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악보는 대마법이 된다

18화: 붉은 인장의 행방
학생회관 3층 서무계 보관실의 철제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마르쿠스가 굳은 얼굴로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하진과 엘레나, 제라드 교수와 루카스가 그 뒤를 따랐다. 앙상블 단원들은 복도 입구에 이동 공명 수레를 세워 두고 경계를 유지했다.
보관실 안쪽 벽면에 매립된 묵직한 강철 보관함의 빗장이 풀려 있었다. 경첩이나 자물쇠 어디에도 강제로 부순 흔적은 없었다.
"자물쇠 마법식이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마르쿠스가 떨리는 손으로 빈 보관함 내부를 더듬었다.
"이 함은 서무계장의 체내 마력 파형과 전용 열쇠가 동시에 맞물려야 열립니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 강제로 열었다면 경보석이 울렸어야 합니다."
"부순 게 아니야."
하진이 보관함 손잡이 근처로 다가가 손끝을 댔다.
귓가에 희미한 쇳소리가 스쳤다. 일반적인 마력 탐지로는 잡히지 않는 미세한 잔향이었다.
"자물쇠 내부의 공명 핀을 흔들어서 풀었어요. 0.38퍼센트 역위상 진동입니다."
제라드 교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흑요석 피리와 같은 주파수인가?"
"네. 구관 환기탑에서 들렸던 지연음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잠금 마법식의 틈새로 역위상 파동을 밀어 넣어 마력 회로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킨 뒤 핀을 떨어뜨렸습니다."
마르쿠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것은 학생회 내부 규정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는 자의 솜씨였다.
그때 복도 쪽에서 가쁜 숨소리와 함께 하얀 가운을 입은 치유학부 조사관이 뛰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은박으로 봉인된 감정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제라드 교수님! 흑요석 피리 취구에 묻어 있던 혈흔의 감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제라드가 보고서를 받아 빠르게 훑었다.
"신원은 특정되었나?"
"당장 특정 학생의 명단까지는 대조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상급 현악을 다루는 연주자의 굳은살 성분과 함께 고농도의 송진이 검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체내 공명관이 파열되어 심각한 내출혈을 겪은 상태입니다. 오늘 오전 제2의무실에서 외상 치료용 장뇌 연고를 몰래 챙겨 달아난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구관에서 우리 역탐침에 맞은 자다."
루카스가 주먹을 쥐었다.
"그 다친 몸으로 여기까지 기어 들어와서 인장을 훔쳐 갔다는 거야?"
"아닙니다."
하진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구실 봉쇄와 인장 도난의 시간이 맞물립니다. 우리가 구관에서 증거를 들고 제라드 교수님께 가던 바로 그 시간이었어요. 놈들은 마르쿠스 님이 우리 연구실을 봉쇄하러 간 틈을 노렸습니다."
마르쿠스가 헛숨을 들이켰다.
자신이 학칙을 내세워 하진을 압박하러 움직인 것 자체가 적이 파 놓은 시간벌기용 미끼였던 셈이었다.
"로엔 님!"
보관실 구석의 서류함을 뒤지던 당직 서기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접수 대장에 방금 날인된 반출 승인서 사본이 끼워져 있습니다!"
마르쿠스가 양피지를 낚아채듯 펼쳤다.
양피지 하단에는 서무계 공식 인장의 선명한 붉은 문양이 찍혀 있었다. 위조품 특유의 지연 파형이 아니라 방금 찍혀 나온 진짜 인장의 단단한 결계흔이었다.
"어디로 갔지?"
제라드가 낮게 물었다.
마르쿠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대음악당 지하 중심 공명고입니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본선 무대용 제1중심 공명석 교체 및 정밀 조율 명목으로 반출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서무계 공식 인장이 날인되어 있어서 현장 경비병은 의심 없이 문을 열어 주었을 겁니다."
"중심 공명석이라고?"
엘레나의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아카데미 음악제 본선 무대의 모든 소리를 증폭하고 분산시키는 심장부야. 거기에 손을 대면 본선에 서는 모든 오케스트라의 마법식이 무대 위에서 뒤틀려."
"단순히 우리 연습을 방해하려는 게 아니었어."
루카스가 이를 악물었다.
"음악제 본선 무대 전체를 불협화음의 제물로 삼으려는 거잖아!"
우우우웅-!
그 순간 학생회관 외벽에 설치된 비상 경보 종이 길게 울리기 시작했다. 서무계 인장 도난과 무단 반출 발생으로 아카데미 전 구역의 통로 차단 규정이 발동된 것이었다.
