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021화 [침묵의 파동]
테오필루스 아카데미 대강당의 웅장한 아치형 천장 아래로 수백 명의 인파가 뿜어내는 열기가 가득 찼다.
아침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여 붉고 푸른빛의 파편으로 바닥에 쏟아지고 있었다.
중앙 원형 무대를 둘러싼 계단식 관람석에는 전교생과 학사위원회 소속 교수들이 빈자리 없이 들어차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커졌다.
"정말 F-Class를 오늘 심사하는 건가?"
"한 달이나 남은 정기 평가를 열흘 만에 치른다니 말이 안 되잖아. 그냥 대놓고 쫓아내겠다는 뜻이지."
"창고 화재 때 운 좋게 불 좀 껐다고 기고만장하더니 꼴좋군. 플래티넘 클래스 학생들도 2학년 과제는 반년을 매달려야 통과하는데."
귀족 출신 학생들의 입가에는 노골적인 조롱과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무대 한가운데에 닿는 순간 비웃음 섞인 웅성거림은 서늘한 침묵으로 바뀌었다.
무대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은 통상적인 2학년 실습용 마력석 판이 아니었다.
높이만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흑철 기둥.
상단부에는 붉은 계측선이 촘촘히 새겨진 유리 수은관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하단부에는 육중한 마력 흡수판과 압력 분산 리벳이 흉측하게 얽혀 있었다.
3학년 실습용 특수 기구인 고중량 계측탑이었다.
"세상에 저건 3서클 상급 파괴 마법을 버티려고 만든 측정기잖아."
"저 쇳덩어리의 수은주를 밀어 올리려면 어설픈 마력으로는 어림도 없어. 최소한 바위를 박살 낼 정도의 충격파를 정면으로 꽂아 넣어야 한다고."
학생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심사위원석 맨 앞자리에 앉은 셀레네 바이스 교수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완벽하게 다려진 감청색 정복과 차가운 은회색 눈동자가 무대를 날카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F-Class가 지난 열흘 동안 강의실에 틀어박혀 무슨 잔꾀를 부렸든 저 거대한 쇳덩어리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터였다.
그때 대강당 측면의 삐걱거리는 작은 쪽문이 열렸다.
낡은 로브를 대충 걸친 에신 루드윅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걸어 들어왔다.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고 걸음걸이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드러누울 것처럼 나태했다.
'아 졸려 죽겠네.'
에신은 가슴 안쪽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미열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젯밤에도 마력 역류증의 통증 때문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 새벽녘에 하리가 타 준 은월초 차 덕분에 겨우 피를 토하지 않고 버텼을 뿐이었다.
심사위원석 구석에 놓인 등받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에신은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얼른 시작하고 얼른 끝내라.'
에신의 가슴속에는 단 하나의 간절한 소망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 첫 주자로 나선 하리가 시원하게 0점을 맞고 낙제하는 것.
그렇게 되면 F-Class는 오늘부로 강제 해산되고 자신은 무능한 명예교수로 낙인찍혀 아카데미에서 쫓겨난다.
위자료나 퇴직금 따위는 필요 없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 구석에 방 한 칸짜리 오두막을 얻어 남은 여생 동안 햇살이나 받으며 낮잠만 잘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하리야 미안하지만 네가 오늘 수고 좀 해줘야겠다. 얌전하게 떨어져 주면 내 영혼을 다해 고마워할 테니까.'
에신이 평온한 은퇴의 단꿈에 젖어들 무렵 대강당 정문이 활짝 열렸다.
"F-Class 응시자 입장!"
진행관의 카랑카랑한 외침과 함께 세 명의 학생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하리 폰 로젠 카이드 루나.
세 사람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나 위축감이 없었다.
열흘간의 혹독한 수련으로 뺨은 다소 야위어 있었지만 그들의 눈동자는 깊고 맑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수백 개의 멸시 어린 시선 따위는 그들의 피부를 스치지도 못하는 듯했다.
카이드와 루나는 대기석에 멈춰 섰고 첫 번째 주자인 하리가 당당한 보폭으로 중앙 검증대 원 안으로 들어섰다.
심사위원장석에 앉아 있던 바르모트 총장이 손을 들어 장내를 정돈했다.
"지금부터 학사위원회 긴급 의결에 따른 F-Class 학업 성취도 특별 정기 평가 1일 차 실기를 개시한다."
총장의 나직한 음성이 확성 마법을 타고 강당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1일 차 검증 과목은 마법 유체 제어. 대상 기구는 3학년 실습용 고중량 계측탑이다. 심사위원 다섯 명 중 세 명 이상에게서 70점 이상의 점수를 얻지 못할 경우 규정에 따라 즉시 낙제 처리된다."
