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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19화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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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북방의 어린 손님

레오하르트는 상자보다 그것을 든 소년을 먼저 살폈다.

“밸런타인 공작은 어디 있지?”

연회장의 잔잔한 음악이 끊겼다. 루시안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북방 방벽을 살피고 계십니다. 영지 밖으로 비울 수 없기에 제가 대신 왔습니다.”

“여덟 살 후계자를 단독 사절로 보냈다?”

“제 뒤의 기사들은 아버지의 명을 받은 호위입니다. 축하 인사를 전할 사람은 저 하나면 충분합니다.”

소년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에일린은 아빠의 목에 팔을 두른 채 루시안이 든 남빛 상자를 내려다봤다.

‘여기서 한마디 잘못하면 축하가 심문이 되겠는데.’

카시안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시선은 상자의 은빛 늑대 문양에 머물렀다.

“내용물을 확인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루시안이 바르도에게 상자를 건넸다. 바르도는 뚜껑과 밑면의 봉인을 차례로 살핀 뒤 가는 칼끝으로 매듭을 풀었다. 음식과 선물이 황녀에게 닿기 전 검사하는 절차에는 예외가 없었다.

귀족들 사이로 작은 수군거림이 흘렀다.

“밸런타인에서 저렇게까지 직접 나설 줄은…….”

“공주 전하의 손을 잡겠다는 뜻이라면?”

레오하르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속삭이던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상자가 열렸다.

안에는 금도 보석도 없었다. 공작가 인장이 찍힌 짧은 축하 서한 아래 손바닥만 한 털장갑 한 쌍이 포개져 있었다. 짙은 남색 실 사이로 은빛 늑대 한 마리가 수놓아져 있었다. 한쪽 귀는 조금 길고 꼬리 끝은 삐뚤어졌다.

‘어? 귀여워.’

에일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레오하르트가 상자 속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북방 공작가의 선물이 장갑인가?”

“가문의 서한은 공식 인사입니다. 장갑은 제가 보태었습니다.”

“누가 만든 것이지?”

루시안은 잠깐 말을 멈췄다. 단정한 제복 소매에서 드러난 검지 끝에 작은 붉은 점이 있었다.

“제가 만들었습니다.”

연회장에 웃음을 참는 듯한 숨소리가 스쳤다. 어린 후계자가 직접 바늘을 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루시안은 등을 더욱 곧게 폈다. 공작가의 이름을 걸고 온 자리에서 자신이 만든 선물이 가벼워 보일까 봐 두려운 눈치였다. 그러나 상자를 감싸 쥔 손은 놓지 않았다.

“북쪽에서는 아기가 손끝부터 언다고 들었습니다. 공주 전하께서 바깥에 나가실 때 쓰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곧바로 에일린의 손목에 채워진 은제 팔찌로 내려갔다. 그의 호신 결계는 추위를 막는 기능까지 넣지 못했다.

‘오빠. 그런 표정 짓지 마요. 목마도 아주 좋아요.’

에일린이 팔찌를 흔들어 보이자 카시안의 굳은 입술이 조금 풀렸다. 그 사이 의관이 장갑의 안감을 확인하고 바르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한 선물이었다. 그런데도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을 내려놓지 않았다.

“내 딸에게 필요한 것은 황실에서 마련한다. 축하는 받겠다.”

소년의 눈빛이 아주 조금 어두워졌다. 그가 상자 뚜껑을 닫으려는 순간 에일린이 두 팔을 뻗었다.

“내꺼!”

레오하르트와 카시안이 동시에 그녀를 보았다.

“린린, 장갑 조아!”

‘저렇게 열심히 만든 걸 돌려보내면 마음이 상하잖아요.’

레오하르트는 잠시 침묵하다 에일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카시안이 곁에서 따라붙었지만 에일린은 제 발로 카펫을 밟았다.

아장. 아장.

조금 전 돌잡이 탁자를 외면하고 가족에게 걸어갔던 발이 이번에는 낯선 소년에게 향했다. 양쪽 귀족들은 숨을 죽였다.

루시안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에일린과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장갑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물었다.

에일린은 대답 대신 그의 손끝을 잡았다. 딱딱한 검집이나 훈련용 나무검에 생긴 굳은살 옆으로 조그만 바늘 자국이 여럿 있었다.

“손 아야?”

루시안의 눈이 커졌다.

“아닙니다. 별것 아닌 상처입니다.”

“아야.”

에일린은 제 손바닥을 그의 손가락 위에 얹었다. 그 작은 손은 아픈 곳을 덮기에도 모자랐다.

소년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황제의 품에 있을 때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아이가 이번에는 장갑보다 먼저 자기 손을 살피고 있었다.

에일린은 그의 손끝에 남은 체온을 느끼고 곧 손을 뗐다. 바늘에 찔린 작은 상처를 고치려는 행동이 아니었다. 단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 손으로 한 땀씩 꿰맸구나.’

루시안의 시선이 에일린에게 붙들렸다. 연회장에서는 어른들이 그의 나이를 잊은 채 북방의 검과 공작가 후계자로만 불렀다. 그가 바늘에 찔렸다는 사실을 물은 사람은 없었다.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작은 목소리였다.

“공주 전하의 손은 안 아프십니까?”

“응. 린린 튼튼.”

에일린이 주먹을 꼭 쥐어 보였다. 루시안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바르도가 장갑 한 짝을 건넸다. 루시안은 장갑의 입구를 넓혀 에일린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처음에는 엄지가 다른 구멍으로 들어갔고 둘 다 멈칫했다.

‘아이고. 내 손가락도 말을 안 듣네.’

에일린이 손을 빼 다시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맞았다. 장갑 끝의 은빛 늑대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나머지 한 짝을 받아 루시안에게 내밀었다.

