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17화: 폭군이 내린 본보기
황궁의 가장 오래된 문이 굉음과 함께 갈라졌다.
붉은빛 마력이 육중한 문틀을 뒤흔들더니 굳게 닫혀 있던 황태후궁의 빗장이 산산조각 났다. 파편이 바닥을 뒹굴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레오하르트는 한 팔로 에일린을 품에 안은 채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온 바르도 기사장과 성황 기사들이 복도를 장악했다.
“폐하!”
노상궁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지만 흑요석 기둥 사이에서 걸어 나온 여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황태후 베아트리스였다.
화려한 루비 목걸이를 두른 그녀는 선황의 정실다운 오만한 눈빛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선황의 비가 머무는 처소에 검을 빼 들고 쳐들어오다니. 네가 기어이 패륜의 군주로 이름을 남기려는 모양이구나.”
베아트리스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하지만 레오하르트의 눈동자에는 동요가 없었다.
“패륜을 범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황녀를 시해하려 한 배후를 색출하러 왔을 뿐입니다.”
레오하르트의 손짓에 바르도가 묵직한 철제 상자를 베아트리스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상자 안에는 회랑에서 압수한 위조 표찰 양식과 붉은 봉랍, 소공녀 궁의 식사 기록 사본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모후의 회랑 보관함에서 나온 물건들입니다. 세레나 상궁이 들고 온 독성 보온병까지 더하면 해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카시안이 차갑게 덧붙였다. 베아트리스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상궁 하나가 불손한 마음을 품고 독단으로 벌인 짓을 어찌 내게 묻느냐.”
베아트리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세레나가 무슨 짓을 꾸몄든 나와는 무관하다. 내 친필 칙령이라도 나왔느냐? 명백한 칙인 없이는 그 어떤 이유로도 모후를 문초할 수 없다.”
철저한 꼬리 자르기였다.
에일린은 레오하르트의 품에 안겨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대기업 임원들이 감사받을 때 쓰던 수법이네. 실무자한테 뒤집어씌우고 본인은 모른다고 발뺌하는 거 봐.’
법적으로 황태후 본인의 친필 서명이 없는 한 베아트리스를 당장 체포할 수는 없었다. 황태후는 그 법률적 맹점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
“불경한 기사들을 당장 물려라. 그렇지 않으면 원로원을 소집해 황제의 월권을 탄핵할 것이다.”
베아트리스가 위엄을 차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레오하르트의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살벌한 마력이 일렁였다.
황제가 이성을 잃고 황태후를 베어 버린다면 정당한 피해자가 아니라 혈육을 도륙한 폭군으로 몰려 반발을 사게 된다.
‘우리 아빠를 살인마 프레임에 가둘 순 없지.’
에일린은 앙증맞은 손으로 레오하르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아빠아.”
말랑한 뺨이 턱에 닿자 솟구치던 붉은 마력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레오하르트가 눈을 깜빡이며 숨을 골랐다.
에일린은 고개를 돌려 베아트리스의 화려한 서탁을 빤히 바라보았다. 황태후가 몸을 돌릴 때마다 서탁 한구석을 초조하게 가리려 하던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에일린은 작은 손가락을 뻗어 서탁 아래쪽의 흑단목 수납장을 가리켰다.
“어? 저기 까만 도장!”
에일린이 혀 짧은 소리로 해맑게 외쳤다.
“아저씨 까만 도장! 린린 족보 쓸 때 째려보던 아저씨 도장이다아!”
베아트리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흔들렸다.
카시안은 에일린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소년 황태자는 한달음에 서탁 앞으로 다가가 에일린이 가리킨 수납장 바닥을 검집 끝으로 눌렀다.
탁!
이중 바닥이 튀어나오며 은빛 자물쇠가 달린 서신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신함 덮개에는 낯익은 문양이 박혀 있었다.
검은 늑대와 칼.
“오르딘 후작 가문의 가주 직인입니다.”
