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014화 [검증의 잣대]
테오필루스 아카데미 본관 3층에 위치한 제1마학검증실은 무거운 침묵에 짓눌려 있었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푸른빛의 정밀 계측 석판들과 천장에 매달린 증폭 수정구가 은은한 웅성거림을 토해내고 있었다. 일반 강의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엄숙하고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곳이었다.
검증대 중앙에는 셀레네 바이스 교수가 단정한 마법사 정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는 검증대 위에 놓인 낡고 구겨진 양피지 조각을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이... 최소 작동식의 원본이라는 말입니까?"
셀레네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닿아 있는 것은 번듯한 양피지 문서철이 아니었다. 구석이 찢겨 나가고 손때가 묻었으며 한 번 힘껏 찌그러뜨렸다가 대충 손바닥으로 편 자국이 선명한 종이 쪼가리였다.
루나가 공책을 품에 안은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루드윅 명예교수님께서 버리신 메모입니다."
"버렸다고요?"
셀레네의 눈썹이 잘게 꿈틀거렸다.
그녀는 참관석 구석 긴 안락의자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에신 루드윅은 낡은 교수 로브를 덮어쓰고 팔짱을 낀 채 하품을 삼키고 있었다. 마력 역류증으로 쑤셔오는 명치 부근의 미세한 통증보다 따뜻한 햇살 아래서 낮잠을 자지 못하고 끌려온 현실이 천 배는 더 성가셨다.
'그냥 손이 저려서 망친 종이를 왜 저런 번쩍거리는 방까지 들고 온 거야.'
에신은 속으로 깊은 탄식을 내쉬었다.
그는 피곤에 젖은 눈을 꿈벅이며 건조하게 웅얼거렸다.
"내가 손이 미끄러져서 잘못 적은 쓰레기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습니까. 그딴 거 검증할 시간 있으면 그냥 돌아가서 쉬게 해 주시죠."
참관석에 서 있던 헤르만 보조교수가 황급히 옷깃을 여미며 감격 어린 표정으로 셀레네를 바라보았다.
"바이스 교수님! 루드윅 교수님의 깊은 뜻을 아직 헤아리지 못하셨군요! '쓰레기'라는 표현은 기존 마학의 허례허식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낭비되는 수식을 모두 쓰레기처럼 버려야만 진정한 결손 고리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가르침이지요!"
에신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저 보조교수의 주둥이를 꿰매버릴 방법이 있다면 당장 전 재산이라도 털어 넣고 싶었다.
셀레네는 에신의 무심한 태도와 헤르만의 과장된 변호를 번갈아 보더니 다시 양피지 위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품에서 금색 테두리의 정밀 확대 렌즈를 꺼내 수식 위로 가져갔다.
렌즈를 통해 확대된 수식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표준 3서클 화염 마법의 도입부 수식으로 시작하던 깃펜 자국이 중간 마력 코어 확장 단계에서 갑작스럽게 끊겨 있었다. 마력이 안정적으로 순환해야 할 중앙 원환이 통째로 결손되어 있었고 그 빈자리 위로 깃펜이 비틀거리며 미끄러진 듯한 불규칙한 궤적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정통 마학의 기준에서 보면 명백한 실패작이자 오류투성이의 낙서였다.
하지만 셀레네의 눈동자가 서서히 확장되었다.
"중앙 연산 핵을... 일부러 비워 놓았군요."
셀레네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통상적인 스크롤은 마력을 강제로 가두기 위해 외벽 수식을 3중으로 덧대야 합니다. 하지만 이 수식은 중심을 비워둠으로써 외부 마력이 스스로 결손부로 빨려 들어가게 설계되어 있어요. 마력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흐름의 빈틈을 이용해 스스로 점화되도록 만든 함정..."
셀레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평생 연구해 온 아카데미 정통 마학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마력을 더 완벽하게 통제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종이 조각은 정반대의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통제를 포기하고 결손을 허용함으로써 최소한의 마력으로 스스로 작동하게 만드는 극한의 효율성.
'손이 미끄러져 적은 쓰레기라고? 천만에. 이것은 기존 마학 체계의 모순을 비웃기 위해 거대한 공식을 단 한 줄로 축약해 버린 천재의 오만이다.'
셀레네의 등줄기로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렌즈를 거두며 루나를 응시했다.