규정이 낭독되자 셀레네 바이스 교수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무대 위의 하리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로젠 영애."
하리가 시선을 들어 셀레네를 바라보았다.
"너는 입학 이래 단 한 번도 체내 마력의 유출 압력을 통제하지 못해 F-Class로 강등된 전력이 있다. 이번 평가에서 측정할 고중량 계측탑은 외부의 방대한 마력 하중을 견디도록 설계된 특수 기구다."
셀레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어설픈 장난이나 마력의 파편으로는 계측탑의 바늘을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과거처럼 마력을 제어하지 못해 폭주를 일으킨다면 그 즉시 실격은 물론 영구 퇴학 처분이 내려질 테니 명심하도록."
관람석의 귀족 학생들이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폭주나 안 하면 다행이지."
"저 거대한 기둥을 움직이겠다고 마력을 쥐어짜다가 기절하는 거 아냐?"
하지만 하리의 표정에는 티끌만 한 동요도 일지 않았다.
그녀는 셀레네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무대 중앙의 고중량 계측탑을 향해 몸을 돌렸다.
우우우웅—
기구 관리 조교들이 마력 밸브를 개방하자 계측탑 중심부에서 묵직한 구동음이 울려 퍼졌다.
계측탑 내부의 고압 유입관을 따라 수백 단위의 마력 압력이 순환하기 시작했다.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내부에서 팽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
그 압력만으로도 무대 주변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으며 관람석 1열에 앉은 학생들의 피부를 짓눌렀다.
"압력이 저 정도라고? 저걸 정면으로 뚫어야 한다고?"
헤르만 보조교수가 심사위원석 뒤편에서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손수건을 쥐어짰다.
"말도 안 돼... 저건 웬만한 상급 마법사의 타격도 그대로 튕겨내는 압력이야. 하리 양이 아무리 유체막을 다듬었다 해도 물리적인 하중 차이가 너무 커!"
헤르만은 절망적인 눈길로 구석에 앉은 에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신은 여전히 의자에 파묻힌 채 하품을 쩍 하고 있었다.
'그래 바로 저거지. 저 무식한 쇳덩어리를 무슨 수로 움직여. 오늘 시험은 5분 만에 끝나겠군.'
에신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눈을 감았다.
퇴학 처분이 내려지면 바로 짐을 싸서 남부 시골로 내려가는 마차를 타리라 결심하던 순간이었다.
무대 중앙에 선 하리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귓가에 열흘 전 강의실에서 들었던 스승의 나른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바위가 무거우면 밑에 지렛대를 대거나 틈새에 물이나 흘려 넣으면 되지.'
'하던 것만 해라.'
하리의 푸른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스승님은 이미 모든 답을 주셨다.
저 거대한 쇳덩어리와 정면으로 힘겨루기를 할 필요는 처음부터 없었다.
무거운 바위를 부수려 하지 마라.
바위가 가진 무게를 역이용하여 지렛대로 굴려버리고 틈새로 스며들어 안쪽에서부터 균형을 무너뜨려라.
하리는 두 팔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어깨의 힘을 완전히 뺐다.
가슴속에 고여 있던 방대한 마력을 억지로 쥐어짜 압축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력의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며 자신의 체내 회로를 허공의 공기와 하나로 연결했다.
스승이 보여주었던 그 무심하고도 완벽한 힘 빼기의 경지.
하리의 손끝에서 푸른빛의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관람석의 학생들이 숨을 죽였다.
모두가 귀를 찢는 폭음이나 거대한 화염 또는 얼음 기둥이 솟구치는 광경을 기다렸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촤아아아...
마치 이른 새벽 숲속의 안개가 번져나가듯 고요하고 잔잔한 마력의 물결이 하리의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뭐야? 영창도 안 해?"
"저게 마법이야? 그냥 마력을 허공에 흘려버리는 거잖아!"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던 노교수들의 눈빛이 일순간 달라졌다.
"저건..."
바르모트 총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리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었다.
수천수만 가닥으로 정밀하게 쪼개진 머리카락보다 얇은 푸른 마력선들.
그 미세한 선들이 공기 중에서 그물망처럼 얽히며 흐르는데도 단 한 줌의 반발력이나 마찰음조차 일으키지 않았다.
완전한 무저항의 유체.
하리의 유체 마력선은 계측탑의 두꺼운 외벽 장갑을 향해 돌진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을 타고 미끄러지듯 흘러가 계측탑 하단의 공기 흡입구와 외부 연결 리벳의 미세한 틈새 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스르르르.
