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16화: 눈물로 붙잡은 위문 사절
소공녀 궁의 아침은 평소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주방에서 올라온 모든 쟁반에는 세 겹의 붉은 봉인이 붙어 있었다. 운반한 시종과 검수관 그리고 기록관이 각자의 장부에 이름을 남겼다. 에일린의 우유죽 하나가 황궁의 비밀문서보다 엄격하게 다뤄지는 풍경이었다.
에일린은 침대에 앉아 은쟁반을 바라보았다.
“린린 맘마.”
마리안이 조심스럽게 우유죽 그릇을 들었다.
“이번에는 파울 조리장께서 직접 만드셨습니다. 봉인도 모두 확인했어요.”
따뜻한 우유와 으깬 사과의 향이 방 안에 퍼졌다. 어제 주방에서 맡았던 비릿하고 따가운 냄새는 없었다.
그런데도 에일린의 손은 그릇을 향해 쉽게 뻗어지지 않았다.
안전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한 번 겪은 위험을 쉽게 잊지 않았다. 전생의 회사에서도 한 번 사고가 난 결재선은 다음부터 서류 모서리 하나까지 의심해야 했다.
“아야 없어.”
에일린은 코를 킁킁거리다 작은 숟가락을 받아 들었다.
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폐하께서 드셨습니다.”
시종의 목소리 뒤로 낮고 무거운 음성이 이어졌다.
“내가 직접 보겠다.”
레오하르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외투에는 새벽부터 집무를 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적안은 평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황제는 에일린의 앞에 놓인 그릇부터 확인했다. 카시안도 곧장 뒤따라와 봉인과 장부를 살폈다.
“기록관의 필체가 어제와 다릅니다.”
“교대했겠지.”
“교대 시각은 같지만 서명 간격이 다릅니다.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카시안이 검수관을 부르려 하자 레오하르트가 손을 들었다.
“네가 아침부터 모든 그릇을 들여다보면 네 상처가 먼저 벌어진다.”
“에일린의 음식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
두 사람의 붉은 눈이 부딪쳤다. 에일린은 그 사이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두 분 다 보호 본능이 너무 과한데요. 보안팀과 감사팀이 동시에 출동하면 업무가 마비될 수준이다.’
에일린은 숟가락을 레오하르트에게 내밀었다.
“아빠 먼저.”
레오하르트는 우유죽을 조금 맛보았다. 카시안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그릇의 가장자리에서 시선을 떼었다.
“이상 없다.”
“린린 먹어.”
에일린이 입을 벌리자 레오하르트가 직접 숟가락을 가져왔다. 따뜻한 죽이 목을 지나가자 굳었던 몸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황태후 마마의 위문 사절이 도착했습니다.”
카시안의 손이 허리의 검자루로 향했다.
“지금은 누구도 들이지 마라.”
“황태후궁의 수석 상궁 세레나가 친서를 지니고 왔다고 합니다. 황녀 전하의 건강을 염려하신다는 말씀도 함께 전했습니다.”
레오하르트의 표정에 냉기가 서렸다.
분유에 위험 물질이 들어갈 뻔한 다음 날이었다. 하필 황태후가 위문품을 보낸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빨랐다.
“들여보내라.”
카시안이 돌아보았다.
“아버지.”
“문 앞에서 돌려보내면 저들은 우리가 무언가를 숨긴다고 떠들 것이다. 안으로 들여서 확인한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을 품에 안았다. 카시안은 반대편에 서서 방 안의 출입구를 살폈다.
잠시 뒤 은빛 머리 장식을 한 여인이 들어왔다. 검은색과 자주색이 섞인 옷차림은 단정했고 얼굴에는 정중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태후궁의 수석 상궁 세레나입니다.”
세레나 뒤의 시종 둘이 은제 보온병과 봉인된 문서 상자를 내려놓았다.
“황태후 마마께서 어젯밤 소식을 전해 들으셨습니다. 어린 황녀께서 위험한 일에 휘말리셨다 하여 몸을 보할 약재와 우유를 보내셨습니다.”
“소식이 빠르군.”
레오하르트의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
“황궁의 모든 소식은 황태후 마마께 보고되는 것이 도리입니다.”
“내 딸의 식사도 황태후에게 보고되는가?”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세레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걱정이 크셨다는 뜻입니다.”
에일린은 세레나의 말보다 보온병을 먼저 바라보았다.
은제 병의 뚜껑에는 붉은 봉랍이 붙어 있었다. 봉랍 가장자리에는 세 갈래로 갈라진 검은 선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냄새가 났다.
달콤한 약초 향 아래 숨은 비릿한 쇠 냄새. 목 안쪽을 까끌하게 만드는 익숙한 자극이었다.
에일린의 손가락이 레오하르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아야…….”
“에일린?”
에일린은 보온병을 가리켰다. 세레나의 소매 끝에서도 검은 실밥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 중앙 정원과 주방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색이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어른들 앞에서 침착하게 설명할 수 없는 몸이었다. 그렇다면 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에일린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아야아아…….”
작은 울음이 방을 울렸다.
레오하르트가 에일린을 품에 깊이 감쌌다.
“어디가 아프냐. 누가 무엇을 했지?”
에일린은 세레나를 가리키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고는 레오하르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할머니 시러. 냄새 아야.”
세레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황녀 전하께서 저를 잘못 보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처음 뵙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우는 건 아기가 할 수 있는 아주 정상적인 행동이죠.’
에일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더 크게 울었다. 작은 어깨를 들썩이고 레오하르트의 옷깃에 눈물을 비볐다.
카시안은 울음보다 행동을 살폈다. 에일린은 보온병을 볼 때마다 몸을 움츠렸고 세레나가 한 걸음 다가오자 고개를 돌렸다.
