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020화 [하던 것만 해라]
밤안개가 낡은 강의동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차갑게 울렸다.
탁자 위에는 방금 셀레네 바이스 교수가 내리꽂고 간 황금빛 의결서가 서늘한 빛을 뿜고 있었다.
열흘 뒤 대강당 공개 검증. 2학년 정규 기준 단독 시연. 한 명이라도 과반의 점수를 얻지 못하면 전원 즉시 퇴학 및 지도교수 영구 추방.
아카데미 전체를 통틀어도 유례를 찾기 힘든 가혹한 사형선고였다.
하지만 에신의 의자 앞에 무릎을 꿇은 하리의 눈동자에는 두려움 따위는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희 세 사람은 단 한 명의 낙제도 없이 전원 최고점으로 통과하겠습니다."
하리의 뒤편에서 카이드가 목검을 쥔 채 묵직하게 고개를 숙였고 루나 역시 두꺼운 공책을 가슴에 품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것은 스승을 지키겠다는 광기에 가까운 맹세였다.
안락의자에 늘어져 있던 에신 루드윅은 머리를 짚었다.
'최고점이라니.'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쪼개질 것 같았다.
에신이 바란 것은 아주 단순한 결말이었다. 적당히 시험을 치르다 셋 중 하나가 시원하게 낙제하고 F-Class가 해체되는 것.
그렇게 되면 무능한 명예교수로 찍혀 아카데미에서 쫓겨날 터였다. 조용한 시골 구석의 작은 오두막으로 내려가 남은 시한부 인생 동안 낮잠이나 실컷 자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다.
그런데 전원 최고점으로 통과하겠다고?
만약 낙제생 셋이 전교생과 교수진이 보는 앞에서 최고점을 받아버리면 무슨 사단이 나겠는가.
명예교수 해고는 물 건너가고 학사위원회가 억지로 종신교수 직함을 들이밀며 온갖 연구 서류와 행정 업무를 떠넘길 것이 분명했다. 1년 남은 시한부 인생이 아니라 한 달 만에 과로로 피를 토하고 관에 들어갈 판이었다.
'어떻게든 저 불타는 눈빛을 꺾어야 한다.'
에신은 마른침을 삼키며 헛기침을 했다.
"일어나라 하리. 바닥 차다."
"교수님."
하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에 맺힌 눈물이 등불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저희에게 열흘의 시간을 주십시오. 2학년 정규 기준을 넘어서기 위해 어떤 혹독한 수련도 견디겠습니다. 스승님께서 숨겨두신 고위 마법의 비급이나 새로운 공식이 있다면 무엇이든 전수해 주십시오."
"그래요 교수님! 기존의 계측석을 단숨에 부술 수 있는 고출력 마법진 설계도라도 좋습니다!"
루나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눈을 반짝였다. 카이드 역시 목검을 단단히 쥔 채 스승의 입술만을 주시했다.
새로운 비급. 고위 마법 공식. 고출력 마법진.
에신은 속으로 기겁했다.
'새로운 걸 가르치라고? 내가 미쳤냐.'
새 마법을 가르치려면 밤새 양피지에 수식을 증명해 적어야 한다. 그걸 읽고 이해시키려면 말도 길게 해야 하고 실습하다 마력이 튀어 강의실이라도 날아가면 뒤치다꺼리는 오롯이 에신의 몫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에신의 몸은 마력 역류증 4단계였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가슴 안쪽이 타들어 가는데 언제 새 교재를 만들고 비급을 전수한단 말인가.
에신은 귀찮음을 가득 담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새로운 건 없다."
세 제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예? 하지만 열흘 뒤면 2학년 정규 시험인데..."
"시험이라고 뭐 특별한 거 있냐."
에신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안락의자 깊숙이 등을 묻었다. 이불 삼아 덮고 있던 낡은 로브를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쓸데없이 새 거 배운답시고 설쳐대지 마라. 어차피 머리만 아프다."
"그렇다면 저희는 무엇을..."
"하던 것만 해."
에신의 목소리는 나른하다 못해 무성의하기 짝이 없었다.
"하리는 물장난 치던 거나 계속하고 카이드는 나무칼 멈추는 거나 해. 루나 너도 종이 쪼가리 접던 거나 계속 만지작거려. 그 이상은 손대지 마라."
에신은 정말로 이들이 새로운 짓을 벌여 강의실을 폭파하거나 자신의 낮잠을 방해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냥 며칠 대충 만지작거리다 시험 당일 깔끔하게 낙제해 주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알아들었으면 불 끄고 자라. 내일도 시끄럽게 굴면 강의실 문 밖에서 잠근다."
