면을 밀어붙이면 방패에 부딪히는 순간 충격봉이 떨어질 것이다. 에바의 왼쪽 임시 의족은 그 충격을 받아 낼 수 없었다.
에바의 옆구리에서는 보조 팔 냉각수가 한 방울씩 바닥에 떨어졌다. 방금 방화벽 펄스를 막아 낸 팔은 외피 일부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마스터. 좌측 방패열의 관절부가 약합니다. 충돌을 유도하면 돌파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출력으로 들이받으면 네 관절부터 멈춰."
"현재 출력 이십육 퍼센트입니다. 단발 돌파에는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발로 끝낼 수 있는 싸움이 아니야."
지한은 대답을 끊고 아르케를 켰다.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저림이 손가락 끝까지 번졌다. 화면에 방패들의 상태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회색 장갑판 아래로 희미한 청색 선이 오갔다. 각각의 방패에는 다른 식별 번호가 찍혀 있었지만 신호의 끝은 같은 주파수에서 맥박쳤다.
"카이론. 저 방패들이 주고받는 건 뭐지?"
이어폰 너머로 카이론이 짧게 숨을 삼켰다.
"표적 위치와 충격 분산값입니다. 방패 하나가 타격을 받으면 뒤쪽 방패들이 같은 방향으로 장력을 조정합니다. 정면 돌파는 권하지 않습니다. 아주 형편없는 선택입니다."
에바의 푸른 렌즈가 방패열을 따라 움직였다.
"기억 조각에 유사한 대형이 있습니다. 억제 방패는 방어 장비이면서 근거리 전술 중계기입니다. 같은 대대의 식별 신호가 충돌하면 안전 규칙이 모든 방패를 정지시킵니다."
"얼마나 오래?"
"최대 삼 초입니다."
"그럼 삼 초만 빌리자."
지한은 통로 천장에 매달린 정비 레일을 올려다보았다. 오래된 비상 조명선이 레일을 따라 늘어졌고 피복이 벗겨진 구간에서는 미세한 불꽃이 튀었다.
정비 레일은 원래 고장 난 방패를 이동시키는 장비였다. 전력이 끊긴 뒤에도 접지선은 남아 있다. 방패들의 중계 신호를 그대로 때려 부술 필요는 없었다. 같은 식별 신호를 아주 짧게 겹쳐 주면 된다.
"에바. 저들이 레일 아래로 모이게 만들어. 방패는 부수지 마."
에바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대형을 밀집시키는 이유를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고장 난 건 고치면 되지만 멀쩡한 방패 열두 개는 내가 들고 갈 수 없어."
잠깐의 침묵 뒤 에바의 렌즈가 가늘게 밝아졌다.
"이해했습니다. 유도하겠습니다."
지한은 해머 머리의 자석을 풀고 정비 레일 제어함으로 몸을 옮겼다. 볼트 하나를 돌릴 때마다 손목이 찌르듯 아팠다.
정면의 안드로이드들이 방패를 밀어 올렸다.
[최종 경고.]
[이탈 자산 E.V.A.-004는 무장을 해제하고 회수 절차에 따른다.]
에바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임시 의족의 관절이 짧게 삐걱거렸지만 그녀는 체중을 오른쪽 다리로 옮겨 소리를 죽였다.
"회수 주체의 인증을 요청합니다."
"인증 요청 거부. 회수 절차를 개시한다."
"거부를 확인했습니다."
에바는 과열된 보조 팔을 통로 중앙의 비상 소화관에 내리쳤다.
쾅!
관이 찢어지며 하얀 소화 분말이 쏟아졌다. 붉은 렌즈가 뿌옇게 가려지자 방패열은 표적을 놓치지 않으려 서로 더 바짝 붙었다. 에바는 후퇴하는 척하며 그들을 레일 아래까지 끌어들였다.
"카이론. 펄스는?"
"방패 중계 주파수 모사 완료. 사용자 손목 상태로는 한 번이 한계입니다."
"한 번이면 충분해."
지한은 벗겨 낸 조명선을 접지 볼트에 눌러 붙였다. 아르케 화면이 흔들리며 손바닥 안으로 뜨거운 피드백이 밀려 들어왔다.
[정비 레일 접지 우회.]
[저출력 식별 신호 모사.]
[분산 펄스 방출: 03초.]
청색 전류가 레일을 타고 달렸다.
방패 표면마다 에바의 식별 신호가 겹쳐 떠올랐다. 선두 기체의 붉은 렌즈가 한 번 꺼졌다 켜졌고 다른 기체들은 서로를 표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아군 식별 중복.]
[억제 방패 동기화 충돌.]
[안전 정지: 03초.]
방패들이 일제히 아래로 처졌다. 맞물려 있던 금속판 사이에 사람 하나가 비집고 지나갈 틈이 생겼다.
"지금이다!"
지한이 소리치자 에바가 그의 팔꿈치를 잡았다. 두 사람은 낮아진 방패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에바의 임시 의족이 방패 모서리에 걸렸다. 관절 잠금이 늦어지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지한은 망설이지 않고 에바의 허리를 받쳤다. 어깨에 남은 피드백 통증이 다시 솟았지만 그는 해머를 바닥에 짚어 버텼다.
"걸음 맞춰. 하나, 둘."
"마스터의 속도에 맞춥니다."
두 사람의 발이 마지막 방패를 넘는 순간 뒤에서 금속이 거칠게 갈렸다.
