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아카데미의 시한부 명예교수가 되었다18화

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AD
스폰서 광고

018화 [스승의 피]

제3보급 창고의 화재가 꺼진 다음 날 아침이었다.

에신은 강의실 뒤편 안락의자에서 눈을 떴다. 정확히 말하면 잠에서 깬 것이 아니라 가슴 안쪽을 긁어대는 열감 때문에 더는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입을 틀어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두 걸음째에 시야가 흔들렸다.

"큭."

에신은 창가까지 가지 못하고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뜨거운 것을 억지로 삼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손수건 위로 검붉은 피가 번졌다.

마력 역류증이 한계를 넘었다는 신호였다. 어제는 마력을 직접 쓰지 않았다. 그래도 화재 현장의 열기와 긴장만으로도 혈관 안쪽의 역류가 되살아났다.

'하필 오늘 아침에.'

에신은 손수건을 접어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학생들이 오기 전에 의무실에 들렀다가 돌아오면 된다. 피곤하다는 말을 한 번 더 하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그때 책상 아래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교수님?"

하리가 몸을 일으켰다.

어제 화재 뒤 강의실에 남아 기록을 정리하겠다며 의자에서 잠든 모양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에신의 손과 창백해진 얼굴을 차례로 훑었다.

"방금... 피를 토하신 겁니까?"

"아니."

에신은 너무 빠르게 대답했다.

"그럼 손수건에 묻은 건 뭔가요?"

"잉크다."

"검붉은 잉크를 입에서 토하셨습니까?"

하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에신은 소매를 내려 손수건을 가렸다. 변명할수록 이상해질 것 같았다.

"빈혈이 좀 있다. 별일 아니다."

"빈혈이 있으면 피를 토합니까?"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냐."

말도 안 되는 대답이었다. 에신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리는 더 묻지 못하고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제 창고를 삼키던 화염보다 더 큰 두려움이 번지고 있었다.

"어제 저희 때문에 무리하신 겁니까?"

"내가 뭘 무리해. 불 끈 건 너희잖아."

"그 길을 열라고 하신 것도 교수님이고 불씨의 원리를 알려주신 것도 교수님입니다. 저희가 해낼 수 있도록 계속..."

"잠결에 한 말을 그렇게까지 끌고 가지 마라."

에신은 낮게 잘랐다.

하지만 하리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에게 그 말은 부정이 아니라 숨김으로 들렸다.

"저희가 더 빨리 배웠다면 교수님이 저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요."

"하리."

"오늘부터는 제가 세 겹을 한 번에 유지해 보겠습니다. 교수님이 설명하실 필요가 없도록요."

하리가 돌아서기 직전 에신은 그녀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리는 그 작은 망설임까지 보았다.

"쉬세요. 이번에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실습대로 향했다.

에신은 소매 속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알아서 하지 말라고 하면 알아서 하는 애들이 아니었나?'


하리는 곧장 훈련을 시작했다.

평소라면 얼음 잎 하나를 만든 뒤 주변 수분의 흐름만 가라앉혔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실습대 앞에 세 개의 원을 그렸다.

"첫 번째 막은 정면. 두 번째 막은 좌우. 세 번째 막은 위쪽을 맡으면 됩니다."

루나가 깃펜을 내려놓았다.

"한 번에 세 가지를 관찰하면 기록이 섞여요."

"교수님은 어제 화염 전체의 흐름을 한눈에 보셨잖아요. 우리도 그 정도는 해야 해요."

카이드가 목검을 집어 들었다.

"그럼 나는 열 번을 넘기겠다. 어제처럼 기회가 왔을 때 한 번만 찌르고 끝내면 스승님이 계속 현장에 나서야 한다."

"하루 열 번이라고 정해진 횟수예요."

루나가 바로 반박했다.

"그 제한도 교수님이 무리하지 말라고 정한 것뿐이다. 내가 더 할 수 있으면 해야 해."

