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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시한부 명예교수가 되었다17화

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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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화 [최소한의 불씨]

검술부장 가릭이 모래판에 무릎을 꿇은 사건의 여파는 다음 날까지도 아카데미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본관 중앙 회랑과 기숙사 로비는 온통 F-Class와 카이드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고위 귀족 학생들은 검술부의 권위가 평민 낙제생 하나에게 꺾였다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수군거렸고 실습장을 지나치던 교관들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아꼈다.

하지만 소란의 진원지인 F-Class 낡은 강의동은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루나, 이번에는 실습대 주변 습도를 조금 더 낮춰 둘게요."

하리가 실습대 옆에 서서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른 얇고 투명한 냉기 고리가 실습대 주변의 수분을 부드럽게 가라앉혔다. 폭주하던 방대한 마력을 억지로 억누르는 대신 필요한 만큼만 길을 내어 흘려보내는 정밀한 유체 제어였다.

실습대 반대편에서는 카이드가 묵직한 석판 모서리를 양손으로 단단히 지탱하고 있었다.

어제 대련으로 손바닥에 감았던 흰 붕대는 여전했지만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침착해져 있었다.

"상판의 미세한 흔들림은 완전히 잡았어. 수식을 그릴 때 중심축이 밀리지 않을 거다."

"고마워요. 덕분에 잉크의 마력 증발 속도를 균일하게 맞출 수 있겠어요."

루나는 두꺼운 돋보기를 코끝에 걸친 채 거친 막종이 위에 얇은 깃펜을 조심스럽게 놀렸다.

그녀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에신이 버렸던 양피지 메모에서 추출한 결손 고리 수식이었다.

불필요하게 마력을 덧대어 덩치를 키우는 기존의 점화식과 달리 이 수식은 중심부를 의도적으로 비워두어 0.1단위의 극소 마력만으로 발화하도록 유도하는 최소 작동식이었다.

강의실 뒤편 긴 안락의자에는 에신 루드윅이 로브를 이불처럼 뒤집어쓰고 늘어져 있었다.

어제 경기장에서 들었던 끔찍한 환호성과 모래 먼지 때문에 밤새 두통에 시달린 탓에 온몸의 뼈마디가 쑤셔왔다. 마력 역류증으로 인한 가슴의 묵직한 열감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침부터 종이 사각거리는 소리까지 유난히 거슬리네.'

에신은 베개 대신 벤 두꺼운 마학 서적에 뺨을 묻은 채 낮게 웅얼거렸다.

"불을 크게 피우겠다고 마력을 쑤셔 넣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지. 어차피 산소랑 마력을 다 갉아먹으면 알아서 꺼지는 게 불인데 말이야."

그저 불장난으로 소음을 내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무심코 툭 던진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깃펜을 움직이던 루나의 손끝이 그 순간 딱 멈췄다.

"마력을... 다 갉아먹으면 꺼진다?"

루나의 커다란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맞아요. 지금까지는 불꽃을 피워 올리는 것에만 매달렸어요. 하지만 이 최소 작동식은 중심 연산 핵이 비어 있는 결손 함정 구조예요. 불씨가 켜지는 찰나 주변의 마력과 공기를 폭발적으로 삼키고 그 결손 때문에 순식간에 스스로 닫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어요."

루나는 미친 듯이 깃펜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불꽃으로 태우는 것이 아니라 불꽃을 피워 주변의 숨구멍을 닫아버리는 역점화 소화식...!"

카이드와 하리가 감탄 어린 눈으로 에신을 바라보았다.

'잠결에조차 마법의 본질과 역발상을 짚어주시는구나.'

에신은 눈을 감은 채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또 시작이네. 그냥 잠이나 좀 자자. 제발.'

그때였다.

따아아앙—! 따아아앙—!

정적을 찢는 날카로운 청동 종소리가 아카데미 서쪽 하늘을 뒤흔들었다.

이어 복도 창밖에서 다급한 고함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비상! 비상 상황이다!"

"제3보급 창고에서 특수 화재 발생! 인근 연구 구역의 모든 인원은 즉시 서쪽 공터로 대피하라!"


아카데미 서쪽 외곽에 위치한 제3보급 창고는 거대한 검은 연기 기둥에 휩싸여 있었다.

시뻘건 화염이 창고 지붕을 뚫고 솟구쳤고 매캐한 유황 냄새와 마력 타는 냄새가 사방으로 진동했다.

"물 마법 쓰지 마! 절대 물 뿌리지 마라!"

창고 관리관 그레그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비명을 질렀다.

"창고 2구역에 보관된 건 '화염 정제유'와 '홍련초 추출액'이야! 물이 닿으면 반응열 때문에 연쇄 폭발을 일으킨다고! 서쪽 연구 구역 전체가 날아간단 말이다!"

소방 마법사 대여섯 명이 창고 주변에 얼어붙은 채 발만 동동 굴렀다.

