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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18화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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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첫돌

황궁 소공녀 궁의 안뜰은 아침부터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궁전 앞마당을 가득 채운 화려한 마차 행렬에서 하인들이 쉴 새 없이 나무 상자를 날랐다. 붉은 비단 리본으로 묶인 상자들은 본궁 복도와 접견실을 넘어 회랑 구석까지 탑처럼 높게 쌓여 있었다.

“남부 베이런 백작가에서 최고급 산호 딸랑이와 비단 요람을 바쳤습니다!”

“서부 상단 연합에서 아이의 체온에 반응해 은은한 온기를 내는 마법 담요 백 장을 올렸습니다!”

기록관들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던 에일린은 창밖으로 끝없이 밀려드는 황금빛 보물 상자들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저게 다 내 선물이라고?’

전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대기업에서 8년을 뼈 빠지게 구르며 새벽 세 시까지 야근을 하던 시절이었다. 명절에 고작 참치 캔 세트나 백화점 상품권 오만 원권을 받고도 감지덕지하며 허리를 굽혔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태어나서 딱 일 년을 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륙 전역의 희귀한 금은보화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게 바로 제국 최고 권력자의 수양딸로 사는 인생의 맛인가.’

물론 귀족들이 순수한 축하의 마음만으로 선물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오르딘 후작 영지가 하룻밤 사이에 지도에서 지워지고 황태후가 쇠사슬에 묶여 유폐되었다는 소식은 황도 귀족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황제의 역린이자 유일한 구원자인 아기 공주에게 밉보였다가는 가문의 문패가 통째로 뜯겨 나간다는 공포가 귀족들을 움직인 것이다.

덕분에 황태후 파벌에 발을 담갔던 귀족들까지 집안의 가보를 털어 소공녀 궁으로 줄을 섰다.

“공주님, 이제 옷을 갈아입으실 시간이에요.”

유모 마리안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에일린을 안아 올렸다. 시녀 리세가 황실 재단사들이 밤을 새워 완성한 첫돌 예복을 들고 다가왔다.

부드러운 최고급 실크로 만든 연분홍빛 드레스였다. 깃과 소매 끝에는 작고 동글동글한 진주가 촘촘히 박혀 있었고 아기가 입어도 불편하지 않도록 가볍고 포근했다.

옷을 입히는 동안 얌전하게 팔을 뻗어 주는 에일린을 보며 리세가 두 손을 모았다.

“어머나 세상에……! 하늘에서 천사님이 내려오신 게 분명해요. 너무 사랑스러워요!”

“우리 공주님께서 오늘 연회장의 모든 귀족들의 넋을 쏙 빼놓으시겠어요.”

마리안도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거울에 비친 에일린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뺨에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사랑스러운 아기 그 자체였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단정한 검은 제복 차림의 소년이 복도에 서 있었다. 카시안이었다.

“린린.”

카시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고 부드러웠다. 그의 양손에는 비단 보자기와 작은 나무 조각상이 들려 있었다.

“오빠아!”

에일린이 양팔을 흔들며 아장아장 다가가자 카시안의 굳었던 얼굴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그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에일린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다치지 않게 천천히 걸어야지.”

카시안이 조심스럽게 내민 것은 은은한 백단향이 풍기는 목마였다.

모서리마다 아이가 긁히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사포질을 해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부드러운 가죽이 덧대어져 있었다.

“어젯밤에 직접 깎아 만들었다. 손재주가 변변치 못해 보잘것없지만…….”

소년 황태자의 귓불이 붉게 물들었다. 황실 검술 수련으로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 끝에 자잘한 흠집들이 남아 있었다. 밤새 칼로 나무를 다듬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에일린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수억 골드를 호가하는 다이아몬드보다 오빠가 밤새 손을 베어 가며 깎아 준 이 투박한 목마가 훨씬 값지게 느껴졌다.

에일린은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목마를 꼭 껴안았다.

“오빠 목마 쪼아! 린린 꼬옥 탈 거야!”

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환하게 번졌다. 그는 안도하는 숨을 내쉬며 비단 보자기에 싸인 은제 팔찌를 꺼내 에일린의 통통한 손목에 채워 주었다.

“황실 마도사들과 함께 방어 결계를 새겨 넣은 팔찌다. 어떤 위해도 린린의 몸에 닿지 못하게 지켜 줄 거야.”

카시안은 에일린의 손등에 가볍게 이마를 대며 속삭였다.

“첫 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린린.”

황제의 발소리는 언제나 묵직하고 고요했다.

회랑 끝에서 칠흑 같은 외투에 황금 자수를 놓은 정복 차림의 레오하르트가 걸어왔다.

