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위험생물 사육사

3화: 뿔토끼가 서로를 찌른 이유
맑은 물이 양동이 가장자리에서 찰랑거렸다.
한결은 황동 밸브를 잠그고 3번 사육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새 물그릇은 철창 아래 급이구를 통해 밀어 넣었다. 안쪽에 고여 있던 녹물과는 냄새부터 달랐다.
뿔토끼 네 마리의 코가 동시에 움직였다.
두 마리는 곧장 물그릇으로 다가왔다. 얼룩무늬가 있는 큰 개체는 그 뒤에서 바닥 냄새를 맡았다.
검은 귀끝을 가진 가장 작은 개체만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은 낡은 사료통 앞에 배를 붙이고 웅크려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왼쪽 옆구리가 잘게 떨렸다. 사료를 먹지도 않고 앞니로 통 가장자리만 갉으면서 다른 개체들을 노려보았다.
얼룩무늬가 한 걸음 다가섰다.
타닥.
작은 발이 바닥을 쳤다. 검은 귀끝이 고개를 숙이자 은빛 뿔 끝에 마력이 얇게 맺혔다.
한결은 갈고리를 뻗어 물그릇을 반대쪽으로 당겼다. 얼룩무늬가 물 냄새를 따라 방향을 바꾸면서 둘의 뿔이 부딪히는 일은 피했다.
“먹지도 않으면서 지키고 계시네요.”
굶주린 개체가 먹이를 지키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뿔토끼는 무리를 지어 같은 풀밭을 뜯는 종이었다. 배를 곯았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뿔을 겨눈다면 네 마리 모두 이만큼 가까이 붙어 쉬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결은 사육실 바닥부터 훑었다.
마른 짚 사이에는 작고 둥근 변보다 형태가 무너진 검은 덩어리가 많았다. 한쪽에는 끈적한 점액까지 묻어 있었다. 벽을 갉은 나무 조각은 수북했지만 압착 사료는 통 절반 가까이 남아 있었다.
먹을 것이 있는데 나무를 씹었다.
한결은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열 걸음 안에서 네 개의 마핵 박동이 서로 다른 높이로 감각을 두드렸다. 물을 마시는 두 마리는 빠르지만 고른 리듬이었다. 얼룩무늬의 박동은 사료통에 가까워질 때만 높아졌다.
검은 귀끝의 리듬은 달랐다.
두 번 빠르게 뛰고 한 번 길게 처졌다. 숨을 들이쉴 때보다 삼킬 때 옆구리 근육이 더 심하게 굳었다. 배 속을 직접 볼 수는 없어도 통증이 움직임을 끊는 시점은 보였다.
한결은 눈을 떴다. 귀 뒤가 팽팽하게 당겼다.
그는 갈고리 끝으로 사료 몇 알을 끌어냈다. 겉은 누런 풀빛이었으나 손가락으로 누르자 힘없이 갈라졌다. 안쪽에서 회녹색 가루가 피어났다.
시큼한 냄새 아래로 씁쓸한 금속성 잔향이 스쳤다.
실기장의 가시여우 사료에서 맡았던 것과 닮은 냄새였다.
한결은 사료를 천 조각 위에 올렸다.
“이걸 더 드리면 안 되겠는데.”
3번 사육실 맞은편의 사료 창고는 문부터 물을 먹어 부풀어 있었다.
한결이 어깨로 밀자 경첩에서 붉은 녹가루가 떨어졌다. 안에는 허리 높이까지 쌓인 자루 여덟 개와 빈 약품 상자가 있었다.
위쪽 자루는 마른 것처럼 보였다. 한결은 봉합선을 조금 풀어 압착 사료 하나를 꺼냈다. 손톱으로 쪼개자 똑같은 쉰내가 났다.
아래쪽 자루는 더 심했다. 벽의 갈라진 틈으로 흘러든 빗물이 바닥에 고여 자루 밑단을 검게 적셨다. 천 사이로 나온 사료는 서로 붙어 벽돌처럼 굳어 있었다. 흰 곰팡이 실이 안쪽까지 번졌다.
‘마른 부분만 골라내는 것도 안 돼.’
한결은 관리 일지를 펼쳤다.