에신은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강의실 안에는 오직 창밖의 바람 소리만 맴돌았다.
에신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 새로운 기술도 안 가르쳐줬으니 열흘 뒤면 알아서 떨어지겠지.'
하지만 에신이 보지 못한 로브 바깥에서는 전혀 다른 기류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세 제자는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던 것만... 하라고?"
카이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거친 손가락이 목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새로운 마법도 새로운 검술도 아니다. 스승님은 지금 우리가 찾아낸 길을 부정하지 말라고 하신 거다."
하리의 숨이 턱 멎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에신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쓸데없이 새 거 배운답시고 설쳐대지 마라. 하던 것만 해.'
그것은 나태한 방임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정통파가 요구하는 2학년 기준은 거대한 마력 총량과 화려한 다중 영창이었다. 만약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의 방식을 흉내 내려 했다면 F-Class는 본래의 색깔을 잃고 자멸했을 터였다.
하리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맞아요... 셀레네 교수의 함정에 휘둘려 기존 마법의 틀로 기어들어가지 말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찾아낸 결손. 유체의 흐름. 최소 작동식."
루나가 공책을 펼치며 떨리는 손으로 깃펜을 움켜쥐었다.
"스승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거예요. 2학년 정규 마법을 흉내 내는 어설픈 덧칠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오직 우리가 가진 본질만을 극한까지 깎아내야만 그들의 단단한 벽을 뚫을 수 있다는 사실을요!"
"하던 것의 깊이."
카이드의 입가에 묵직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가 매일 반복하던 그 한 번의 멈춤 속에 이미 모든 답이 들어 있었다."
세 제자는 잠든 척 누워 있는 에신의 뒷모습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눈빛은 방금 전의 불안을 완전히 씻어내고 차가운 강철처럼 벼려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가르쳐주신 본질만을 갈고닦겠습니다."
로브 속에서 에신은 오한을 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왜 이렇게 뒤통수가 서늘하지?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F-Class의 가장 길고 혹독한 열흘이 시작되었다.
정기 평가 조기 시행 소식은 다음 날 아침 아카데미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본관 식당과 중앙 회랑은 온통 F-Class에 대한 이야기로 들끓었다.
"들었어? F-Class 놈들이 열흘 뒤에 대강당에서 단독 실기를 치른대."
"단독 실기? 정규 2학년 기준으로? 미쳤군. 그 낙제생들이 어떻게 2학년 과제를 통과해?"
"창고 화재 때 요행으로 불 좀 껐다고 눈에 뵈는 게 없어진 거지. 플래티넘 클래스 학생들도 반년은 연습해야 통과하는 과제인데."
귀족 학생들은 비웃음을 터뜨렸고 지나가던 교수들도 혀를 찼다.
마학부 지도교수 연구실에서는 셀레네 바이스가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평가 세부 계획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루드윅 교수 측에서 별다른 이의 제기는 없었습니까?"
맞은편에 선 조교가 고개를 저었다.
"예. 강의동 문을 닫아걸고 아무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완전히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포기라. 당연한 수순이지."
셀레네는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마력이 고갈된 허수아비 스승과 쫓겨나기 직전의 낙제생들이다. 요행으로 버티던 모래성은 공개 검증대 위에서 산산조각 날 것이다."
하지만 본관의 비웃음과 달리 숲 끝자락 낡은 강의동 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밀한 벼림이 이어지고 있었다.
촤아아아—
하리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푸른 마력선이 허공을 갈랐다.
그녀는 얼음 벽의 크기를 키우지 않았다. 오히려 마력선의 굵기를 머리카락 한 올 수준으로 얇게 쪼개어 나갔다.
두 겹 세 겹으로 겹쳐진 미세한 유체선들이 공기 중에서 그물처럼 얽히며 주변의 공기 흐름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마력을 억지로 뭉치지 않으니 반발력이 생기지 않았다. 밀려드는 바람의 저항을 그대로 흡수하여 반대편으로 흘려보내는 완전한 무저항의 유체막.
"흐름을 막지 않는다. 내가 길 자체가 된다."
하리는 에신이 처음 던져주었던 말을 되새기며 숨을 골랐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그녀의 손끝은 단 1밀리미터도 흔들리지 않았다.
실습대 반대편에서는 카이드의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딱.
바닥에 그어진 검은 먹선 위에서 목검이 완벽하게 멎었다.
휘두르는 속도는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빨랐지만 멈추는 순간에는 단 한 줌의 반동도 없었다.