"루나 학생. 이 수식의 결손 고리를 이해하고 일회용 점화 스크롤을 완성한 것이 맞습니까?"
"네. 교수님의 가르침대로 불필요한 마력 증폭식을 모두 지우고 이 한 줄의 빈틈만을 막종이에 옮겼습니다."
루나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셀레네는 마른 침을 삼켰다. F-Class의 괴짜라 불리며 이론만 파고들던 낙제생이 전 아르카나 헤븐 수석 연구원의 메모 한 장으로 마법 공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젖힌 셈이었다.
"수식의 구조적 정합성은 확인했습니다. 기록관, 원본 수식의 결손 기반 작동 원리를 1차 확인 항목으로 등재하십시오."
헤르만이 신이 나서 깃펜을 바쁘게 움직였다.
셀레네는 다시 F-Class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번에는 하리 폰 로젠에게로 향했다.
"다음은 하리 폰 로젠 학생의 유체 보호막 분기 제어 검증입니다."
검증실 안의 공기가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검증대 앞에 선 하리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실기 검증을 위해 설치된 장치는 거대한 '마력 압력 분사구'였다. 고밀도의 압축 마력을 일정한 파동으로 뿜어내어 방어 마법의 지속력과 강도를 수치화하는 표준 측정기였다.
"하리 학생. 어제 복도에서 이벨 학생의 폭주 화염을 정면에서 막지 않고 분기시켜 제압했다고 들었습니다."
셀레네가 계측 장치의 손잡이를 쥐며 말했다.
"로젠가의 마력은 방대하지만 제어가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받아왔지요. 어제의 제압이 단순한 우연인지 재현 가능한 기술인지 이곳에서 직접 증명하십시오."
하리는 손바닥을 펼쳤다.
손끝에서 푸른 마력이 피어올랐다.
위이잉.
검증 장치가 작동하며 전방 3미터 지점에서 묵직한 마력 탄환 형태의 파동이 발사되었다.
하리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로젠가의 혈통에 새겨진 방대한 마력이 손바닥 앞으로 쏟아져 나오며 둥근 빛의 장막을 형성했다.
쾅!
마력 파동이 보호막에 부딪히는 순간 하리의 어깨가 뒤로 밀렸다.
장막의 중심은 튼튼했지만 가장자리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측정석의 붉은 바늘이 위험 수치를 향해 치솟았다.
'버텨야 해... 완벽하게 막아내야 해.'
하리의 뇌리에 어제의 기억과 사람들의 시선이 스쳤다.
'사람을 지킨 학생'이라는 칭찬. 다시는 낙제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조급함이 하리의 손목을 굳게 만들었다. 그녀는 요동치는 보호막을 붙잡기 위해 체내 마력을 한꺼번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마력이 과부하를 일으키며 손끝이 하얗게 질려갔다.
보호막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번져나갔다. 방어막이 깨지면 압축 파동이 검증실 바닥으로 튕겨 나가 파편을 흩뿌릴 터였다.
그때 참관석에서 나직하고 귀찮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흔들리면 쥐고 있지 말고 놔라."
에신의 목소리였다.
그는 여전히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채 눈조차 제대로 뜨지 않고 있었다.
"깨질 때까지 붙들고 있으니까 손목이 나가는 거다. 그딴 거 쥐고 있어 봤자 손만 저려."
그 한마디가 하리의 귓가를 때렸다.
하리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완벽하게 버텨내는 것이 정답이 아니었다. 흔들리는 첫 번째 막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은 과거의 미련일 뿐이었다.
하리는 주저 없이 손가락을 접었다.
파앙!
첫 번째 보호막이 스스로의 의지로 허공에서 가볍게 해제되었다.
압축 파동이 빈 공간을 향해 쏟아져 내리려는 찰나 하리의 손목이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첫 막에서 빠져나온 마력 줄기 두 가닥이 바닥과 천장 방향으로 비스듬히 갈라지며 얇은 두 번째 흐름 고리를 만들어냈다.
스으으.
정면으로 쏟아지던 마력 파동이 하리의 몸을 건드리지 않고 두 가닥의 흐름을 따라 좌우로 매끄럽게 비껴나갔다.
측정석 뒤편의 완충 벽에 닿은 마력 파동은 아무런 폭발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흩어져 사라졌다.