“너도.”

“저는…….”

루시안은 자기 손과 아기 장갑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손바닥만 한 장갑이었지만 손가락이 들어갈 크기는 아니었다.

에일린도 그제야 알아차렸다. 얼굴이 화끈해졌다.

‘맞다. 몸집 차이가 있지!’

카시안이 헛기침했다. 뒤에서는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가 황제의 시선을 받고 바로 멈췄다.

루시안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장갑을 들고 있던 에일린의 손을 제 손바닥으로 가볍게 받쳤다.

“북쪽에 돌아가면 제 것도 만들겠습니다.”

“가치.”

“예. 같이 끼겠습니다.”

그가 에일린의 짧은 말을 곧바로 알아듣자 에일린은 반가워 눈을 반짝였다. 루시안은 처음으로 소년다운 작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까지 준비된 인사말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던 아이였다. 에일린은 그제야 여덟 살짜리 소년의 얼굴을 본 듯했다. 루시안 역시 손에 남은 작은 체온을 의식한 채 장갑 끝의 서툰 늑대를 바라보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귀족들 사이에서 다시 속삭임이 피어났다.

“두 가문이 저리 가까워지면…….”

“아예 장래를 약속하려는 건 아닐까?”

레오하르트의 팔걸이에 금이 갔다.

쩍.

“누가 누구의 장래를 약속한다는 것이냐.”

낮은 목소리에 연회장 공기가 얼어붙었다. 레오하르트가 쥔 팔걸이에서 나무 조각이 떨어졌다.

카시안이 옥좌 앞을 가로막고 선 귀족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

“밸런타인 공작가의 서한에는 첫돌 축하와 북방 수비 임무로 공작이 불참한다는 말뿐이다. 아이에게 준 장갑을 멋대로 혼약 문서로 읽는 자가 있나?”

루시안도 즉시 몸을 바로 세웠다.

“공주 전하께 드린 것은 겨울 장갑입니다. 다른 뜻은 담지 않았습니다.”

말은 정확했다. 그러나 에일린은 그가 장갑을 든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얼음 호수 같던 눈동자가 햇빛을 머금고 있었다.

‘어른들이 진짜 빠르다. 애들끼리 인사 좀 했다고 혼약이라니.’

에일린은 발꿈치를 들고 레오하르트 쪽으로 돌아섰다.

“아빠! 린린 장갑!”

그녀는 장갑 낀 손을 높이 흔들었다. 카시안의 은제 팔찌가 소매 아래에서 반짝였다. 레오하르트의 티아라도 머리 위에서 찰랑거렸다.

‘다 좋아요. 하나도 안 빼먹었어요.’

레오하르트가 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는 옥좌에서 내려와 에일린을 안아 올렸다.

“그래. 네가 좋다면 가져라.”

“루시안의 손은 치료하게 하겠습니다.”

카시안의 말에 루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작은 상처입니다.”

“내 동생이 아프다고 했다.”

그 한마디에는 물러설 여지가 없었다. 루시안은 잠시 카시안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에일린은 장갑 낀 손을 루시안에게 다시 흔들었다. 그도 조심스레 손을 들어 답했다.

연회장의 음악이 돌아왔다. 귀족들은 황실과 공작가 사이의 의미를 찾으려 여전히 눈을 굴렸지만 두 아이가 나눈 것은 손의 작은 상처와 겨울 장갑 이야기뿐이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자 마리안이 에일린의 눈꺼풀이 내려오는 것을 알아챘다. 레오하르트는 의전관에게 사절단의 축하를 계속 받으라 명하고 인접한 휴게실로 물러났다. 카시안과 바르도가 함께 따랐다. 루시안은 황제의 다음 인사를 기다리며 기사들과 홀에 남았다.

에일린은 아직 잠들기 싫었다. 장갑을 낀 손을 펼쳐 늑대 무늬를 다시 보고 있는데 휴게실 문밖에서 급한 발소리가 멈췄다.

바르도가 문을 열었다. 근위병 한 명이 봉랍으로 막은 얇은 봉서를 바쳤다.

“북방 감시 초소에서 올라온 급보입니다. 밸런타인 공작가의 전령이 황궁 외문에 도착해 봉인을 대조했습니다.”

레오하르트가 봉서를 펼쳤다. 방금 전 딸을 안으며 풀렸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에드릭의 사람들인가.”

카시안이 에일린의 곁으로 다가왔다.

“확인된 것입니까?”

“초소가 도주자 셋을 발견했다. 그중 둘은 오르딘 성채에서 달아난 병사들의 인상착의와 닮았다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얼굴을 가렸다. 아직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레오하르트는 봉서의 끝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행선지가 문제군.”

바르도가 봉서의 지명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밸런타인 후계자는 아직 홀에 있습니다. 길의 상태만 물어보겠습니다.”

레오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도는 문밖 근위병을 보내 루시안을 불렀다. 얼마 뒤 손끝에 약을 바른 루시안이 문턱에 섰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허락을 기다렸다.

레오하르트는 봉서의 다른 부분을 접어 가린 뒤 그를 바라보았다.

“말해 보아라.”

바르도가 지명 하나만 짚었다. 루시안의 얼굴에서 남아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아버지가 방벽을 직접 살피시는 이유가 이 길 때문입니다. 얼어붙으면 폐쇄되는 옛 소금길인데 올해는 눈이 늦었습니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지?”

루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북쪽으로 가면 방벽입니다. 남쪽으로 내려오면 사흘 뒤 황도 외곽에 닿습니다.”

에일린은 장갑 속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축하객이 가득한 황궁 밖에서 누군가 황도로 오는 길을 고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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