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015화 [빈 의자]
공개 대련 공고는 밤새 아카데미를 뒤덮었다.
본관 게시판에도 식당 입구에도 붉은 테두리의 종이가 붙었다. 가장 굵은 글씨 아래에는 검술부의 직인이 선명했다.
[F-Class 카이드 공개 검술 검증]
[검술부 전체 훈련생 참관]
날이 밝기도 전부터 학생들이 공고 앞에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평민 낙제생의 패배를 구경하겠다며 웃었고 누군가는 베른을 꺾은 잔기술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궁금해했다.
같은 시각 에신은 교수 숙소의 침대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뜨기 전부터 오늘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심장 아래에서 시작된 열기가 목을 거슬러 올라왔다. 뜨거운 철사가 혈관 안쪽을 긁으며 팔로 뻗는 것 같았다. 오른손의 감각은 이미 사라졌고 팔꿈치 아래에는 검푸른 핏줄이 가늘게 떠올라 있었다.
에신은 왼손으로 침대맡의 약병을 더듬었다. 손끝에 걸린 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달그락.
작은 소리인데도 머릿속에서는 종을 친 듯 울렸다.
그는 두 번째 약병을 간신히 잡아 마개를 이로 뽑았다. 쓴 약을 삼키는 순간 목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에신은 몸을 숙여 손수건으로 입을 막았다.
검붉은 피가 천에 번졌다.
'마력은 쓰지도 않았는데.'
전날 검증실까지 걸어간 일과 끝없이 이어진 소음만으로 몸이 반응했다. 역류증이 한 단계 더 나빠진 것인지 확인하려면 진찰이 필요했다.
진찰을 받으면 기록이 남고 기록이 남으면 총장과 교수들이 찾아온다.
그것만큼은 사양이었다.
에신은 다시 누웠다. 오전 수업 하나쯤 비워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카이드가 받은 결투장도 본인이 알아서 찢든 받아들이든 할 일이었다.
그런데 눈을 감자 회랑에 떨어져 있던 붉은 서류가 떠올랐다. 그 옆에서 카이드의 손이 목검 손잡이로 가지 않았던 것도 함께 떠올랐다.
그 애는 겨우 멈추는 법을 배웠다.
검술부 놈들 앞에 혼자 두면 다시 손목부터 망가뜨릴 가능성이 높았다.
"정말 귀찮게 하는군."
에신은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력은 끌어올리지 않았다. 오른팔의 감각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뒤 피 묻은 손수건을 접어 소매 깊숙이 밀어 넣었다.
평소라면 강의동까지 십 분이면 충분했다.
오늘은 방문을 여는 데만 그만큼 걸렸다.
수업 시작 종이 울렸지만 F-Class 강의실의 긴 의자는 비어 있었다.
하리는 닫힌 문을 세 번째 돌아보았다. 루나는 벽시계의 분침이 움직일 때마다 시각을 적었다. 카이드는 창가에 선 채 붉은 대련 신청서를 읽고 있었다.
"교수님이 예고 없이 늦으신 적은 없었어요."
하리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정확히는 수업을 시작하신 적도 별로 없어요."
루나가 기록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도 강의실에는 계셨어요. 현재 지각 시간 십칠 분입니다."
문이 열리자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온 사람은 에신이 아니라 헤르만이었다. 그는 아침부터 뛰어다닌 듯 숨을 몰아쉬며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검술부에서 최종 조건서를 보냈네. 정오까지 카이드 학생의 답이 없으면 대련을 거부한 것으로 공고하겠다는군."
카이드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대련은 다음 날 정오였다. 검술부 주 경기장에서 세 번의 교차로 승부를 정한다. 표준 보호구의 유효 타격판이 먼저 켜지는 쪽이 패배하며 외부 마법 지원은 금지된다.
칼날에 마력을 붙이지 못하는 카이드에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잔류 검로가 표식 하나를 뒤집는다 해도 유효 타격판은 켜지지 않는다.
"루드윅 교수님께 먼저 보여 드려야 하네. 내가 숙소로 사람을 보내겠네."
헤르만이 몸을 돌리려 하자 카이드가 불렀다.