바르도가 단호하게 외쳤다. 베아트리스의 얼굴에서 여유가 산산조각 났다.
카시안이 자물쇠를 부수고 서신들을 꺼내 들었다.
“오르딘 후작이 황태후궁으로 보낸 비밀 서신입니다. 주방 시종을 매수한 명단과 세레나 상궁에게 넘긴 독성 약재의 출처가 적혀 있습니다.”
카시안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울렸다.
“국경의 에드릭 경과 내통하여 황녀를 해치고 로엔 영지를 차지하려 사병을 모으던 계획서까지 있습니다.”
물증은 완벽했다.
오르딘 후작은 황태후의 권세를 믿고 자신의 직인을 찍은 밀서를 남겨 두었던 것이다.
“이, 이건 조작이다! 오르딘이 제멋대로 보낸 서신일 뿐이야!”
베아트리스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레오하르트는 서신을 내려다보며 낮게 웃었다. 피 냄새가 묻어나는 듯한 서늘한 미소였다.
“모후께서는 황실 법 뒤에 숨으십시오. 어미의 목을 베는 불효는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레오하르트가 적안을 번뜩였다.
“하지만 모후의 충실한 개 노릇을 한 사냥개는 다릅니다.”
“폐하!”
“바르도. 황태후궁의 모든 문을 쇠사슬로 봉쇄해라. 모후께서는 여기서 당신의 가장 믿음직한 심복이 어떻게 찢겨 나가는지 지켜보시면 될 것입니다.”
베아트리스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집무실로 돌아온 레오하르트의 몸에서는 여전히 서슬 퍼런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카시안이 책상을 짚으며 말했다.
“오르딘 후작 영지는 반나절 거리입니다. 그자는 황태후궁이 봉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병을 이끌어 국경으로 도주하려 할 것입니다.”
“도주하게 두지 않는다.”
레오하르트가 벽에 걸린 칠흑빛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에서 핏빛 마력이 넘실거렸다.
격렬한 분노가 일어날 때마다 머릿속을 찌르는 두통과 함께 마력이 폭주하려 꿈틀댔다.
그때 작은 손이 황제의 손등을 덮었다.
에일린이었다.
“아빠아.”
은은한 연보랏빛 온기가 에일린의 손끝에서 황제의 혈관을 타고 흘러들었다. 머릿속을 찌르던 쇠 긁는 소리가 사그라졌다.
에일린은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황제의 손을 감싸 안았다.
“아빠 나쁜 놈 때치 하러 가?”
“……그렇다.”
“그럼 다치면 앙대. 린린이 맛있는 맘마 먹고 기다릴 거야. 꼬옥 와야 해?”
에일린이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방긋 웃었다.
속으로는 아빠가 마력 폭주로 쓰러지지 말고 안전하게 다녀오기를 바라는 필사의 기원이었지만 겉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배웅이었다.
레오하르트의 굳었던 입꼬리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에일린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내 딸의 식탁을 어지럽힌 버러지를 치우고 금방 돌아오마.”
황제가 일어서며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황궁의 수호는 네게 맡긴다. 에일린의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마라.”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카시안이 가슴에 주먹을 얹었다.
황도 남쪽 오르딘 후작 영지.
오르딘 성채는 비상 소집된 사병들로 소란스러웠다.
“빨리 마차를 꾸려라! 국경의 에드릭 경에게 전령을 보내 군대를 합류시키라고 해!”
오르딘 후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함을 질렀다. 그는 성문을 굳게 닫고 성벽에 방어 마법 결계를 올리라 지시했다. 요새를 방패 삼아 시간을 벌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길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오판은 채 한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쿠구구궁!
대지를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붉은 깃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황 기사단이었다. 선두에는 칠흑 같은 군마를 탄 레오하르트가 서 있었다.
“어, 어떻게 벌써 도착한 것이냐!”
오르딘 후작이 성벽 위에서 경악했다.
레오하르트는 협상 따위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는 말 위에서 검을 뽑아 허공을 갈랐다.
