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위험생물 사육사

4화: 비어 있는 약품장과 쓴 약초
약초마도학 제2실험실의 청동 문을 열자마자 건조된 약초와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쳐왔다.
길게 늘어선 대리석 실험대 위에는 유리 증류관과 가열 마법석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흰 가운을 걸친 실습생들 사이에서 붉은 갈색 곱슬머리를 높게 묶은 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리아는 핀셋으로 말린 풀잎을 집어 올리며 옆자리 동기에게 무언가를 빠르게 설명하는 중이었다.
“리아.”
한결이 부르자 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한결의 흙 묻은 작업복과 품에 안긴 배낭을 본 리아의 녹색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한결? 제7사육장에 갔다며. 무슨 일이야? 꼴이 왜 그래?”
한결은 배낭에서 천으로 묶은 유리병 두 개와 관리 일지를 꺼내 실험대 한구석에 내려놓았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3번 사육실의 뿔토끼예요.”
리아가 눈을 깜빡이며 병을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유리 안쪽에 든 거무튀튀한 가루와 끈적한 배설물 덩어리를 확인한 순간 리아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잠깐, 설마 이거…… 마수 배설물이랑 썩은 사료야? 실험대에 이걸 그냥 올려두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가장 작은 개체가 사료 찌꺼기를 먹고 장이 멎어 가고 있어요. 체온이 떨어졌고 배는 돌처럼 굳었습니다. 무리 싸움은 분산 급이로 겨우 멈췄지만 소화관이 막힌 건 물과 풀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리아는 손수건으로 코를 살짝 가리며 툴툴거렸으나 손은 이미 핀셋과 시약 스푼을 집어 들고 있었다. 리아는 사료 병마개를 조심스럽게 열어 냄새를 맡았다.
“……단순히 묵은 냄새가 아니네. 습기 때문에 안쪽에서 이상 발효가 일어났어. 산패된 기름 냄새에 곰팡이 포자까지 섞였잖아. 이런 걸 초식 마수가 먹으면 장내 유익균이 전부 죽고 가스가 차서 장벽이 마비돼.”
리아는 시약 스푼으로 부스러기를 헤집다가 멈칫했다.
“이 씁쓸한 냄새는 뭐지? 풀이 썩어서 나는 냄새와는 결이 다른데.”
“금속성 냄새 말씀이십니까?”
“응. 꼭 마력 안정제나 각성제 찌꺼기가 산화됐을 때 나는 냄새랑 비슷한데…… 지금은 곰팡이가 너무 심해서 성분을 분리하기 어렵겠어. 그보다 일지 좀 줘 봐.”
리아가 한결이 내민 관리 일지를 낚아채듯 넘겼다. 대충 훑어보려던 리아의 눈빛이 점차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일지에는 네 마리의 분당 호흡수와 귀의 각도, 배설물의 점도와 색상, 사료통 접근 시의 공격 궤적, 철망 보수틀로 나눈 네 구역의 급이 반응이 시간대별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너 이거 혼자 다 적은 거야? 배수로 뚫고 환기창 연 다음에 영역 분리까지 했다고?”
“원인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리아가 헛숨을 들이켜며 일지를 덮었다.
“약초마도학 본과생들도 배설물 점도랑 호흡수를 이렇게 엮어서 기록하진 않아. 좋아, 잔소리는 나중에 하고. 뿔토끼는 장이 멈추면 스물네 시간도 못 버텨. 바로 약재 청구 전표 쓸게.”
리아가 서랍에서 양식지를 꺼내 펜을 들었다.
“시설명 제7사육장, 요청 품목 장관 운동 촉진제랑 전해질 보충액…… 어라?”
실험대 옆의 행정 마도 단말에 펜촉을 대던 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말기 표면에 붉은색 경고 마법진이 떠올랐다.
[인가 코드 오류: 관리 번호 7구역은 지원 정지 시설입니다. 공식 소모품 청구가 제한됩니다.]
“보급 코드가 잠겨 있잖아?”
리아가 황당하다는 듯 펜을 굴렸다.
“예산 삭감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청구 코드 자체를 말소했다고? 그럼 너희 사육장은 붕대나 소독약 하나도 공식으로 못 받는다는 소리야?”
“관리실 응급 약품장도 비어 있었습니다. 지급 불가 도장만 찍혀 있었고요.”
한결이 담담하게 답하자 리아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지독하네, 진짜. 학생들이 들어갈 실습장인데 기본 상비약 코드까지 닫아버리다니.”
리아는 망설임 없이 자기 개인 연구대 아래의 가죽 가방을 열었다.
“내 개인 실습용으로 배정된 약재야. 장 정체에는 몸을 덥히는 온열포랑 탈수를 막을 전해질 용액이 먼저 들어가야 해. 그다음에 은달맞이꽃 뿌리 농축액으로 굳은 장벽을 자극해야 하고. 가자, 한결. 네가 적은 기록이 맞다면 지금도 늦었을지 몰라.”