"기다리겠습니다. 정오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한 시간 뒤에도 빈 의자의 주인은 오지 않았다.
강의동 밖에서는 검술부 훈련생들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그들은 공고를 구경하러 온 학생들 앞에서 카이드가 이미 도망쳤다고 떠들고 있었다.
하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혹시 교수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루나의 깃펜이 멈췄다. 에신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지만 확인된 사실은 그가 늦었다는 것뿐이었다.
카이드는 빈 의자를 바라보다가 신청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교수님이 일부러 안 오신 건지 정말 늦으신 건지는 모르겠어."
그는 깃펜을 들었다.
"하지만 이 대련을 받을지는 내가 정해야 해. 교수님이 오실 때까지 미루는 척하면서 답을 떠넘기고 싶지는 않아."
카이드는 참가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하리는 말리고 싶은 마음을 삼켰다. 그 선택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무엇을 연습할 건가요? 이번 상대는 베른보다 훨씬 빠르고 마력도 강할 거예요."
"강하게 치는 연습은 안 해. 하루 만에 검술부장을 힘으로 넘을 수는 없으니까."
카이드는 목검을 들고 앞뜰로 향했다.
"내 검을 어디서 멈출지부터 정할 거야."
루나가 공책과 막종이 두 장을 챙겼다.
"그럼 검이 지나간 뒤의 변화만 볼게요. 대련장 전체를 재는 장치는 지금 만들 수 없어요."
하리는 그 뒤를 따랐다.
"주변 마력은 제가 가라앉힐게요. 완전히 막지는 않겠습니다. 카이드의 흐름까지 지울 수 있으니까요."
헤르만은 서명을 마친 신청서와 세 학생을 번갈아 보았다.
"교수님의 허가 없이 진행해도 되겠나?"
카이드는 잠시 빈 의자 쪽을 돌아보았다.
"허락을 기다리는 훈련이 아니라 선택한 뒤 책임지는 훈련이라고 배웠습니다."
헤르만의 눈빛이 흔들렸다.
에신이 일부러 자리를 비워 세 학생에게 답 없는 시험을 내렸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F-Class 앞뜰에는 이미 붉은 견장을 찬 검술부 훈련생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강의동 벽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마력검을 휘둘렀다.
콰앙!
푸른 충격파가 흙바닥을 훑었다. 바람에 루나가 놓은 첫 번째 종이 표식이 날아갔다.
"미안하군. 여기가 공용 훈련장인 줄 몰랐어."
훈련생 하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F-Class 앞뜰은 공용 훈련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충격파가 사람을 직접 향하지 않는 이상 규정 위반을 따지기도 어려웠다.
카이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소음을 베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목검을 쥔 손바닥의 오래된 상처도 다시 욱신거렸다.
"저쪽은 제가 볼게요."
하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손바닥 위에 넓은 보호막을 세우는 대신 바닥 가까이에 얇은 얼음 고리 하나를 만들었다. 충격파를 정면에서 막지 않고 표식 바깥으로 빠져나갈 길만 열었다.
두 번째 충격이 밀려왔다.
흙먼지가 얼음 고리를 따라 양옆으로 갈라졌다. 루나는 날아간 첫 표식을 주우러 가지 않았다. 카이드의 정지선 뒤에 새 막종이 한 장만 세웠다.
"첫 표식은 외부 충격과 섞였어요. 버립니다. 이 종이는 검로가 닿을 때만 기록할게요."
카이드는 앞뜰 바닥에 나뭇조각으로 짧은 선을 그었다.
첫 번째 검은 검술부의 충격파를 뒤쫓았다. 목검이 푸른 파동이 지나간 자리를 갈랐지만 너무 늦었다. 종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상대가 지나간 뒤를 보면 따라갈 수 없어."
두 번째에는 파동보다 먼저 휘두르려 했다. 어깨가 올라가고 손목에 힘이 몰렸다.
카이드는 목검을 중간에 멈췄다.
충격파가 발밑의 선을 넘어가며 바짓단을 세게 흔들었다. 검술부 훈련생들이 비웃었지만 그는 검을 내렸다.
"두 번째는 중단. 손목이 먼저 굳었어."
루나가 관찰한 사실만 적었다.
