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022화 [벽의 빈자리]
대강당 바닥에 새로 박힌 황동선이 아침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그 선 너머로 반투명한 방벽 세 겹이 겹쳐 서 있었다. 첫째는 푸른빛, 둘째는 희미한 은빛, 셋째는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맑았다. 벽의 끝에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었다.
관람석은 일찍부터 가득 찼다. 하리가 울린 계측탑은 무대 구석에 아직도 식지 않았다. 학생들은 그 앞에서 입을 다물었지만 카이드에게 향하는 눈빛은 여전했다.
"물길이야 로젠 영애의 마력량으로 만들었다 쳐도 저 녀석은 뭘로 벽을 지나가지?"
귀족 학생 하나가 카이드의 목검을 가리켰다. 옆자리에 앉은 학생은 대답 대신 웃었다.
카이드가 낡은 목검을 쥐고 황동선 앞에 섰다.
"마검술 궤적 시연. 응시자는 방벽을 지나 종을 울려야 한다. 방벽 파손은 감점이다."
검술부 지도교수가 또박또박 규칙을 읽었다. 계측석에 새겨진 수치가 붉게 빛났다. 세 방벽을 순환하는 압력이 각기 다른 박자로 오르내렸다.
"심사위원 다섯 명 가운데 셋 이상에게 70점을 받아야 합격이다. 계측은 통과한 층수와 궤적에 따른 마력 이동, 장비 손상을 기록한다."
조교가 시험 삼아 쇠막대를 첫째 벽에 댔다. 막대 끝이 닿기도 전에 뒤로 튕겨 나갔다. 관람석 첫 줄까지 짧은 바람이 밀려왔다.
"2학년 정규 기준을 크게 넘지 않습니까?"
헤르만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자 지도교수는 차갑게 답했다.
"정규 기준은 통과 대상과 안전 기준을 정할 뿐 장비의 학년을 제한하지 않소. 어제도 같은 장비 교체를 인정했지 않습니까."
하리가 손톱을 손바닥에 박았다. 그녀가 시험을 치른 자리에 더 흉악한 기구가 들어선 셈이었다.
에신은 심사위원석 구석에서 방벽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좀 어렵겠는데.'
그렇다면 해고가 아직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 생각이 반가웠다가 카이드의 손바닥에 감긴 새 붕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열흘 동안 저 손으로 몇 번이나 목검을 멈췄을지 짐작이 갔다. 손만은 성하게 돌아오라는 말이 목 끝에 걸렸다.
"교수님."
카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하던 것만 하겠습니다."
에신은 난처하게 턱을 괴었다.
"손부터 조심해라. 종 하나 치려다가 손 망가지면 귀찮아진다."
카이드는 웃지 않았다. 목검의 손잡이를 고쳐 쥐고 방벽 앞으로 걸어갔다.
첫 번째 방벽은 닿기도 전에 밀어냈다.
카이드의 로브 자락이 뒤로 날렸다. 그는 발꿈치를 바닥에 박고 목검을 비스듬히 휘둘렀다. 칼끝이 첫째 벽 앞에서 딱 멈췄다.
그 자리에 투명한 선 하나가 남았다.
하나. 둘.
선은 셋을 세기도 전에 압력에 짓눌려 사라졌다. 카이드가 한 걸음 물러나는 동안 방벽이 내민 힘이 손목을 때렸다. 붕대 아래로 붉은 점이 번졌다.
계측석 옆에 흐릿한 숫자가 떴다. 잔류 검로 유지 시간, 일 초 남짓. 강의실 바닥에서는 세 초를 버티던 선이 여기서는 절반도 남지 않았다.
관람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검기 한 줌 없으니 당연하지."
"저 목검으로는 벽에 흠집도 못 내겠군."
카이드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술부에서 배운 대로라면 여기서 더 빨리 베거나 더 세게 밀어야 했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방벽이 원하는 정면 충돌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는 목검 끝을 바닥에 대고 귀를 기울였다.
웅. 웅웅. 웅.
압력이 오르는 소리가 달랐다. 첫째가 숨을 내쉴 때 둘째가 조여들었고 둘째가 풀릴 때 셋째가 단단해졌다.
방벽 아래 황동선 위의 먼지가 한쪽으로 쓸렸다. 압력이 빠져나가는 아주 짧은 순간에만 먼지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카이드는 손바닥을 무릎에 문질러 피를 닦았다. 그사이 네 번의 배출음을 들었다. 먼저 들리는 낮은 소리 뒤에 두 번의 가벼운 떨림이 이어졌다. 벽 세 겹의 호흡이었다.