두 사람이 제7사육장 철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복도에는 눅눅한 흙냄새 사이로 은버들의 풋내가 옅게 감돌고 있었다.
3번 사육실 안쪽에서는 얼룩무늬 개체와 회색 개체가 각자의 칸에서 은버들 가지를 사각사각 갉아먹는 소리가 들렸다. 칸막이 덕분에 서로 뿔을 겨누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안쪽 회복 칸에 누운 검은 귀끝 개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한결이 무릎을 꿇고 철망 사이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귓바퀴와 뒷발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배는 아까보다 더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숨을 쉴 때마다 파르르 떨렸다.
“온도가 너무 떨어졌어.”
리아가 약재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작게 혀를 찼다.
“초식 마수는 체온이 내려가면 소화관 신경이 완전히 굳어버려. 억지로 물을 부으면 기도로 넘어가서 폐가 망가질 거야. 보온부터 해야 해.”
리아는 발열 마법석이 내장된 온열포를 꺼내 손바닥으로 가볍게 비볐다. 천에서 훈훈한 온기가 피어오르자 검은 귀끝 개체가 낯선 기척에 놀라 귀를 곤두세웠다. 녀석이 앞발을 버둥거리며 짧은 은빛 뿔을 들어 올리려 했다.
“가만히 계세요. 다치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한결이 몸을 최대한 낮추고 목소리를 깔았다. 녀석의 턱밑 냄새샘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가슴팍 앞쪽의 마른 털을 일정한 박자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한결은 숨을 고르며 공명 청진의 감각을 좁혔다.
귓가를 찌르는 둔탁한 마핵 박동이 느껴졌다. 빠르게 뛰지만 힘이 없었다. 차갑게 식은 근육 속에서 장의 박동은 완전히 끊겨 있었다. 한결이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체온을 나누듯 가만히 누르자 뿔토끼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지금이야. 리아.”
리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온열포로 뿔토끼의 배와 등 전체를 감쌌다. 따뜻한 기운이 퍼지자 녀석의 긴장된 뒷다리가 서서히 풀렸다.
리아는 유리 스포이트를 꺼내 맑은 미황색 전해질 약초액을 빨아올렸다.
“단맛이 나는 감초 뿌리를 섞었으니까 거부감이 덜할 거야. 하지만 한 번에 넣으면 안 돼. 혀 안쪽 옆면으로 세 방울씩만.”
한결이 검은 귀끝 개체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리아가 스포이트 끝을 입술 틈새로 살며시 밀어 넣고 약초액 세 방울을 떨어뜨렸다.
씁쓸하고 달콤한 향이 번졌다. 뿔토끼는 입안에 닿은 액체에 놀라 고개를 털려 했지만 한결이 턱 아래를 부드럽게 마사지하자 꿀꺽 소리를 내며 삼켰다.
한 번. 두 번. 세 번.
스포이트 반 분량의 전해액이 천천히 목구멍을 넘어갔다. 바짝 말라 있던 콧등에 미세한 수분이 돌기 시작했다.
“1차 수분 보충은 됐어. 이제 진짜 약을 써야 해.”
리아는 작은 갈색 유리병에서 짙은 녹색을 띠는 끈적한 액체를 덜어냈다.
“은달맞이꽃 뿌리 농축액이야. 마수용 소화 촉진제 중에서는 가장 순하지만 장벽에 엉겨 붙은 찌꺼기를 밀어내는 힘이 강해. 대신 마력이 돌면서 복통이 한 번 세게 올 거야.”
리아가 약을 조제하는 동안 한결은 복도 끝으로 걸어가 열려 있던 응급 약품장을 다시 살폈다.
나무 선반은 텅 비어 있었고 바닥에 뒹굴던 지급 불가 청구서 모서리는 곰팡이에 삭아 있었다. 뒤따라온 리아가 약품장 안쪽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료, 소독약, 상처 치료 연고, 외곽 결계석 보충분…… 전부 삭감 대상이었네.”
“언제부터 이랬던 겁니까?”
“장부 날짜를 보니까 반년 전, 아카데미 이사회에서 마수 관리 예산을 개편했을 때부터야. 도리안 마르켄 이사가 주도한 개편안이지. 기사단 연계 훈련 시설이랑 군용 몬스터 사육장으로 예산을 몰아주고 이런 오래된 보전 사육장은 유지비를 전부 잘라버렸어.”
리아가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말이 예산 삭감이지 사실상 굶겨 죽이라는 뜻이야. 갇혀 있는 마수들이 알아서 쇠약해져 죽거나 사고를 치면 ‘위험하고 쓸모없는 폐품 우리’라는 명분으로 사육장을 영구 폐쇄하고 남은 땅을 개발할 수 있으니까.”
한결의 주먹이 단단하게 쥐어졌다.