"목검이 정지선에 닿기 전에 멈췄어요. 표식 반응은 없습니다."
세 번째 충격을 준비하는 마력검에서 푸른빛이 솟았다.
카이드는 그 빛을 보지 않았다. 바닥에 그은 선만 바라보았다.
상대의 검이 빠른지 자신의 검이 느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멈출 곳을 먼저 정하면 상대의 궤적은 언젠가 그 선을 지나간다.
마력검이 허수아비를 내리쳤다.
카이드는 한 박자 먼저 목검을 움직였다.
목검 끝이 바닥의 선 위에서 멈췄다.
콰앙!
뒤늦게 터진 충격파가 칼끝 앞을 스쳐 지나갔다. 하리의 얼음 고리가 가장 거친 바람만 바깥으로 흘렸다.
목검은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검이 멈춘 지점에서 아주 희미한 푸른 결이 앞으로 이어졌다. 충격파가 남긴 빈 흐름과 짧게 겹친 결은 카이드의 칼끝 너머를 지나 루나의 종이에 닿았다.
팔랑.
막종이가 뒤집혔다.
루나가 곧바로 시간을 적었다.
"외부 충격 뒤가 아니에요. 카이드의 정지와 충격파의 교차가 거의 동시에 일어났어요. 표식은 그 직후 한 번만 뒤집혔습니다."
카이드는 목검을 내렸다. 성공을 확인하려 한 번 더 휘두르지 않았다.
하리도 얼음 고리를 풀었다.
검술부 훈련생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들이 만든 충격파가 오히려 카이드의 연습 상대가 된 셈이었다.
헤르만의 손이 본능적으로 보고서 주머니로 향했다.
에신이 앞뜰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 종이 울리기 직전이었다.
평소보다 한층 창백한 얼굴과 느린 걸음에 하리가 먼저 달려왔다.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늦잠 잤다."
에신은 짧게 답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다시 젖은 손수건은 소매 안에 숨겨 둔 채였다.
"역시 저희끼리 답을 고르게 하신 거군요."
헤르만이 감탄하자 에신의 미간이 좁아졌다.
"내가 늦은 거다."
루나는 공책을 덮었다.
"의도였다는 해석은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교수님이 안 계신 동안 저희가 고른 결과는 같습니다."
에신은 더 반박하려다가 카이드 앞의 선과 뒤집힌 막종이를 보았다. 목검은 이미 바닥에 놓여 있었다. 셋 모두 훈련을 끝낸 얼굴이었다.
누구도 횟수를 채우겠다며 쓰러질 때까지 반복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조금 의외였다.
"그래서 몇 번 했지?"
"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에 멈췄습니다."
카이드가 대답했다.
"다시 확인하지 않았고?"
"네. 손목이 굳기 시작했습니다."
에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내. 쓰러질 때까지 준비하면 시작하기도 전에 진 거다."
카이드의 눈이 깊어졌다.
빈틈을 한 번 찾았다고 세 번 모두 검을 휘두를 필요는 없다. 멈출 수 있을 때 멈추는 것까지가 자신의 검이었다.
그때 회색 제복을 입은 행정 전달관이 앞뜰로 들어왔다.
"카이드 학생의 참가 서명이 접수되었습니다. 지도교수 입회 여부도 지금 확인하겠습니다."
전달관은 에신에게 최종 승인서를 내밀었다.
에신은 가장 위에 적힌 시간을 먼저 보았다.
[내일 정오. 검술부 주 경기장.]
그 아래에는 세 번의 교차 규정과 대련자의 이름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F-Class 카이드.]
[검술부장 가릭.]
"정말 할 거냐?"
에신이 물었다.
카이드는 붕대를 감은 손으로 목검을 들었다.
"제가 선택했습니다."
멀리 검술부 주 경기장 쪽에서 무거운 폭음이 울렸다. 잠시 뒤 푸른 섬광이 건물 너머로 솟았다가 사라졌다.
카이드는 그 빛을 보다가 자신이 그어 놓은 짧은 정지선으로 시선을 내렸다.
세 번의 교차.
그 안에서 자신의 검이 멈출 자리는 아직 한 곳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