창밖을 내다본 엘레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중앙 회랑의 철제 격벽이 내려오고 있어. 일반 경비대가 공명고까지 가려면 학사위원회 비상 열쇠를 수령하고 격벽 세 개를 차례로 해제해야 해. 최소 20분은 걸려."
"그 사이면 공명석을 바꿔치기하고 지하 통로로 빠져나가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하진이 창밖의 고가 회랑을 가리켰다.
"작곡동 상층과 대음악당을 잇는 공중 석조 회랑이 있습니다."
"그곳은 폭이 좁고 비상 진동 감쇠 결계가 걸려 있어."
엘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수레를 밀고 달릴 수도 없고 악기들의 공명이 결계에 닿는 순간 흡수되어 버려."
"흡수되지 않게 뚫으면 됩니다."
하진이 오르간 모듈의 벨트를 조였다.
"3악장의 행진 리듬은 단순히 발을 맞추는 박자가 아닙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충격을 전방으로 집중시키는 쐐기형 돌파 결계로 바꿀 수 있습니다."
엘레나가 하진의 눈을 응시했다. 망설임 없는 그의 눈빛에 그녀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갔다.
"좋아. 멈추지 않는다면 격벽보다 우리가 빠르겠지."
마르쿠스가 허리춤의 지휘검을 뽑아 들었다.
"나도 간다. 내 이름과 서무계의 권한이 더럽혀졌다. 내 손으로 확인하겠다."
상층 공중 회랑은 차가운 돌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회랑 양옆의 석조 난간 아래로는 봉쇄된 아카데미 전경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였고 앞쪽 아치문에는 푸르스름한 진동 감쇠 결계막이 짙은 안개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대형을 유지해라!"
엘레나가 은빛 지휘봉을 공중에 치켜들었다.
수레 위에서 나디아의 첼로가 묵직한 C음 지속저음을 그었다. 수레 바퀴 축을 감싼 루카스의 완충판이 회랑 바닥의 진동을 빨아들이며 매끄럽게 굴러갔다.
쿵-따다 쿵-따다!
페르의 작은북이 경쾌하면서도 강렬한 셋잇단음표 행진 리듬을 쪼갰다.
단원들의 발걸음이 돌바닥을 박차며 속도를 높였다. 이반의 바이올린과 클로에의 플루트가 회랑 벽면을 타고 상승하는 질주 선율을 엮어냈다.
양옆으로 은빛 에테르 장벽이 날개처럼 펼쳐졌다.
"전방 감쇠 결계 진입 삼십 초 전!"
루카스가 수레를 밀며 외쳤다.
푸른 감쇠막이 다가오자 단원들의 악기 소리가 먹먹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소리가 공기 중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벽면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오스카! 에릭! 전방으로 화음을 모아요."
하진이 오르간 건반의 저음 건반 세 개를 강하게 눌렀다.
"마디의 끝마다 포르테로 쐐기를 박습니다. 부수는 게 아니라 결계의 위상을 비틀어 찢는 겁니다."
"맡겨라!"
에릭이 트롬본의 슬라이드를 힘차게 뻗었다. 오스카의 호른이 그 뒤를 받치며 두터운 금관의 완전5도 화음을 토해냈다.
뿌우우웅-!
금빛 파동이 은빛 행진 결계의 최전방으로 응집되며 거대한 원뿔 모양의 음향 쐐기를 형성했다.
페르의 북채가 셋째 박의 강박을 내리쳤다.
콰아앙!
은빛 음향 쐐기가 푸른 감쇠 결계막의 정중앙을 꿰뚫었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맑은 파열음과 함께 감쇠막에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앙상블은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찢어진 결계 틈새를 질주했다.
[공간 분산형 이동 결계: 고속 돌파 모드 가동]
[3악장 행진부 전방 에테르 집속률: 94.8%]
[진동 감쇠 결계 1차 관통 성공]
시스템의 은빛 알림창이 하진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대음악당의 거대한 청동 지붕이 회랑 끝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음악당 지하 중심 공명고의 육중한 방음문은 빗장이 풀린 채 반쯤 열려 있었다.
문 입구 바닥에는 서무계 공식 인장이 찍힌 반출 승인서가 나뒹굴고 있었고 당직 경비병 두 명은 벽에 기댄 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늦지 않았어!"
루카스가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넓은 원형 공명고 중앙에는 음악제 본선 무대의 중심축 역할을 하는 거대한 수정 제단이 서 있었다. 제단 위에는 아카데미의 보물인 순은빛 '제1중심 공명석'이 거치대에서 분리되어 바닥으로 내려와 있었다.