그는 목검 끝으로 황동선 바깥에 작은 점 세 개를 찍었다. 각 층의 압력이 풀리는 자리였다. 멀리서 보면 아무렇게나 그은 흠집이었지만 그의 발은 점 사이의 간격을 외우고 있었다.
'틀림없이 구멍이 있다.'
카이드는 공기를 손등으로 느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벽도 계속 밀어내려면 들어온 힘을 다른 곳으로 흘려야 했다. 그 흐름이 층과 층의 이음새에서 마주쳤다.
"중단해도 된다."
검술부 지도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이 부러지기 전에 물러서라."
카이드의 턱이 굳었다. 평민 장학생이라고 검을 처음 잡던 날도 같은 말을 들었다. 마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판정 뒤에는 훨씬 자주 들었다.
그러나 지금 카이드에게 필요한 것은 더 튼튼한 검이 아니었다.
마력이 부족하다고 수없이 들었다. 없는 마력을 짜내면 또 밀려날 터였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검을 멈출 수 있는 손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카이드는 목검을 다시 들었다.
관람석 한편에서 루나가 공책을 펼쳤다.
"첫째 방벽 배출 간격은 네 박자. 둘째는 세 박자예요."
그 말이 카이드에게 닿을 수는 없었다. 대강당 바닥의 황동선 안쪽에는 외부 조언을 차단하는 정숙 결계가 쳐져 있었다. 루나는 펜으로 박자를 표시하며 숨을 참았다.
카이드의 검이 낮게 움직였다.
정면을 베지 않았다. 벽 아래에서 먼지가 빨려 드는 지점을 향해 목검을 그었다. 날이 아니라 검이 지나간 빈자리를 거기에 놓았다.
첫째 벽의 배출음이 끊기는 찰나였다. 카이드는 앞서 찍어 둔 첫 점에 발끝을 걸고 허리를 낮췄다. 처음처럼 벽의 한가운데를 향했다면 선은 또 눌려 사라졌을 것이다.
딱.
목검이 멈췄다.
평소에는 세 초 남던 잔류 검로가 방벽의 압력에 밀려 얇아졌다. 카이드는 어깨에 힘을 주지 않았다. 검로가 사라지기 전에 몸을 옆으로 틀었다.
첫째 방벽 표면이 두 갈래로 흐르며 손바닥만 한 틈을 냈다.
"뚫었다!"
"아니 파손 계측은 영이야."
틈은 금세 어깨 너비로 늘었다. 카이드가 몸을 밀어 넣자 첫째 벽이 등 뒤에서 다시 붙었다. 방벽은 찢어지지 않았다. 검이 멈춘 자리에 모인 주변의 마력이 양쪽 흐름을 잠시 돌아가게 했을 뿐이었다.
카이드가 만든 공백은 길어야 세 초였다. 벽을 하나 지날 때마다 다시 휘두르고 다시 멈춰 새 길을 만들어야 했다. 첫째 벽 너머에 발을 디딘 순간 그는 이미 둘째 점을 찾고 있었다.
둘째 벽이 눈앞에서 뭉쳤다.
카이드는 오른쪽 발을 멈추고 목검을 짧게 돌렸다. 이번에는 칼끝이 아니라 손잡이 쪽에 남은 궤적으로 결합부를 눌렀다. 손바닥의 붕대가 터졌다.
따끔한 통증이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둘째 층이 몸을 밀어냈다. 한순간 중심이 뒤로 쏠렸다. 카이드는 훈련 때 수없이 그은 먹선을 떠올렸다. 검을 얼마나 멀리 휘둘렀는지가 아니라 어디에서 멈추었는지가 중요했다.
그는 발을 고정하고 목검을 멈췄다.
빈 궤적이 둘째 벽의 압력을 양옆으로 보냈다. 발끝이 넘어갔다. 어깨가 넘어갔다.
계측석에는 둘째 층의 마력선이 갈라진 흔적이 남았다. 루나의 깃펜이 공책 위를 긁었다.
"자기 마력을 붓는 게 아니야. 이미 저 안에 있는 압력이 돌아가게 만드는 거야."
하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카이드의 붕대가 다시 붉어지는 것만 보고 있었다.
셋째 벽은 보이지 않았다.