정식 사료 입고 기록은 반년 전에 끝나 있었다. 이후 장부에는 담당자 이름 없이 ‘잔량 한 삽’이라고 휘갈긴 표시만 듬성듬성 이어졌다. 남은 자루를 퍼다 넣는 일만 간신히 계속된 셈이었다.
한결은 빈 유리병 두 개를 약품 상자에서 찾았다. 하나에는 사료통의 부스러기를 넣고 다른 하나에는 바닥에서 채취한 무른 변을 넣었다. 병목에 천을 묶고 관리 일지 귀퉁이에 채취 시각과 위치를 적었다.
썩었다는 사실은 냄새와 곰팡이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금속성 잔향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르는 성분까지 멋대로 독이라고 적으면 기록이 아니라 짐작이 된다.
문제는 당장 먹일 것이었다.
한결은 사육장 밖으로 나가 배수로를 따라 걸었다. 축축한 둑에는 은버들이 새순을 내밀고 있었다. 돌 틈에는 잎이 두껍고 가장자리가 둥근 돌잎풀이 자랐다.
변경의 뿔토끼들은 봄이면 은버들 껍질을 먼저 벗겨 먹었다. 돌잎풀은 수분이 많아 탈수된 개체에게 도움이 됐지만 갑자기 많이 먹이면 무른 변을 더 악화시킬 수 있었다.
한결은 벌레 먹은 잎과 마력 반점이 있는 잎을 빼고 소량만 채집했다. 지하 청정수로 세 번 씻은 뒤 마른 천으로 물기를 눌러 뺐다.
그가 철망 보수틀과 빈 물통까지 챙겨 복도로 돌아왔을 때였다.
깡!
금속을 때리는 소리가 3번 사육실에서 터졌다.
얼룩무늬가 사료통 아래를 앞발로 파헤치고 있었다.
통 밑에 끼어 있던 마른 부스러기 몇 알이 바닥으로 굴러나왔다. 검은 귀끝은 몸을 일으키자마자 얼룩무늬에게 돌진했다.
두 걸음째에 뒷다리가 휘청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놀란 두 마리가 반대편으로 뛰었다. 그중 회색 개체가 방향을 틀지 못하고 벽에 몰렸다. 얼룩무늬가 몸을 피하면서 검은 귀끝의 뿔이 회색 개체 쪽으로 향했다.
사육실 문을 열 시간은 없었다.
한결은 넓은 철제 급이판을 아래 작업 홈으로 밀어 넣었다. 판 끝이 두 개체 사이의 바닥을 긁으며 들어갔다.
끼이익!
뿔이 급이판에 부딪혔다. 은빛 마력이 얇은 불꽃처럼 튀었다.
회색 개체가 몸을 낮춰 판 뒤로 숨었다.
“그쪽은 막혔습니다. 돌아가세요.”
한결은 목소리를 낮게 유지했다. 말의 뜻을 알아듣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높은 소리를 내 또 다른 자극을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검은 귀끝은 판을 들이받지 않았다. 녀석은 고개를 흔들고 다시 사료통으로 몸을 돌렸다.
한결은 갈고리로 통의 손잡이를 낚아챘다.
통이 끌려오자 네 마리의 시선이 한꺼번에 따라붙었다. 마핵 박동도 동시에 빨라졌다.
‘역시 이 통이다.’
한결은 통을 급이구 밖으로 완전히 빼냈다. 밑바닥에는 눅눅한 사료가 죽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검은 귀끝의 턱 아래에도 같은 찌꺼기가 굳어 있었다.
뿔토끼는 턱밑의 냄새샘을 돌과 나무에 문질러 무리의 냄새를 맞췄다. 네 마리의 냄새샘 위에는 시큼한 사료죽이 제각각 엉겨 있었다. 서로의 냄새를 낯설게 느껴 경계가 더 심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다만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원인은 따로 있었다.
복통 때문에 먹지 못한 네 마리 앞에 남은 먹이 장소는 하나뿐이었다. 사료통에 다가갈 때마다 다툼이 시작됐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었다.