검증실 안이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계측 석판 위에 표시된 마력 손실률은 0에 수렴했고 하리의 손끝에는 작은 서리 한 점만이 맑게 맺혀 있었다.
셀레네는 계측 석판의 수치를 멍하니 응시했다.
"방어막을... 스스로 깨뜨려서 충격을 흘려보냈어?"
셀레네의 목소리에 경악이 묻어났다.
기존 아카데미의 모든 방어 마법은 '얼마나 단단하게 버티는가'를 평가했다. 하지만 하리가 보여준 것은 버티는 방어가 아니라 마력의 길목을 열어 충격 자체를 무력화하는 '유체 제어'였다.
하리는 거친 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어제 복도에서 이벨의 불꽃을 넘겼을 때의 감각이 비로소 손바닥 안에서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자리 잡는 느낌이었다.
하리는 참관석의 에신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놓아야만 새로운 흐름이 보인다는 가르침을 잊지 않겠습니다."
에신은 머리를 긁적이며 속으로 욕을 삼켰다.
'아니... 그냥 깨질 것 같으면 손 떼고 피하라는 소리였는데 뭘 또 감사까지 하고 난리야...'
셀레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기록 양피지에 서명을 마쳤다.
"하리 폰 로젠 학생의 유체 보호막 분기 제어 역시 정식 성공으로 판정합니다. F-Class의 두 기술은 모두 우연이 아닌 독자적 마학 체계에 기반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검증실의 문이 열리며 정식 검증의 종료를 알렸다.
검증실을 빠져나와 본관 중앙 회랑으로 들어선 F-Class 일행의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루나는 검증 확인서가 첨부된 공책을 품에 꼭 안고 있었고 하리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교수님 덕분에 공식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리가 에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에신은 하품을 길게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인정이고 뭐고 됐으니까 이제 강의동 가서 문이나 잠가라. 오늘치 귀찮음은 이미 한도를 넘었다."
그때 중앙 회랑 맞은편에서 거칠고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 F-Class의 낙제생 놈들."
굵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회랑의 대리석 기둥을 울렸다.
카이드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회랑 끝에서 대검을 등에 멘 건장한 체격의 남학생 대여섯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남자는 검술부의 정예를 상징하는 붉은 견장을 차고 있었다. 검술부장 가릭이었다.
그의 뒤에는 며칠 전 카이드에게 1회 교차 대련에서 패배했던 정식 훈련생 베른도 잔뜩 독이 오른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가릭이 카이드의 코앞까지 다가와 멈춰 섰다. 험악한 흉터가 그어진 그의 얼굴에 노골적인 조소가 떠올랐다.
"마학과 샌님들이 똥종이 몇 장 가지고 놀아났다고 기고만장해진 모양이군."
가릭이 품에서 붉은 봉인이 찍힌 두꺼운 서류 한 장을 꺼내 카이드의 가슴팍을 툭 쳤다.
"카이드. 네놈이 베른을 상대로 잔기술을 써서 이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검에 마력도 싣지 못하는 반쪽짜리 평민 놈이 궤적의 착시 따위로 정식 검술부를 모욕해?"
카이드는 표정을 굳힌 채 가릭을 응시했다.
예전의 카이드였다면 모욕적인 언사에 주먹을 쥐고 당장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카이드는 달랐다. 그의 호흡은 차분했고 손끝은 목검 손잡이 위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착시가 아닙니다. 제가 멈출 수 있는 검의 길을 베었을 뿐입니다."
"입만 살았군."
가릭이 이를 드러내며 비웃었다.
"네놈의 그 사기술이 진짜 검술인지 아니면 비겁한 속임수인지 전교생 앞에서 밝혀주마. 검술부 전체 훈련생이 참관하는 정식 공개 대련 신청서다."
가릭이 결투장을 카이드의 발밑으로 내던졌다.
"도망칠 생각은 마라. 거절하는 순간 네놈은 영원히 비겁한 낙제생으로 낙인찍혀 아카데미에서 쫓겨날 테니까."
회랑을 지나가던 수십 명의 학생이 걸음을 멈추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리와 루나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카이드는 발밑에 떨어진 결투장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에신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마학부가 끝나니까 이번엔 검술부냐...'
밀려드는 두통과 피로에 에신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조용히 쉬고 싶다는 그의 소박한 꿈은 오늘도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