검이 멈춘 자리에 투명한 공백의 선이 남았다. 공기가 찢기며 생긴 찰나의 결손. 카이드는 그 희미한 궤적이 허공에 머무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갔다.
1초. 2초. 3초.
마력을 검날에 억지로 두르지 않아도 검이 지나간 빈자리가 거대한 마력 회로처럼 작동하며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손바닥의 붕대가 피로 물들었지만 카이드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더 깊게. 더 비워내야 한다."
루나의 실습대 위에는 낡은 양피지 조각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녀는 최소 작동식의 연산 획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복잡한 문양도 화려한 기하학적 나선도 모두 깎아냈다. 남은 것은 오직 마력이 스스로 불씨를 틔우고 닫히도록 유도하는 단 세 개의 획뿐이었다.
치익.
종이 위에 깃펜이 닿는 순간 극소량의 마력이 반응했다.
"마력 소모량 0.04단위. 연산 속도 0.02초 단축."
루나는 충혈된 눈으로 기록을 적어 내려갔다.
화려함을 버리고 본질만을 남긴 세 사람의 기술은 시간이 지날수록 날카롭게 벼려지고 있었다.
에신은 강의실 뒤편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채 그 모습을 힐끔거렸다.
'저것들은 왜 지치지도 않냐.'
그냥 대충 하라고 했더니 밥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저러고 있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서늘한 집중력 때문에 낮잠을 자려 해도 도무지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에신은 가슴을 짚으며 조용히 신음을 삼켰다.
체내에서 요동치는 역류의 불길은 매일 밤 에신의 혈관을 갉아먹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쇠 맛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열흘만 버티자. 열흘만.'
에신은 눈을 감았다.
그렇게 훈련 7일 차가 밝아왔다.
쾅!
강의실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헤르만 보조교수가 사색이 되어 뛰어들어왔다.
"루드윅 교수님! 큰일 났습니다! 마학부 놈들이 수를 썼습니다!"
헤르만은 숨을 헐떡이며 손에 쥔 서류를 탁자 위에 내던졌다.
안락의자에서 졸고 있던 에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또 뭔데 시끄럽게 구냐."
"평가 기구가 바뀌었습니다! 셀레네 교수가 학사위원회를 움직여서 공개 검증대의 측정 장비를 전부 교체해 버렸습니다!"
하리와 카이드 루나가 일제히 헤르만에게 다가왔다.
"장비를 바꾸다니요?"
하리가 묻자 헤르만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원래 2학년 정규 평가는 표준형 마력석 판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런데 셀레네 교수가 'F-Class의 특수성을 고려한 엄격한 검증'이라며 장비를 3학년 실습용 '고중량 계측탑'과 '고밀도 압력 방벽'으로 승인받았습니다!"
"고중량 계측탑이요?!"
루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건 3서클 상급 이상의 파괴 마법이나 중장갑 마검사의 충격량을 측정하는 중장비예요! 웬만한 마력량으로는 계측탑 외벽에 흠집조차 낼 수 없어요!"
헤르만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마력 총량이 적은 F-Class의 약점을 노린 겁니다! 화려한 마력 폭발로 계측탑의 수은주를 밀어 올리지 못하면 무조건 0점 처리하겠다는 악랄한 속셈입니다!"
강의실 안이 얼어붙었다.
세 제자가 열흘 동안 갈고닦은 것은 마력의 낭비를 없앤 극소의 본질이었다.
하지만 시험 장비 자체가 거대한 마력 덩어리를 쏟아부어야만 반응하는 쇳덩어리라면 그들의 기술은 수치로 환산되지 못하고 낙제할 위기였다.
카이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결국 껍데기의 크기로만 우리를 짓누르겠다는 건가."
하리 역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뒤편에서 나른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침부터 왜들 그렇게 난리야."
에신이 귀를 후비며 몸을 일으켰다.
잠을 방해받아 몹시 언짢은 표정이었다.
"교수님! 지금 잠이 문제가 아닙니다! 3학년용 무쇠 계측탑을 부수지 못하면 퇴학당한다고요!"
헤르만이 울먹이며 외쳤다.
에신은 하품을 쩍 하고는 헤르만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 무거운 돌덩이를 왜 힘으로 부수려 해?"
"예?"
"바위가 무거우면 밑에 지렛대를 대거나 틈새에 물이나 흘려 넣으면 되지. 그걸 왜 머리로 들이받고 자빠졌냐고. 멍청하게."
에신은 정말로 그들이 귀찮아서 한 소리였다.
연구원 시절에도 무식하게 마력만 쏟아붓는 실험체들을 보며 늘 하던 잔소리였다. 무거우면 지렛대를 써서 굴려버리면 될 것을 왜 끙끙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떠들어라."