“보온병을 열지 마십시오.”
카시안이 기사들에게 명했다.
세레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황태후 마마의 위문품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겁니다.”
카시안은 보온병의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안쪽이 지나치게 깨끗했다. 누군가 손잡이의 흔적을 일부러 닦은 것처럼 보였다.
“리세. 어제 주방에서 회수한 유리병과 표찰을 가져와라.”
리세가 달려 나갔다.
세레나는 한 걸음 물러났다.
“저는 명을 받아 물품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황태후 마마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모욕하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에일린은 울음을 뚝 멈췄다.
‘책임질 일이 생기면 지시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방어 문장이다.’
에일린은 레오하르트의 가슴을 두 번 두드렸다.
“아빠. 잡아.”
레오하르트는 세레나를 바라보았다.
“문밖으로 나가려는 자는 모두 붙잡아라.”
바르도 기사장과 성황 기사들이 움직였다. 세레나의 뒤에 있던 시종 하나가 보온병을 내려놓고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카시안의 검집이 시종의 발목을 걸었다.
“도망칠 이유가 있나?”
시종이 넘어지며 품에서 작은 열쇠를 떨어뜨렸다. 열쇠의 머리에는 세 갈래 선이 새겨져 있었다.
세레나가 숨을 삼켰다.
그때 리세가 돌아왔다. 그녀는 천으로 감싼 유리병과 검은 섬유 조각 그리고 주방 표찰을 들고 있었다.
바르도가 세 물건과 보온병의 봉랍을 나란히 놓았다.
“문양이 같습니다.”
의관이 보온병 가까이에서 냄새를 맡자 얼굴이 굳었다.
“유리병의 잔향과 비슷합니다. 열기 전에는 성분을 확정할 수 없지만 같은 자극성 물질이 묻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카시안은 검은 섬유를 보온병 손잡이 안쪽에 가져갔다. 섬유 끝의 매듭이 틈에 걸려 있었다.
세레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세레나 상궁. 이 위문품은 황태후의 명으로 준비했나?”
“그렇습니다.”
“문서로 증명해라.”
세레나가 문서 상자를 열었다. 자주색 끈으로 묶인 문서 겉면에는 황태후궁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리세가 장부를 펼쳤다.
“궁정국 인장 보관 기록에 이 문서 번호가 없습니다.”
“기록관의 실수입니다.”
“어제 주방 표찰도 실수였습니까?”
카시안의 질문에 세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에일린은 레오하르트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갔다.
“아빠. 저기 가면 안 돼.”
에일린은 세레나가 서 있던 복도 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황태후궁으로 이어지는 회랑이 있었다. 세레나는 시선을 돌리자마자 뒤꿈치를 돌렸다.
카시안이 먼저 앞을 막았다.
“상궁. 왜 회랑으로 가려 하십니까?”
“황태후 마마께 이 일을 보고해야 합니다.”
“보고는 우리가 하겠습니다.”
세레나가 달리려는 순간 바르도의 기사가 양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소매에서 검은 섬유 몇 가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오하르트의 적안이 회랑 끝을 향했다.
“황태후궁으로 통하는 문을 봉쇄한다.”
“폐하. 황태후 마마의 허락 없이는 그 궁을 수색할 수 없습니다.”
세레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을 한 팔로 안은 채 황제의 붉은 인장을 들어 올렸다.
“내 딸의 목숨을 노린 물품이 황태후궁에서 나왔다. 허락을 구할 이유가 없다.”
황제의 인장이 봉인문에 닿았다.
쾅!
붉은 빛이 문을 뒤덮으며 오래된 마법 봉인이 갈라졌다. 바르도가 기사들을 앞세워 어두운 회랑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속 상자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상자 안에는 위조 표찰의 빈 양식과 붉은 봉랍이 들어 있었다. 소공녀 궁의 식사 기록을 베껴 쓴 사본도 함께 나왔다. 가장 아래에는 낡은 천 조각이 접혀 있었다.
세 갈래 선과 반쯤 열린 눈.
에일린이 마리안의 은제 방울에서 보았던 문양과 똑같았다.
“황태후 본인의 친필 명령은 없습니다.”
카시안이 문서를 넘기며 말했다.
“하지만 이 궁에서 위조 표찰과 식사 기록을 준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레오하르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세레나와 관련자들을 구금한다. 황태후궁의 출입을 봉쇄하고 모든 보관함을 조사해라. 황태후 베아트리스에게 지금 당장 황제 집무실로 출석하라는 명을 전한다.”
카시안은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에일린은 레오하르트의 품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울음을 오래 끌어낸 탓에 기운이 빠졌다.
“에일린이 또 무리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작은 목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에일린은 졸린 눈으로 두 사람의 손을 각각 잡았다.
“아빠도 오빠도 가치 지켜.”
카시안의 굳은 얼굴이 흔들렸다.
“그래. 이번에는 네가 앞에 서지 않아도 된다.”
레오하르트도 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다시는 네가 울어서 알려 주게 만들지 않겠다.”
에일린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오늘의 눈물 연기는 성과가 좋았다.’
품 안에서 손을 움직이던 에일린의 손끝에 낡은 천 조각이 스쳤다. 천 아래쪽에는 희미한 글자가 남아 있었다.
별이 길을 잃는 밤에도.
그 뒤의 글자는 피와 먼지에 가려져 읽을 수 없었다.
황태후궁의 문이 안쪽에서 굳게 닫혔다.
같은 시각 레오하르트의 명령을 받은 전령이 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황태후 베아트리스는 출석하지 않았다.
닫힌 궁문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황태후께서는 황제 폐하의 부당한 수색 명령에 응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을 안은 채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럼 문을 열어야겠군.”
그의 손에서 붉은 인장이 다시 빛났다.
황궁의 가장 오래된 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