“사람이 가두어 놓고 먹이를 끊는 건 사육이 아닙니다.”
“알아. 하지만 제국과 아카데미의 행정은 효율로만 굴러가. 나라고 사정이 편한 줄 알아? 나도 상회에서 장학금을 받는 대신 연구 성과를 계속 증명해야 해. 이번 학기에 실적을 못 내면 다음 학기 지원이 끊기고 동생 치료비도 막혀.”
리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처럼 아무 대가도 없이 버려진 마수를 살리겠다고 매달리는 건 솔직히 계산 안 나오는 짓이야. 그래도…… 죽어가는 걸 보고도 그냥 돌아서는 건 내 체질이 아니라서 말이지.”
리아가 은달맞이꽃 농축액이 담긴 투약기를 들고 일어섰다.
“가자. 녀석이 버텨줘야 우리 고생도 헛수고가 안 돼.”
두 사람은 다시 3번 사육실로 돌아왔다. 리아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농축액을 뿔토끼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진하고 쓴 약초 향이 퍼지자 검은 귀끝 개체는 귀를 뒤로 젖히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투약이 끝난 뒤 무거운 침묵이 사육실을 채웠다.
한결은 회복 칸 옆에 웅크려 앉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리아도 무릎을 모으고 앉아 회중시계의 초침을 바라보았다.
약효가 퍼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기도가 막히지 않는지 체온이 다시 떨어지지 않는지 장이 파열되지 않고 약을 받아들이는지 지켜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삼십 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꾸르륵.
검은 귀끝 개체의 배 속에서 묵직한 마찰음이 울렸다.
녀석이 갑자기 옆구리를 비틀며 얕은 비명을 질렀다. 뒷다리가 바닥을 긁고 온열포가 벗겨졌다.
“약효가 돌기 시작했어!”
리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한결은 즉시 손을 뻗어 뿔토끼의 상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고통으로 발버둥 치는 녀석의 뿔이 한결의 팔뚝을 스쳤지만 한결은 물러서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곧 편해질 겁니다.”
공명 청진의 감각 속에서 굳어 있던 마핵 주변의 흐름이 거칠게 요동쳤다. 멈춰 있던 장벽이 수축하며 묵은 가스와 찌꺼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푸슈슉, 하는 탁한 소리와 함께 썩은 냄새를 머금은 지독한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이어 밤톨만 한 딱딱한 암흑색 변 덩어리 세 개가 짚 더미 위로 툭툭 떨어졌다.
“나왔다!”
리아가 환호성을 질렀다.
변이 빠져나오자마자 팽팽하게 부풀어 있던 뿔토끼의 복부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가쁘게 몰아쉬던 숨소리가 점차 규칙적인 리듬을 되찾았다. 녀석의 귀끝에 다시 따뜻한 피가 돌기 시작했다.
검은 귀끝 개체는 지친 듯 한결의 손바닥에 턱을 괴고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녀석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스스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바로 앞에 놓여 있던 깨끗한 물그릇으로 다가가 혀를 내밀어 물을 핥기 시작했다. 물을 몇 모금 마신 뒤에는 한결이 놓아둔 은버들 가지의 껍질을 조심스럽게 갉아먹었다.
“……살았네.”
리아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 운동이 완전히 돌아왔어. 당분간 거친 사료는 절대 주지 말고 연한 은버들 껍질이랑 물만 줘. 내가 내일 소화 보조 약초를 더 가져다줄 테니까.”
“고맙습니다, 리아. 당신 덕분입니다.”
한결이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이자 리아는 쑥스러운 듯 뺨을 긁적였다.
“됐어. 네가 배설물이랑 이상 징후를 정확하게 기록해 둔 덕분이지. 기록이 없었으면 나도 무슨 약을 써야 할지 몰랐을 거야.”
리아는 관리 일지를 펼쳐 오늘 투여한 약재의 이름과 용량, 배설 시간과 상태를 깔끔한 필체로 덧붙여 적었다.
그때였다.
철컥, 철컥.
사육장 바깥 복도에서 규칙적이고 묵직한 쇠붙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흙먼지를 털어내는 절도 있는 발걸음 소리였다.
제7사육장의 낡은 철문이 거칠게 밀려 열리더니 은발을 단정하게 정돈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단 제복에 결계검을 찬 카이 렌하르트였다.
카이의 손에는 붉은색 기사단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양피지 공문이 들려 있었다. 카이의 푸른 눈동자가 깨끗하게 정리된 3번 사육실과 바닥에 흩어진 약초 찌꺼기 그리고 한결과 리아를 차갑게 훑었다.
“약초마도학 수석이 왜 이런 위험 구역에 와 있는지 모르겠군.”
카이가 공문을 들어 올리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결 로엔. 기사단 연계 방어 실습 공문이다. 다음 주부터 제7사육장 개체들을 대상으로 위험생물 처분 및 제압 모의 훈련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