제국의 모든 이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냉혹한 군주였지만 소공녀 궁의 문턱을 넘는 순간 그의 눈빛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카시안과 시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레오하르트는 한달음에 다가와 에일린을 안아 올렸다. 그의 품에 안기자 시원하고 묵직한 마력의 향기가 풍겼다.

“아빠아!”

“그래 내 딸.”

레오하르트가 에일린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황제의 손바닥에는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아기용 미니 티아라였다.

최고 등급의 다이아몬드와 투명한 연보랏빛 자수정으로 섬세하게 엮은 보관은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게 빛났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의 핑크빛 금발 위에 조심스럽게 티아라를 얹어 주었다. 마치 부서지기 쉬운 꽃잎을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오늘을 위해 제국 최고의 세공 장인 백 명을 모아 만들게 했다. 내 딸에게 어울리는 것은 대륙에서 오직 최고뿐이어야 하니까.”

에일린이 머리를 갸웃거리자 티아라의 보석들이 잘랑거리며 반짝였다.

‘아빠, 이거 진짜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하지만 너무 좋아!’

에일린이 방긋 웃으며 레오하르트의 목을 꼭 끌어안자 황제의 입가에 깊은 만족감이 번졌다.

그때 복도에서 대기하던 바르도 기사장이 다가와 정중하게 보고했다.

“폐하, 중앙 대연회장에 제국 귀족들과 사절단이 모두 착석했습니다. 공주 전하의 첫돌을 축하하는 자리가 준비되었습니다.”

“귀족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레오하르트가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오르딘 후작의 처벌 소식이 전해진 직후라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두 사색이 되어 엎드려 있습니다.”

바르도의 보고에 레오하르트는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

“좋다. 감히 내 딸에게 불온한 눈길을 던진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새겨 주었으니 오늘만큼은 내 딸을 위한 축제여야 한다.”

레오하르트는 이미 에일린의 첫돌을 기념해 제국 전역에 사흘간의 특별 사면을 내리고 모든 빈민가에 구휼미를 배급하도록 명한 상태였다.

온 백성이 공주의 탄생을 축복하도록 만든 황제의 거대한 안배였다.

“가자꾸나 에일린. 네가 이 제국의 가장 찬란한 빛임을 온 천하에 보여줄 시간이다.”

황금으로 조각된 대연회장의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렸다.

“제국의 태양이신 레오하르트 황제 폐하와 황태자 카시안 전하 그리고 제1수양황녀 에일린 공주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의전관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나팔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수백 명의 귀족들이 붉은 카펫 양옆으로 엎드려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연회장 안에는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팽팽한 적막이 흘렀다.

귀족들은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오르딘 후작이 쇠사슬에 결박되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간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았다. 황태후조차 처소에 갇힌 마당에 황제의 눈에 거슬리는 자는 즉시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레오하르트는 위압적인 걸음으로 단상 위에 올랐다.

그는 옥좌에 앉은 뒤 에일린을 단상 중앙의 부드러운 황금 방석 위에 내려놓았다.

에일린이 방석 위에 앉아 커다란 보랏빛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자 엎드려 있던 귀족들이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첫돌 연회의 꽃인 첫돌 축복식이 시작되었다.

돌잡이를 위해 마련된 긴 대리석 탁자 위로 황실의 상징물들이 줄지어 놓였다.

제국 전군을 움직일 수 있는 황제의 붉은 인장.

선대 황제들이 전장을 누비며 피를 묻힌 유서 깊은 황실의 보검.

고대 대마법사의 지혜가 봉인된 비전 마도서.

끝없는 부와 번영을 상징하는 순금으로 주조된 황금 장미.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은 제국의 패권과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들이었다.

귀족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어린 공주를 응시했다.

‘설마 저 어린아이가 검을 쥐겠는가?’

‘황금 장미를 잡는다면 황실의 재정을 장악하겠다는 뜻일 테고 인장을 잡는다면 차기 황위 구도에 엄청난 파란이 일어날 텐데……!’

귀족들의 머릿속에서 치열한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단상 위의 카시안 역시 조용히 숨을 죽인 채 동생을 바라보았다.

에일린은 작은 손으로 턱을 괴듯 뺨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저 붉은 인장을 잡았다간 오빠랑 황위 다툼을 벌인다고 쑥덕거릴 테고 검을 잡자니 피비린내 나는 군벌들의 타깃이 될 게 뻔해. 황금 장미도 너무 대놓고 속물 같잖아?’

사회생활 8년 차의 생존 본능이 맹렬하게 경고음을 울렸다.

이런 자리에서 가장 완벽한 처세술은 불필요한 권력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최고 권력자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는 것이었다.

에일린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장. 아장.