카이드는 바닥에 정지선을 그었다. 첫 번째 검로는 선 앞에서 멈췄지만 두 번째에는 목검이 선을 넘어갔다. 손바닥 붕대가 벌어지며 붉은 얼룩이 번졌다.

하리가 그 모습을 보고도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푸른 냉기가 세 개의 원을 동시에 채웠다. 첫 번째 보호막이 흔들리자 평소처럼 해제해야 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마력을 더 밀어 넣었다.

쨍그랑!

얼음막 하나가 안쪽부터 금이 갔다. 금은 두 번째 막으로 번졌고 실습대 위에 올려둔 루나의 종이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솟았다.

"하리, 하나만 남겨야 해요!"

"안 돼요. 이번에는 전부 유지해야 해요!"

루나는 날아가는 종이를 잡으려다 공책을 떨어뜨렸다. 땅에 펼쳐진 페이지 위로 카이드의 검로가 스쳤다.

희미한 푸른 잔상이 종이의 관찰식을 찢으며 지나갔다. 수식의 선 하나가 끊기자 실습대 중앙에 있던 마력핵이 불안하게 떨었다.

"멈춰!"

에신의 목소리가 강의실을 갈랐다.

세 학생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에신은 책상에 기대고 있었다. 얼굴은 아까보다 더 창백했고 눈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카이드, 검 내려. 하리, 막 하나만 남겨. 루나, 관찰식 전부 지우고 종이 한 장만 펼쳐."

"하지만 교수님께서 쉬셔야 하니까..."

"내가 쉬려면 너희가 말을 들어야 한다."

에신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마력핵의 떨림이 커졌다. 누군가 마력을 더 밀어 넣으면 강의실 안쪽으로 작은 폭발이 일어날 수 있었다.

카이드가 먼저 목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리는 세 개의 보호막 중 가장 바깥쪽을 해제했다. 루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들을 하나씩 걷어내고 가장 작은 관찰식만 남겼다.

마력핵이 두 번 흔들린 뒤 조용해졌다.


"왜 무리했지?"

에신은 실습대 앞 의자에 앉은 채 세 학생을 노려보았다.

"교수님이 피를 토하셨습니다."

하리가 먼저 말했다.

"그래서?"

"저희가 더 잘하면 교수님이 직접 나서실 일이 줄어듭니다."

카이드가 주먹을 쥐었다.

"제가 어제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면 교수님이 불길 앞에 서실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그랬으면 네 손바닥이 먼저 터졌겠지."

"손 하나쯤은 내놓을 수 있습니다. 교수님은 목숨을 내놓고 계시잖습니까."

강의실 안이 얼어붙었다.

에신은 소매 안쪽의 손수건을 느꼈다. 피가 아직 마르지 않은 천이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런데도 정확히 그 방향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목숨을 내놓았다는 건 누가 말했지?"

세 학생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하리가 본 것과 그들이 짐작한 것을 사실처럼 이어 붙였을 뿐이다.

에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길게 내쉰 숨 끝에서 가슴이 다시 뜨거워졌다.

"피곤해서 피가 난 것뿐이다."

"정말 빈혈입니까?"

루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그럼 의무실에서 확인하면 되겠네요."

에신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럴 필요 없다."

"왜요?"

하리의 질문은 작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에신은 대답하지 못했다. 의무실의 진단석 앞에 앉는 순간 마력 역류증의 단계가 드러날 수 있다. 그 결과가 행정 기록에 남으면 명예교수 권한도 학생들의 수업도 한꺼번에 흔들린다.

"교수님이 저희에게는 멈추라고 하시면서 정작 본인은 멈추지 않으십니다."

카이드가 낮게 말했다.

"그건..."

"저희는 교수님의 말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이 멈추는 모습도 봐야 합니다."

에신은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 뒤 그는 칠판으로 걸어갔다. 걸음은 평소보다 느렸지만 학생들 앞에서 휘청이지는 않았다.

분필이 칠판을 긁었다.

[하루 훈련 횟수는 줄어들 수 있다.]

[작동식은 하나만 남긴다.]

[멈춰야 할 때 멈춘 기록도 성과로 친다.]