한결은 벽에 남은 칸막이 레일을 확인했다. 방금 밀어 넣은 급이판을 세워 첫 벽으로 삼았다. 철망 보수틀 두 개를 나머지 레일에 끼우고 빈 물통으로 세 벽의 밑동을 받쳤다. 완전히 막힌 벽은 아니었다. 서로 냄새를 맡고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뿔을 세운 채 곧장 달려들 수는 없는 네 구역이 만들어졌다.
그는 각 구역에 같은 길이의 은버들 가지를 한 개씩 놓았다. 돌잎풀은 두 장씩만 곁들였다.
얼룩무늬가 먼저 가지 냄새를 맡았다. 앞니가 어린 껍질을 긁어내는 사각거림이 들렸다. 회색 개체도 판 뒤에서 코를 내밀었다.
검은 귀끝은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은 사료통이 있던 빈 자리만 빙글빙글 돌았다. 한결은 바닥에 남은 찌꺼기까지 긴 솔로 쓸어냈다. 시큼한 냄새가 옅어지자 검은 귀끝의 귀가 은버들 쪽으로 기울었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녀석은 가장 가까운 회복 구역 안으로 들어가 가지 끝을 물었다.
다른 세 마리는 달려들지 않았다.
싸움이 멎은 사육실에는 가지 껍질을 갉는 소리가 작게 이어졌다.
한결은 급이구 밖에서 네 마리의 먹은 양을 표시했다. 얼룩무늬와 회색 개체는 은버들 껍질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 벗겼다. 나머지 한 마리도 돌잎풀 반 장을 먹었다.
검은 귀끝은 달랐다.
녀석은 가지를 한 번 문 뒤 놓았다. 돌진할 때 휘청였던 뒷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턱을 바닥에 붙인 몸은 배만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한결이 다시 공명 청진을 열자 가느다란 이명이 먼저 밀려왔다. 그는 이를 악물고 감각의 범위를 검은 귀끝 하나로 좁혔다.
불규칙한 마핵 박동 아래에서 장이 움직일 때 생겨야 할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체온도 다른 개체보다 낮았다.
환경을 바꿔 싸움은 막았다.
이미 시작된 장 정체까지 물과 풀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한결은 복도 끝의 응급 약품장을 열었다. 문 안쪽 선반에는 먼지가 쌓인 붕대 하나와 마개 없는 약병만 굴러다녔다. 바닥에 떨어진 보급 청구서에는 붉은 글씨가 찍혀 있었다.
[예산 미배정. 지급 불가.]
한결은 사육실과 출입문 사이의 거리를 재듯 돌아보았다.
여기에 남아 박동을 지켜본다고 약이 생기지는 않는다. 약초 실험동까지 달리는 시간은 아까웠지만 도움을 미루는 시간은 더 위험했다.
“……리아.”
기초 약재를 나눠 줄 수 있다고 했다.
한결은 철망 보수틀의 간격을 다시 확인했다. 검은 귀끝이 있는 칸에는 다른 개체들의 냄새와 소리가 닿았다. 완전히 혼자 가두지 않으면서 충돌만 막을 수 있었다.
그는 관리 일지에 적었다.
‘오염된 공동 사료 섭취 뒤 무른 변과 복부 팽만. 단일 급이 지점 접근 시 상호 공격. 사료 제거 및 네 곳 분산 급이 뒤 공격 중단. 턱샘 냄새 교란 가능성은 추가 관찰 필요. 검은 귀끝 개체는 섭식 중단과 장 정체 의심. 즉시 약물 검토 필요.’
사료의 금속성 냄새 옆에는 ‘성분 미확인’이라고 썼다.
한결은 유리병 두 개와 일지를 배낭에 넣었다. 새 물그릇을 회복 칸 가까이 당겨 놓고 철문 열쇠를 쥐었다.
“잠깐만 버텨 주세요.”
검은 귀끝의 귀가 힘없이 한 번 떨렸다.
“치료할 사람을 데려오겠습니다.”
한결은 사육장 문을 잠갔다. 약초 실험동까지 가장 빠른 길은 본관 뒤 언덕을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배낭 속 유리병이 달릴 때마다 서로 부딪쳤다.
그 소리보다 사육실 바닥에서 뿔이 쓰러지듯 닿던 작은 마찰음이 더 오래 귓속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