"하지만 결계 마법으로도 불길이 잡히지 않습니다! 기화된 정제유가 공기 중의 마력을 먹고 번지고 있어요!"

"이대로 3분만 지나면 메인 저장 탱크에 불이 붙는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야!"

아카데미 한 학기 분량의 귀중한 마도 시약과 마력 촉매가 저장된 핵심 시설이었다. 손실액만 수천만 골드에 달했고 유폭할 경우 인근 학생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웠다.

그때 연기를 뚫고 헤르만 보조교수와 함께 F-Class 세 학생이 달려왔다.

"관리관님! 상황이 어떻습니까?"

헤르만이 기침을 토하며 외쳤다.

"보조교수님!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수류 마법도 냉기 마법도 내부 시약 때문에 통하지 않아요! 당장 외벽 결계를 세우고 후퇴해야 합니다!"

그레그가 절망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리가 활활 타오르는 창고 입구를 응시했다. 거대한 화마가 맹렬한 기세로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포효하고 있었다.

"불길이 창고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요. 내부의 마력 흐름이 한 지점으로 쏠리고 있어요."

"메인 저장 탱크가 있는 중심 핵이에요."

루나가 공책을 펼치며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손에는 방금 완성한 낡은 점화 스크롤 석 장이 들려 있었다.

"물이 닿으면 폭발하고 일반 바람을 불어넣으면 불길이 번져요. 그렇다면 불꽃이 타오를 수 있는 여백 자체를 지워버려야 해요."

"루나, 그 스크롤로 정말 가능한 겁니까?"

헤르만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불꽃의 숨구멍을 닫으라고요. 이 최소 작동식은 0.1초 만에 화원의 마력과 산소를 한꺼번에 빨아들이며 결손을 일으켜요. 정확히 화재의 중심 핵에 투입하면 불길 전체의 숨통을 끊을 수 있어요."

하지만 창고 입구는 3서클급 화염 폭풍이 가로막고 있었다. 사람이 다가가기는커녕 스크롤을 던지기도 전에 허공에서 타버릴 열기였다.

카이드가 허리춤에서 낡은 목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길을 열겠다."

"카이드?"

"어제 배웠어. 거대한 불길일수록 지나간 자리에 반드시 결손이 생긴다. 그 빈틈을 찌르면 불길 사이로 지나갈 수 있는 궤적이 열려."

하리도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저도 도울게요. 불길 전체를 억누르지는 못하지만 화염의 양쪽 벽을 얇은 유체 고리로 벌려둘 수는 있어요."

두 사람의 눈빛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헤르만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숨을 삼켰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낙제생이라 불리며 고개를 숙이고 다니던 학생들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제가 뒤쪽에서 학생들의 탈출로를 확보하겠습니다!"


"지금이에요!"

하리의 외침과 함께 푸른빛의 유체 마력선이 창고 입구를 향해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하리는 쏟아지는 불길을 정면에서 막지 않았다. 양옆의 불꽃 줄기 밑바닥으로 얇은 냉기 수로를 파고들게 하여 화염의 진행 방향을 좌우로 비틀어버렸다.

쏴아아아—!

거대한 불길이 양 갈래로 갈라지며 가운데로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오래는 못 버텨요!"

하리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틈을 향해 카이드가 모래바닥을 박차고 쇄도했다.

열풍이 카이드의 뺨을 태울 듯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소용돌이치는 불꽃의 중심에서 화염이 회전하며 만들어내는 0.2초간의 마력 공백을 똑똑히 포착했다.

카이드가 목검을 멈춰 세웠다.

딱.

검을 휘두르지 않고 정지선 위에 멈춰 세운 칼끝에서 희미한 잔류 검로가 허공으로 뻗었다.

스으으윽!

불길의 회전력이 카이드의 잔류 검로를 타고 바깥으로 흩어지며 화원의 중심 핵까지 일직선으로 뚫린 진공의 통로가 열렸다.

"루나! 지금 던져!"

카이드의 고함이 터졌다.

루나는 주저하지 않고 손에 쥔 최소 작동식 점화 스크롤에 0.1단위의 미세한 마력을 주입했다.

파앗.

손끝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는 순간 루나는 스크롤을 카이드가 열어젖힌 진공의 통로 한가운데로 힘껏 던졌다.

종이 스크롤이 허공을 가르며 불타는 창고의 정중앙, 마도 시약 저장 탱크 바로 앞 화원에 정확히 안착했다.

치이익.

그곳에는 거창한 폭발음도 화려한 마법진도 없었다.

오직 손톱만 한 크기의 아주 작고 푸른 불씨 하나가 스크롤 위에서 퐁 하고 피어올랐을 뿐이었다.

창고 관리관 그레그가 경악하여 소리쳤다.

"저, 저게 뭐야?! 불이 붙은 곳에 불씨를 던지면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화원의 정중앙에서 피어난 작은 불씨가 주변의 마력과 산소를 미친 듯이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웅—!