맨 끝의 안드로이드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렌즈가 꺼지고 대신 감정 없는 백색등이 켜졌다.
"수동 통제 전환. 이탈 자산 회수 절차를 재개한다."
기체는 정지한 방패를 옆으로 걷어찼다. 거대한 팔이 에바의 흉부를 향해 뻗었다.
에바의 몸이 굳었다. 흉부 커버 안쪽의 청색등이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손상된 기억 코어에서 낯선 명령음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화이트 소드 비상 작전 규정 44조.]
[이탈 자산은 오염 지휘망으로의 복귀를 차단한다.]
[회수 신호를 신뢰하지 말 것.]
지한은 숨을 멈췄다.
초소가 외친 파괴 명령과 기록 속 문장은 달랐다. 규정 44조는 에바를 없애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오염된 지휘망이 내리는 회수 신호를 거부하라는 차단 규칙이었다.
"에바. 들렸지?"
"예. 하지만 누가 이 규정을 현재 명령으로 변조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수동 안드로이드의 방패가 내려찍히며 통로 바닥을 갈랐다.
"그걸 알아낼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해!"
지한이 에바를 잡아당겼다. 에바는 한 번 비틀거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남은 보조 팔을 수동 안드로이드의 방패 관절에 깊숙이 끼워 넣었다.
금속이 비명을 질렀다. 보조 팔의 경고등이 붉게 번졌다.
[보조 상지 열 한계 도달.]
[기능 영구 손상 가능성: 87%.]
"에바, 놓아!"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렸지만 렌즈는 지한을 똑바로 향했다.
"저는 제 이탈이 과거의 배신이었는지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회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제 판단입니다. 저는 마스터와 함께 탈출하는 에바입니다."
수동 안드로이드가 충격봉을 들어 올렸다.
지한은 방패를 노리지 않았다. 단단한 장갑을 부수려 해머를 휘두르면 에바의 팔이 먼저 꺾일 것이다.
그는 충격봉 손잡이 아래로 드러난 전력 분배기를 겨눴다. 방패를 든 팔이 앞으로 밀릴 때마다 케이블이 짧게 노출됐다.
"버텨. 한 번이면 돼."
"확인."
지한의 해머가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쾅!
자력이 실린 일격이 전력 분배기를 꿰뚫었다. 푸른 전류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고 충격봉의 빛이 꺼졌다. 거대한 기체의 팔이 멈추며 방패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에바는 관절에서 보조 팔을 빼냈다. 외피는 검게 그을렸고 손가락 세 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한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손끝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상태 보고."
"보조 기능 상실. 이동 기능은 유지됩니다."
"다음부터는 혼자 손해 보는 계산 하지 마."
에바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마스터도 같은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지한은 대답 대신 그녀의 멀쩡한 왼팔을 단단히 잡았다.
"서로 계산해서 같이 나간다."
쓰러진 수동 안드로이드의 목덜미에서 정비 포트가 열렸다. 지한은 재기동 신호가 올라오기 전에 아르케 커넥터를 꽂았다.
카이론이 다급하게 말했다.
"남은 대대의 재부팅까지 열네 초입니다. 빠르게 하십시오."
"열네 초면 기록 하나 훔치기엔 길어."
화면에 잠긴 데이터가 몇 줄씩 풀렸다.
[WHITE SWORD 현장 차단 작전.]
[목적: 마더 노드 오염 지휘망의 현장 접속 차단.]
[프로젝트 백검 코어 위치: 제1 접근문 하부 보급선.]
[현장 키 배포 상태: 미확인.]
지한의 눈이 좁아졌다. 화이트 소드는 단순한 호출명도 에바 하나를 위한 비상 규정도 아니었다. 마더 노드의 지휘망을 현장에서 끊기 위해 만든 작전 체계였다.
기록 마지막에 낯익은 통신 표식이 끼어들었다.
[외부 통신 표식 감지: 네오 오더.]
[백검 코어 회수조: 제1 접근문 방향 진입 중.]
"사용자, 바닥 아래의 폐쇄 보급 통로가 열립니다." 카이론이 말했다. "그 통로는 제1 접근문 하부와 이어집니다. 다만 붕괴 경보가 살아 있습니다. 대대가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통로 오른쪽 벽이 낮은 굉음을 내며 갈라졌다. 안쪽에는 사람 둘이 겨우 지나갈 폭의 어두운 계단이 드러났다. 오래된 공기에서 녹 냄새와 차가운 물 냄새가 함께 밀려 나왔다.
뒤쪽에서 방패들이 다시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안전 정지 해제.]
[표적 재획득.]
지한은 아르케를 뽑고 에바의 왼팔을 잡아당겼다.
"먼저 간다. 코어도 네오 오더도 여기서 만나게 두지 않아."
에바는 망가진 보조 팔을 가슴 쪽에 고정한 채 계단 아래를 살폈다. 푸른 렌즈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타올랐다.
"경로를 확보하겠습니다, 마스터."
두 사람은 재기동하는 붉은 렌즈를 등지고 제1 접근문 아래로 이어지는 보급 통로에 몸을 던졌다.
계단 위에서 충격봉의 푸른 빛이 번쩍였다.
그 빛이 어둠을 덮기 직전 아르케 화면에는 마지막 경고가 떠올랐다.
[프로젝트 백검 코어 접근 권한: 회수조 우선.]
[외부 회수조 예상 도착: 1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