카이드는 종까지 한 걸음 남겨 두고 허공에 이마를 부딪쳤다. 앞의 두 층과 달리 먼지도 빛도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서 닫히는 둘째 벽의 압력이 등을 떠밀었다.
둘째 층에 남긴 공백의 세 초가 끝나고 있었다.
'지금 물러서면 다시 처음부터.'
카이드는 검을 일부러 놓았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손잡이를 발등으로 차올리자 목검이 낮게 회전했다. 검의 긴 그림자가 셋째 벽의 표면을 스쳤다. 보이지 않는 장벽이 그림자의 끝을 꺾었다.
그 꺾인 자리 위에서 종 옆의 작은 고리가 떨었다. 압력을 빼내는 이음새였다. 카이드는 손을 뻗어 회전하는 손잡이를 잡았다.
딱.
검이 멈춘 자리에 가느다란 공백이 생겼다. 셋째 벽의 압력이 그 고리 쪽으로 빠져나갔다.
카이드는 손목을 비틀어 공백을 고리와 나란히 놓았다. 밀려든 압력이 빈 검로를 따라 옆으로 흘렀다. 사람 하나가 지날 만큼의 틈이 열렸다.
그는 목검을 들고 한 걸음 나아갔다.
땡.
종소리가 대강당에 퍼졌다.
카이드는 종에 닿은 손을 한동안 내리지 못했다. 손등 너머에서 세 겹의 벽이 차례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베인 자국 하나 없었다.
계측판에 숫자가 떠올랐다.
[방벽 통과: 3/3.]
[장비 손상: 0.]
"말도 안 돼."
검술부 지도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기조차 없는 목검이다. 마검술 시연이라면 검에 마력을 실어야 하지 않나?"
루나가 계측판을 가리켰다.
"잔류 마력 수치를 보세요. 검이 멈춘 자리에 외부 마력이 모였다가 빠져나갔어요. 방벽 압력의 이동 경로도 남아 있고요."
바르모트 총장이 손을 들었다.
"과제는 궤적 시연이다. 검에 얼마를 담았는지보다 검이 지난 뒤 무엇이 남았는지를 평가하라고 적혀 있소."
검술부 지도교수가 계측석을 다시 보았다. 세 층의 압력선이 카이드의 발자국을 따라 휘어 있었다. 검이 닿은 자리는 비어 있고 그 양옆에 마력의 흐름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차례로 점수를 적었다. 셀레네의 펜만 움직이지 않았다. 네 장의 채점판에서 70점을 훌쩍 넘는 숫자가 먼저 공개되었다.
카이드는 종 앞에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에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목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관람석의 누군가가 카이드의 이름을 불렀다. 곧 다른 쪽에서도 이름이 들렸다. 그는 종보다 그 소리가 더 믿기지 않았다. 평민 장학생이라는 말이나 낙제생이라는 말이 붙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가 심사위원석의 에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교수님. 가르쳐 주신 대로 멈췄습니다."
에신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하루 더 짧아진 시골 오두막의 꿈을 떠올리자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카이드의 손부터 눈에 들어왔다.
"그만 숙이고 의무실이나 가라. 피 묻은 손으로 문고리 만지면 내가 청소해야 한다."
카이드는 목검을 쥔 손을 뒤로 감추며 웃었다. 하리와 루나는 그 말에서 스승의 깊은 배려를 읽었다.
에신은 허리춤의 깨끗한 손수건을 던져 주었다. 카이드가 받아 들자 에신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젠 정말 쓸데없는 일이 늘어날지도 몰랐다.
에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하나만 남았군.'
그때 셀레네가 채점판을 내려놓았다.
"마지막 시연은 마도구 제작이지요. 평가 재료는 규정대로 이 자리에서 봉인을 풀겠습니다."
조교 두 명이 쇠사슬로 묶인 재료함을 무대 가운데로 밀어 왔다.
루나의 손이 품속의 얇은 스크롤 다섯 장을 눌렀다. 셀레네는 그 손을 놓치지 않았다.
"미리 만든 것은 제출할 수 없습니다. 내일은 저 봉인 안의 재료만 쓰게 될 겁니다."
루나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품속의 스크롤을 한 장 꺼내 펼쳤다. 세 획이 손에 익도록 몇백 번을 그렸다. 종이를 못 써도 획의 순서까지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재료함의 봉인 아래에는 '표준 마력 공급량 제한'이라는 붉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루나의 손끝이 그 글자에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