마치 빗물이 메마른 바위의 미세한 균열을 찾아 파고들듯 하리의 마력은 장비의 관절부 속으로 거침없이 침투했다.
"흡입구로 들어갔다고?!"
측정 기구를 담당하던 기술 교수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저 기구 안쪽에는 300단위의 고압 마력이 순환하고 있어! 외부 마력이 저 안으로 침투하면 압력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소멸할 텐데!"
기술 교수의 말대로 계측탑 중심부의 유입관은 거대한 마력의 급류가 휘몰아치는 사지였다.
하지만 하리의 마력선은 그 급류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았다.
급류가 소용돌이치는 방향에 맞춰 자신의 흐름을 유연하게 비틀었다.
물이 물을 만나 섞이듯 하리의 마력은 고압 유입관의 순환로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압력이 집중되는 중심축의 교차점에 도달한 순간.
하리는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가볍게 멈췄다.
마력을 밀어 넣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흐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던 마력의 매듭 하나를 찰나의 순간에 툭 끊어냈다.
결손(缺損).
스승 에신이 제3보급 창고의 화염 속에서 보여주었던 바로 그 공백이었다.
맹렬하게 회전하던 거대한 마력의 급류 한가운데에 손톱만 한 진공의 구멍이 생겨났다.
그 작은 구멍이 생겨난 순간 계측탑 내부의 균형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우웅— 콰르르르르!
계측탑 내부를 순환하던 300단위의 방대한 자체 마력이 길을 잃고 그 작은 결손의 구멍을 향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갔다.
거대한 바위 밑에 박아 넣은 지렛대가 바위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튕겨 오르듯 계측탑이 품고 있던 거대한 압력이 내부 관절부를 사정없이 뒤흔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흑철 기둥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진동했다.
"기 기구가 흔들린다!"
"외부에서 타격하지도 않았는데 왜 안쪽에서 기계가 비명을 지르는 거지?!"
학생들이 경악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셀레네 바이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말도 안 돼... 내부 유입관의 압력을 역류시켰다고? 저 낙제생 계집이 대체 무슨 짓을..."
하지만 하리의 마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리는 양손을 좌우로 넓게 펼쳤다.
계측탑 내부에서 요동치는 파괴적인 진동이 외부로 폭발하려던 찰나 하리의 몸 주변에서 거대한 푸른빛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촤아아아아아—!
폭발이 아니었다.
귀를 찢는 굉음도 파편의 비산도 없었다.
그것은 대강당 바닥 전체를 잔잔하게 덮어가는 투명하고 깊은 호수의 수면과도 같았다.
무대 위를 넘어 심사위원석과 관람석 3열까지 순식간에 번져나간 푸른 광역 마력장.
그 고요한 유체의 장막이 계측탑에서 터져 나오려던 거대한 충격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마치 거대한 파도를 품어 안아 잔물결로 바꾸어버리는 깊은 바다처럼.
대강당 안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바람 소리도 학생들의 숨소리도 계측탑의 기계음조차 하리가 펼쳐낸 고요한 유체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다.
침묵.
오직 맑고 서늘한 푸른빛만이 강당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숨 막히는 적막을 깨뜨린 것은 맑고 청명하게 울려 퍼진 금속성의 타종 소리였다.
땡—!
계측탑 상단의 유리 수은관 속에서 붉은 액포가 미친 듯이 솟구쳐 올랐다.
십... 삼십... 오십... 칠십...
수은주는 멈추지 않았다.
구십... 백...
마침내 계측관의 최상단 눈금을 뚫고 올라간 수은주가 상단 밸브의 한계점을 강타했다.
치이이익—!
과부하를 방지하기 위해 장착된 계측탑의 비상 배출 밸브가 하얀 증기를 허공으로 격렬하게 내뿜었다.
3학년 실습용 고중량 계측탑이 허용할 수 있는 최대 하중 도달.
만점(滿點)을 알리는 신호였다.
대강당 안은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
수백 명의 학생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뇌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폭발도 없었다.
화려한 주문도 없었다.
단지 머리카락 같은 푸른 선 몇 가닥을 흘려 넣고 고요한 수면 같은 마력장을 펼쳤을 뿐인데 웬만한 상급 마법으로도 흠집조차 내지 못하던 3학년용 계측탑이 한계치를 초과해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허... 허허..."
기술 담당 교수가 들고 있던 채점판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부딪힌 나무판 소리가 정적을 깼다.
"마력의 낭비율... 제로."
기술 교수의 떨리는 목소리가 강당을 울렸다.