제단 앞에는 짙은 회색 망토를 둘러쓴 인영이 서 있었다.
그의 양손은 피가 밴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고 한 손에는 검붉은 불협의 기운을 뿜어내는 '역위상 오염석'이 들려 있었다.
"거기까지다!"
마르쿠스가 검을 겨누며 외쳤다.
망토를 쓴 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후드 아래로 창백하게 질린 입술과 피가 굳어붙은 턱선이 드러났다.
"하진…… 기어코 여기까지 쫓아왔군."
쉬어터진 목소리였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품 안에서 흑요석 파편 세 개를 바닥에 던졌다.
치이익!
파편들이 바닥에 닿는 순간 공명고 사방의 음향 반사벽이 비명을 지르듯 기괴한 불협화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미리 설치되어 있던 국소 음향 왜곡 진식이 기폭된 것이었다.
"모두 여기서 귀가 터져 죽어라!"
침입자가 오염석을 제단에 밀어 넣으려 했다.
왜곡 진식에서 터져 나온 검은 음파가 공명고 천장의 석재들을 뒤흔들며 낙석을 유도했다. 벽면 전체가 3도와 7도의 불협 파동으로 요동쳤다.
"귀를 막지 마요!"
하진이 외쳤다.
"3악장 종결부! 완전1도 총주로 왜곡의 중심점을 내리찍습니다!"
엘레나의 지휘봉이 수직으로 번쩍 떨어졌다.
나디아의 첼로가 바닥 전체를 감싸는 은빛 방어막을 펼쳤고 페르가 벼락같은 팀파니 연타를 터뜨렸다.
쿵! 쾅! 쾅!
하진의 오르간이 웅장한 장조 화음을 쏟아붓자 에릭의 트롬본과 오스카의 호른이 검은 진식의 중심핵을 향해 일직선으로 포르티시모 충격파를 발사했다.
콰지지직- 쾅!
불협의 검은 파동이 완전한 장조의 총주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 바닥의 흑요석 파편들이 은빛 충격파를 이기지 못하고 하얀 가루로 분쇄되었다.
"크아악!"
침입자는 자신의 파동이 역류하자 피를 토하며 제단 뒤로 나뒹굴었다. 그의 손에서 검붉은 오염석과 함께 도난당했던 강철 인장 원형이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잡아라!"
마르쿠스가 검을 들고 쇄도했다.
하지만 침입자는 품에서 최루 연막탄을 터뜨리며 제단 뒤쪽의 지하 배수구 덮개를 열고 몸을 던졌다.
쾅!
배수구 철문이 닫히며 빗장이 안쪽에서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쿠스가 연기를 가르며 달려갔지만 이미 도주로는 차단된 뒤였다.
"제길……!"
마르쿠스가 분통을 터뜨리며 바닥을 내리쳤다.
연기가 걷히자 하진은 바닥에 떨어진 묵직한 강철 인장 원형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 표면에는 학생회 서무계의 정식 문장이 온전히 새겨져 있었다.
루카스가 제단 위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은빛 중심 공명석은 무사해! 조금만 늦었어도 저 시커먼 돌로 바뀔 뻔했어."
엘레나가 침입자가 쓰러졌던 자리에 떨어진 검붉은 오염석과 찢어진 양피지 조각을 주워 올렸다.
양피지에는 대음악당 본선 무대의 음향 배관 약도가 그려져 있었고 제1공명고 외에도 두 곳의 보조 공명관에 붉은 엑스 표식이 그어져 있었다.
"이건…… 본선 무대 전체를 노린 공작도야."
엘레나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뒤늦게 제라드 교수와 학사위원회 경비대가 숨을 헐떡이며 공명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제라드는 하진의 손에 들린 인장 원형과 무사한 중심 공명석 그리고 바닥의 흔적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마르쿠스가 천천히 다가와 하진과 엘레나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어리석었다. 내 오만과 부주의가 아카데미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갈 뻔했다. 너희가 아니었다면 본선 무대는 피바다가 되었을 거다."
제라드 교수가 안경을 벗어 닦으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학생회 서무계 인장 원형을 공식 회수한다. 그리고 이 시간부로 대음악당 본선 무대의 모든 음향 배관 점검과 무대 방어 권한을 하진과 엘레나의 앙상블에 전권 위임한다."
하진은 천장 너머의 대음악당 본선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도난당한 권한은 되찾았다.
하지만 불협화음이 파 놓은 함정은 이제 본선 무대 전체에 걸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짜 승부는 바로 그 무대 위에서 펼쳐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