번쩍!
하늘을 가르는 거대한 붉은 마력의 참격이 성벽 결계를 찢어발겼다.
쾅―!
수백 년을 버텨 온 거대한 철제 성문이 반으로 쪼개지며 무너져 내렸다.
“막아라!”
오르딘 후작의 비명은 성황 기사단의 돌격에 묻혔다.
최정예 기사단 앞에서 사병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피와 비명이 성채를 뒤덮었고 마침내 레오하르트의 군홧발이 후작 저택 바닥을 짓밟았다.
오르딘 후작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을 기고 있었다.
“폐, 폐하! 살려 주십시오! 황태후 마마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레오하르트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후작의 머리채를 거칠게 틀어쥐었다. 서늘한 적안이 공포에 질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네놈이 황태후의 개든 누구의 개든 상관없다.”
레오하르트의 목소리가 귓전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감히 내 딸의 그릇에 독을 타려 한 대가는 온 가문의 멸망뿐이다.”
빠각!
검집으로 후작의 어깨뼈를 내리찍은 레오하르트가 차갑게 명했다.
“오르딘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고 영지를 황실 직속령으로 편입한다. 사병을 처형하고 후작을 쇠사슬에 묶어 황도로 압송해라.”
대귀족 가문이 하룻밤 만에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새벽안개가 걷힐 무렵 레오하르트는 황궁으로 귀환했다.
피 묻은 군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은 황제가 소공녀 궁의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밤새 잠들지 않고 기다리던 카시안과 에일린이 있었다.
“아빠!”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에일린이 두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레오하르트는 딸을 번쩍 안아 올렸다. 작고 따스한 온기가 품에 안기자 밤새 물들었던 살기와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다친 곳은 없느냐.”
“응! 린린 안 아포! 아빠 안 다쳐써?”
에일린이 작은 손으로 레오하르트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황제의 얼굴에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네 말대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왔다.”
카시안도 다가와 예를 표했다.
“오르딘 후작이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황태후궁은 여전히 봉쇄된 채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되었다. 이제 그 누구도 감히 내 딸에게 독을 내밀 생각 따위는 하지 못할 것이다.”
레오하르트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오르딘 가문이 하룻밤 사이에 몰락했다는 소식은 아침이 밝자마자 황도를 강타했다.
황태후 파벌에 섰던 귀족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문을 걸어 잠갔다. 오르딘 후작처럼 목이 잘리지 않으려면 황제의 분노를 가라앉힐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낸 유일한 길은 단 하나였다.
바로 황제의 역린이자 유일한 구원자인 어린 황녀 에일린의 마음을 사는 것이었다.
마침 며칠 뒤면 에일린이 황궁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첫 번째 생일이었다.
오후가 되자 황궁 정문으로 제국 각지의 귀족들이 보낸 마차가 끝없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동부 백작령에서 최고급 비단 백 필을 바쳤습니다!”
“남부 상단에서 바다 진주로 엮은 노리개를 올렸습니다!”
“서부 공작령에서 마법 장난감 마차를 보내왔습니다!”
전령들의 다급한 보고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소공녀 궁 뜰이 순식간에 보석 상자와 선물 더미로 가득 찼다.
에일린은 창가에 서서 산더미처럼 쌓여 가는 금은보화를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저게 다 내 선물이라고? 전생에선 치킨 쿠폰 한 장 받기도 힘들었는데 이게 바로 폭군 아빠 밑에서 누리는 인생의 맛인가!’
에일린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때 카시안이 한 통의 편지를 들고 다가왔다.
“에일린. 제국 최고 명문가인 밸런타인 공작가에서도 사절을 보내왔다.”
카시안의 눈빛에 묘한 경계심이 스쳤다.
“공작가의 어린 후계자가 네 생일 연회에 직접 참석하겠다고 청해 왔다더군.”
밸런타인 공작가의 후계자.
훗날 에일린의 삶에 커다란 파도를 몰고 올 소년과의 인연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