앙증맞은 발걸음으로 카펫 위를 걸어가는 아기 공주의 모습에 숨을 죽이고 있던 귀족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나 작고 사랑스러워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에일린은 대리석 탁자 앞에 멈춰 섰다.

탁자 위에 놓인 인장과 보검과 마도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휙 돌아섰다.

“응?”

레오하르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에일린은 짧은 다리로 종종걸음을 쳐 옥좌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앙증맞은 두 손을 번쩍 뻗었다.

오른손으로는 레오하르트의 커다란 검지를 꼬옥 쥐었다.

왼손으로는 곁에 서 있던 카시안의 손가락을 단단히 붙잡았다.

두 사람의 손을 꼭 쥔 에일린이 천사처럼 해맑게 웃으며 외쳤다.

“아빠아! 오빠아!”

연회장 전체가 얼어붙었다.

세상의 온갖 권력과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보물들을 모조리 외면하고 아기 공주가 선택한 것은 바로 아버지와 오빠의 손이었다.

찰나의 정적 뒤 레오하르트의 입술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하…….”

황제의 입에서 억눌린 듯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제국을 공포로 지배하던 정복자 군주의 입에서 벼락같은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하!”

차가운 얼음 같던 레오하르트의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버지의 미소로 가득 찼다.

황제는 에일린을 두 팔로 번쩍 안아 올려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래! 내 딸에게 저따위 차가운 쇳덩이나 종이 쪼가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 아비와 오라비가 네 손을 잡고 있는 한 제국 전체가 이미 네 발아래에 있거늘!”

카시안 역시 붉어진 얼굴로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소년 황태자의 눈가에 감동으로 벅찬 물기가 어렸다.

얼어붙어 있던 귀족들의 얼굴에 경악과 함께 전율이 스쳤다.

‘저, 저 폭군 황제가 저렇게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을 살아서 보다니!’

‘공주 전하께서 황제와 황태자의 마음을 완벽하게 틀어쥐셨구나!’

한 귀족이 떨리는 손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연회장 전체가 떠나갈 듯한 환호와 기립 박수로 뒤덮였다.

“에일린 공주 전하 만세!”

“아스카니아 황실의 영원한 축복이시여!”

우레와 같은 함성이 대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공포로 시작되었던 첫돌 잔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열광적인 축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앞다투어 술잔을 높이 들며 공주의 장수를 축원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연회장 입구를 지키던 근위대의 긴장된 호령과 함께 묵직한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

그 소리는 지금까지 제국의 귀족들이 입장할 때 울리던 경쾌한 팡파르와는 격이 달랐다. 차분하고도 서늘한 긴장감을 품은 고대 군례의 나팔 소리였다.

“제국 최고 무문, 밸런타인 공작가 사절단 입장!”

연회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다시 조용해졌다.

밸런타인 공작가.

아스카니아 제국 건국 이래 북방의 혹한과 마수를 막아 온 유일무이한 수호 가문이었다. 막강한 독자 기사단을 보유하여 역대 황제들조차 쉬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제국 필두 공작가였다.

황실 암투나 사교계의 줄서기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던 그 밸런타인 공작가에서 사절을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좌중이 술렁였다.

철컥.

육중한 황금빛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너머에서 은빛 늑대 문양이 새겨진 푸른 망토를 두른 기사들이 도열했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홀 한가운데로 걸어 나오는 인물이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어른이 아니었다.

푸른 제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여덟 살 남짓의 소년이었다.

빛을 쏟아낸 듯 찬란한 은발이 이마를 덮고 있었고 차갑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는 북방의 빙하처럼 투명하고 깊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동작마다 흐트러짐 없는 기품과 절제된 기백이 뿜어져 나왔다.

‘저 아이가…… 밸런타인 공작가의 후계자?’

에일린은 레오하르트의 품에 안긴 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수백 명의 귀족들이 보내는 뜨거운 시선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소년의 올곧은 푸른 눈동자가 단상 위를 향했다.

그리고 정확히 에일린의 보랏빛 눈동자와 허공에서 마주쳤다.

시선이 얽힌 찰나 소년의 차가웠던 눈빛에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소년은 옥좌 아래 레드카펫에 멈추어 섰다.

기사들이 가져온 짙은 남빛 벨벳 상자를 손에 든 소년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북방의 검, 밸런타인 공작가의 후계자 루시안 폰 밸런타인. 제국의 별이신 에일린 공주 전하의 첫돌을 축하드리고자 예를 올립니다.”

맑고 단단한 소년의 목소리가 고요한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레오하르트의 적안이 가늘어지며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

제국을 뒤흔들 두 아이의 운명적인 인연이 그렇게 첫 장을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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