중심 연산 핵이 비어 있는 최소 작동식의 결손 고리가 거대한 마력 진공을 형성했다. 창고 안을 집어삼키고 있던 수십 미터의 거대한 화마가 그 작은 불씨의 빈틈을 향해 한꺼번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릉!

불꽃이 스스로의 꼬리를 물고 중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0.5초 뒤.

모든 공기와 마력을 삼켜버린 작은 불씨가 결손 한계에 도달하며 스스로 닫혀버렸다.

툭.

마치 양초를 손가락으로 눌러 끈 것처럼 창고 전체를 뒤덮고 있던 붉은 화염이 일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쉭—

남은 것은 바닥에 흩날리는 하얀 재와 맑아진 공기뿐이었다.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창고 지붕 위로 푸른 하늘이 드러났고 메인 저장 탱크는 그을음 하나 없이 온전하게 서 있었다.

"불이... 꺼졌다고?"

그레그가 털썩 주저앉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수류 마법 수십 개로도 손을 못 대던 마도 시약 화재가... 고작 종이 쪼가리 한 장으로...?"

소방 마법사들은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헤르만 보조교수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불꽃으로 산소를 지우고 결손으로 화마를 삼킨다... 이것이 루드윅 교수님의 최소 작동식...!"

루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잿더미 위에 떨어진 스크롤의 잔해를 공책에 기록했다.

"화재 진압 완료. 마력 소모량 0.1단위. 인근 보급품 손상률 제로."

하리와 카이드가 서로를 마주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화재가 진압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르모트 총장이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F-Class 강의실로 들이닥쳤다.

"루드윅 명예교수!"

총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낡은 강의실을 뒤흔들었다.

의자에서 졸다가 깨어난 에신은 찌푸린 얼굴로 눈을 비볐다. 눈앞에 번쩍이는 비단 옷을 입은 총장과 수많은 서류를 든 행정관들이 서 있었다.

'또 뭐야. 이번엔 또 무슨 귀찮은 일인데.'

에신이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르모트 총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에신의 손을 덥석 잡으려다 에신의 차가운 시선에 흠칫하며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루드윅 교수! 자네 제자들이 제3보급 창고를 통째로 구해냈네! 수천만 골드 상당의 마도 시약과 아카데미의 서쪽 연구 구역 전체를 지켜냈단 말일세!"

"아, 예. 다행이네요."

에신이 영혼 없이 대꾸했다.

총장은 품에서 황금빛 인장이 찍힌 두꺼운 서류철을 꺼내 펼쳤다.

"이건 학술위원회와 행정부가 만장일치로 결의한 특별 지원안일세. F-Class를 본관 최고급 연구동으로 이전하고 연구 예산을 기존의 백 배로 증액하겠네! 전담 조교 다섯 명과 최고급 마도 실험 장비도 즉시 배치해 주지!"

백 배의 예산과 최고급 연구동.

아카데미의 어떤 정교수도 받아보지 못한 파격적인 특혜였다.

헤르만과 학생들이 숨을 죽였다.

하지만 에신의 미간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예산이 백 배로 늘어난다고? 그러면 매달 연구비 집행 내역서에 영수증 풀칠해서 제출해야 하잖아. 조교 다섯 명이 들어오면 출퇴근 관리해야 하고 연구동이 본관으로 가면 총장이랑 매일 마주칠 텐데?'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마력 역류증으로 오늘 내일 하는 판에 서류 더미에 파묻혀 과로사할 일 있나.

에신은 서류를 손가락 끝으로 툭 밀어내며 건조하게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뭐, 뭐라고?"

총장이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예산 같은 거 늘리지 마십시오. 연구동 이전도 안 합니다."

"아니, 왜인가?! 학생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는데 어째서 거절하는 텐가?"

에신은 하품을 쩍 하며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돈이 많아지면 쓸데없는 서류만 늘어나고 사람이 많아지면 시끄러워집니다. 지금 이 낡은 강의실이 조용해서 딱 좋습니다. 제자 놈들도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시고 그냥 가십시오. 잠 좀 자게."

에신은 정말로 귀찮아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바르모트 총장의 눈빛이 형언할 수 없는 충격과 경외감으로 물들었다.

'화려한 지원과 재물에 눈이 멀면 마학의 본질이 흐려진다... 결손과 궁핍 속에서만 참된 진리를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총장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가슴에 품었다.

"자네의 고결한 학자적 신념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군.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고 오직 제자들의 자립과 마학의 본질만을 추구하는 그 뜻... 깊이 새기겠네."

총장은 에신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조용히 강의실 문을 닫고 나갔다.

헤르만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하리와 카이드, 루나의 눈동자에는 스승을 향한 깊은 존경심이 일렁였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화려한 연구실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는 힘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거야.'

에신은 문이 닫히자마자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드디어 갔네. 이제야 조용하네."

창밖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 아래서 에신은 편안하게 숨을 내쉬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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