에신은 마지막 줄 아래에 선을 그었다.

"이건 너희를 위한 규칙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피를 토했든 말든 상관없이 지켜."

하리는 칠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교수님을 걱정하는 것도 안 됩니까?"

"걱정은 해. 대신 네 손을 망가뜨리지는 마라."

카이드의 굳은 주먹이 천천히 펴졌다.

"제가 멈추면 교수님이 더 무리하실까 봐 두려웠습니다."

"내가 무리하는 건 내가 결정할 일이다. 네가 대신 망가지는 건 결정이 아니고 사고야."

루나는 새 종이 한 장을 꺼내 칠판의 문장을 그대로 옮겼다.

"정리하면 스승님의 상태와 저희의 훈련량은 별개의 변수라는 말씀이죠?"

"그렇게 어렵게 적지 말고 그냥 쉬어."

처음으로 에신의 목소리에 짜증보다 힘 빠진 웃음이 섞였다.

세 학생은 그제야 각자의 자리에서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 순간 강의실 문이 열렸다.

"루드윅 명예교수님. 잠시 말씀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르만 보조교수가 회색 서류철을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금이 간 얼음막과 찢어진 관찰식 그리고 바닥의 핏자국을 차례로 훑었다.

에신의 소매에서 떨어진 작은 붉은 방울이었다.

아르만은 표정을 굳혔다.

"방금 수업 중 위험 반응이 있었군요."

"학생들이 조절했습니다. 문제없습니다."

"문제가 없었다면 제가 이런 서류를 들고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르만이 서류철을 펼쳤다.

맨 위에는 아카데미 인장이 찍힌 통지서가 놓여 있었다.

[명예교수 및 담당 교육자의 마력 운용 건강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임시 의무 점검 명령.]

에신의 시선이 문장 아래로 내려갔다.

[최근 연속된 비정상 마력 반응과 교육 구역 사고 기록을 근거로 즉시 시행함.]

"이건 거절하겠습니다."

에신이 말했다.

아르만은 예상했다는 듯 서류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거절할 수 없습니다. 명예교수의 수업에서 사고가 두 차례 이상 보고되면 담당자의 건강 확인을 거쳐야 합니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한 최소 절차입니다."

하리의 얼굴이 굳었다. 카이드의 손이 다시 주먹으로 말렸다. 루나는 통지서의 글자를 한 줄씩 공책에 옮기기 시작했다.

에신은 세 학생을 보지 않았다.

의무실 진단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심장 가까이 엉킨 역류의 흔적도 숨겨둔 단계도 모두 빛으로 드러날 것이다.

아르만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의무실에 오십시오. 동행자는 한 명으로 제한합니다."

"동행자는 필요 없습니다."

"그건 교수님이 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아르만은 통지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서류가 닿는 순간 붉은 핏방울이 종이 가장자리에 번졌다.

에신은 그 흔적을 손으로 가리려다 멈췄다.

하리가 이미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에신도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숨기는 일보다 들킨 뒤에 학생들이 다칠 일이 더 귀찮고 두려웠다.

그녀는 주먹을 꼭 쥔 채 조용히 말했다.

"교수님. 이번에는 저희가 같이 가겠습니다."

에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평소라면 시끄럽다고 투덜거렸을 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크게 가슴을 두드렸다.

의무실 진단석까지 남은 시간은 반나절이었다.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

내 악보는 대마법이 된다 표지소설
연재중 18%
#아카데미#판타지#음악

내 악보는 대마법이 된다

평생 남의 이름 뒤에 숨어 곡을 쓰다 과로사한 무명 작곡가 강하진이 음악이 마법이 되는 판타지 아카데미의 마력 제로 낙제생 하진으로 빙의한다. 퇴학 직전 24시간 루프와 [신들의 작곡 시스템]을 이용해 지구의 화성학과 거장들의 선율을 대기 에테르 유도식으로 변환하며 악보 한 장으로 아카데미와 제국을 뒤흔드는 천재 작곡가의 대마법 성장기.

2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