에신은 다시 등을 돌리고 누웠다.
하지만 그 무심한 투덜거림을 들은 세 제자의 눈빛이 일순간 굳어졌다.
"바위 밑에 지렛대..."
루나의 중얼거림이 강의실의 정적을 깼다.
"틈새에 물을 흘려 넣는다...!"
하리가 숨을 들이켰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루나 고중량 계측탑의 내부 구조 기억해요?"
"기억해요! 계측탑은 외부의 거대한 충격을 견디기 위해 중심축에 고압 마력 유입관이 연결되어 있어요! 그 유입관이 지탱하는 내부 압력만 해도 수백 단위에 달해요!"
루나의 손이 미친 듯이 공책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외부의 두꺼운 장갑을 힘으로 부술 필요가 없어요. 마력이 흐르는 틈새에 아주 작은 결손을 찔러 넣으면..."
"계측탑 스스로가 품고 있는 방대한 마력 압력이 결손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내부에서 균형이 무너지겠군요."
카이드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우리가 계측탑을 부수는 것이 아니다. 계측탑 자신의 거대한 무게와 압력이 스스로를 파괴하게 만드는 거다."
헤르만 보조교수는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린 채 세 학생과 누워 있는 에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렛대의 원리로 상대의 거대한 질량을 역이용한다...!'
상대의 거대한 힘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그 힘의 중심축에 작은 공백을 만들어 자멸시키는 마력 구조학의 극의.
헤르만은 전율하며 두 손을 모았다.
'루드윅 교수님은... 마학부가 계측탑으로 장난을 칠 것까지 이미 다 꿰뚫어 보고 계셨던 거야!'
세 제자의 입가에 확신에 찬 미소가 걸렸다.
"하던 것만 하라는 말씀이... 이것까지 포함된 것이었군요."
하리가 에신의 등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경외감에 에신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아니 그냥 지렛대 얘기 한 건데 왜 또 저래... 제발 그만해라.'
열흘째 되는 날 밤. 결전의 전야였다.
낡은 강의동 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책상 위에는 정갈하게 닦인 카이드의 목검과 세 획으로 완성된 루나의 얇은 스크롤 그리고 하리가 정돈해 둔 찻잔이 놓여 있었다.
세 학생의 얼굴에는 지난 열흘간의 피로가 짙게 깔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맑고 깊었다.
쓸데없는 힘은 모두 빠져나가고 오직 필요한 순간에만 폭발할 수 있는 단단한 침묵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쿨럭.
에신이 입을 틀어막으며 짧게 기침을 뱉었다.
손바닥에 묻어난 핏자국을 재빨리 소매로 닦아냈지만 하리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리가 조용히 다가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기관지에 좋은 은월초를 달인 차입니다. 목의 열감을 가라앉혀 줄 거예요."
따뜻한 김이 에신의 차가운 코끝을 간질였다.
에신은 찻잔을 받아 들었다. 온기가 손가락을 타고 스며들었다.
"내일이면 끝이네."
에신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카이드와 루나도 에신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교수님."
카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바위처럼 단단했다.
"내일 대강당에서 교수님의 가르침이 정답이었음을 증명하겠습니다. 아카데미의 그 누구도 다시는 스승님의 명예를 짓밟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증명 같은 거 안 해도 된다."
에신은 찻물을 한 모금 넘기며 건조하게 말했다.
"그냥 다치지만 마라. 떨어지면... 뭐 짐 싸면 그만이지."
에신에게 '짐 싸면 그만'이라는 말은 진심 어린 소망이었다.
시험에 떨어져서 해고되면 조용한 시골로 내려가 편히 쉴 수 있다는 해방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세 제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스승님은...'
하리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겠다는 뜻이었다. 제자들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명예교수직도 연구자로서의 삶도 기꺼이 버리고 아카데미를 떠나겠다는 숭고한 배수진.
'절대로... 절대로 교수님이 짐을 싸게 두지 않겠어.'
카이드의 주먹에 핏줄이 돋았다. 루나 역시 가슴에 품은 스크롤을 부서져라 쥐었다.
세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결의가 타올랐다.
스승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대강당을 통째로 뒤집어엎어서라도 승리하리라.
에신은 영문도 모른 채 찻잔을 내려놓으며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 또 저렇게 비장해졌지? 아무튼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아카데미도 안녕이다.'
창밖의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동쪽 지평선 너머로 붉은 새벽빛이 번져오기 시작했다.
대강당의 거대한 철문이 열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