"외부 타격으로 인한 충격 손실이 전혀 없습니다. 장비 내부의 마력 순환 궤도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최소한의 결손을 주입하여 장비 자체의 하중을 계측 센서로 유도했습니다. 이건... 이건 단순한 제어가 아닙니다."
교수가 붉어진 눈으로 하리를 바라보았다.
"마력 구조의 본질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신역(神域)의 유체 술식입니다!"
그 외침이 신호탄이 되었다.
"만점이라고?!"
"말도 안 돼! F-Class 낙제생이 3학년 계측탑을 만점으로 뚫었다고?!"
"소리도 없이 저 거대한 기둥을 울려버렸잖아!"
관람석 곳곳에서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귀족 학생들은 사색이 되어 입을 다물지 못했고 F-Class를 조롱하던 이들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심사위원석의 바르모트 총장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총장의 박수 소리에 맞춰 다른 심사위원 교수들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채점판에 점수를 적어 넣었다.
[심사위원 1: 98점.]
[심사위원 2: 99점.]
[심사위원 3: 100점.]
[심사위원 4: 97점.]
압도적인 합격이었다.
오직 단 한 사람 셀레네 바이스만이 채점 펜을 쥔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가 분노와 굴욕감으로 이글거렸다.
"편법입니다... 이건 규정된 방식의 마법이 아닙니다! 기구의 구조적 결함을 찌른 비열한 요행일 뿐입니다!"
셀레네가 소리쳤지만 총장은 엄숙하게 고개를 저었다.
"셀레네 교수. 이번 평가의 과제는 '마법 유체 제어'였소. 로젠 영애는 마력의 흐름을 통제하여 기구의 센서에 도달시켰고 그 과정에서 주변에 단 1의 피해도 주지 않는 완벽한 광역장을 선보였소. 이것을 마법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유체 마법을 논할 자격이 없소."
총장의 단호한 선언에 셀레네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리는 쏟아지는 찬사와 경악 속에서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녀는 환호하는 관중이나 총장을 바라보지 않았다.
천천히 몸을 돌린 하리는 심사위원석 가장 구석진 자리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낡은 로브를 걸친 스승 에신 루드윅이 있었다.
하리의 푸른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보셨습니까 스승님.'
하리는 가슴속으로 뜨겁게 외쳤다.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신 본질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피를 토해가며 저희에게 열어주신 그 길이 오늘 증명되었습니다.'
하리의 깊은 절을 본 카이드와 루나 역시 가슴을 펴며 벅찬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스승 에신 루드윅의 뇌 속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대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
에신은 멍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증기를 뿜어내며 헐떡이는 3학년용 계측탑.
채점판에 선명하게 박힌 99점과 100점의 숫자들.
그리고 강당 전체를 뒤흔드는 기립박수.
'잠깐만.'
에신의 등줄기를 타고 얼음장 같은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떨어지라고 했잖아...'
0점 맞고 깔끔하게 퇴학당해서 자신도 쫓겨나길 바랐다.
그런데 3학년 쇳덩어리를 박살 내다 못해 만점을 받아버렸다고?
심지어 저 하리의 눈빛을 보라.
'스승님의 명예를 지켰습니다'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저 맑고 광기 어린 충성의 눈빛을.
'망했다.'
에신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이런 괴물 같은 성과를 내버렸는데 학사위원회가 F-Class를 해체하겠는가?
자신을 무능하다고 쫓아내겠는가?
쫓아내기는커녕 총장이 멱살을 잡고 종신교수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달려들 판이었다.
남부 시골 마을의 햇살 가득한 오두막.
새소리를 들으며 하루 종일 늘어지게 자려던 낮잠의 꿈.
그 모든 평화로운 미래가 하리의 손끝에서 피어난 푸른 유체선과 함께 산산조각 나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커헉..."
에신은 차오르는 절망감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신음을 삼켰다.
'내 낮잠이... 내 은퇴가...'
하지만 에신의 그 고통스러운 표정을 본 헤르만 보조교수는 눈물을 훔치며 감격에 겨워 속삭였다.
"루드윅 교수님... 제자의 눈부신 성장을 보시고 감격을 이기지 못해 가슴을 쥐시는군요. 진정한 스승이십니다..."
에신은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으로 헤르만을 노려보려 했으나 눈앞이 캄캄해져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대강당 중앙 무대 위로 검술부 지도교수가 서늘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대기석에 서 있는 카이드의 낡은 목검에 꽂혔다.
"1일 차 유체 제어는 인정하지. 하지만 내일 2일 차 마검술 궤적 시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검술부 교수의 서슬 퍼런 경고가 울려 퍼졌다.
1일 차의 충격적인 승리 뒤로 더 가혹한 2일 차의 칼날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