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천재 식물학자

19화: 북문 외곽의 은빛 바퀴
제국 포션 제조소 앞 광장의 공기는 여전히 팽팽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스가 무릎을 짚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거친 숨결 사이로 마른 풀 냄새와 눅눅한 지하실 냄새가 뒤섞여 풍겼다. 품 안에서 꺼내 든 작은 오동나무 상자는 모서리가 깨져 있었고 틈새마다 붉은 인주 가루가 묻어 있었다.
"서랍 밑바닥을 뜯어냈더니 이게 나왔습니다."
한스가 상자 뚜껑을 젖혔다. 안쪽의 낡은 벨벳 천 위에는 손바닥만 한 놋쇠 인장이 놓여 있었다. 인장 표면에는 신목의 도관을 본뜬 정교한 세 갈래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펠릭스가 품에서 제조소 입고 전표를 꺼내 인장 면에 가져다 대었다. 우측 여백에 찍혀 있던 희미한 압흔과 놋쇠 인장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머리카락 한 올의 오차도 없이 겹쳐졌다.
"자료실 장부의 빈 줄을 누르고 전표를 위조한 진짜 인장이야."
펠릭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로완은 인장을 맨손으로 만지지 않고 상자 안쪽 모서리를 핀셋으로 살짝 긁었다. 벨벳 틈새에서 미세한 은빛 알갱이와 함께 반으로 접힌 기름종이 조각이 딸려 나왔다.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치자 검붉은 먹물로 휘갈겨 쓴 글귀가 드러났다.
'북문 숲길 3번 갱도 집결. 잔여 상자 전량 수거 후 북쪽 하역소로.'
글씨 끝머리의 굵은 닻 표식은 조금 전 3번 선반 상자 바닥에서 확인했던 상단 식별인과 일치했다.
그때 계단 아래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온실 감독관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상자를 보더니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내 서랍 밑에 저런 흉물이 들어 있었단 말이오?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오! 길버트 그놈이 내 방 청소를 도맡아 하더니 열쇠를 빼돌려 복제 인장을 숨겨 둔 게 분명하오!"
감독관의 두 뺨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감독관님의 개입 여부는 학장실의 조사가 밝혀낼 겁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자가 결계 밖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물증을 회수하는 일입니다."
로완이 차분하게 기름종이를 봉인병에 넣으며 말했다.
펠릭스가 허리춤의 신호용 호각을 불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광장 너머로 울려 퍼지자 대기하고 있던 시엘버그 가문의 무장 호위병 네 명과 학장 직속 경비 마도사들이 계단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북문 검문소를 폐쇄하고 도주자를 추격한다. 전원 출발!"
펠릭스의 일갈과 함께 일행은 아카데미 북쪽 외곽 성벽을 향해 내달렸다.
아카데미 북문은 고대 결계석을 둘러싼 거대한 화강암 아치로 축조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약초 상인들의 짐수레와 생도들의 마차가 드나들던 문이었지만 지금은 육중한 철제 격자살이 반쯤 내려와 있었다.
초소를 지키던 경비병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왔다.
"십오 분 전에 통과했습니다! 감독관실 직인이 찍힌 폐자재 반출증을 제시하며 단봉 덮개 마차를 몰고 나갔습니다. 신목 결계 정화 작업에서 나온 부패 잔류물이라 악취가 심하니 열어보지 말라며 서둘러 북문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경비병의 손에는 검은 기름때가 묻은 위조 반출증이 들려 있었다.
북문 아치 밖으로는 비가 갠 직후의 진흙탕 길이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성문 바로 앞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완만한 자갈이 깔린 서북쪽 평지 도로는 수도로 통하는 정식 통행로였고 바위와 잡목이 얽힌 동북쪽 비탈길은 과거 폐탄광과 신목의 외곽 관수로가 지나던 험한 숲길이었다.
경비병 하나가 서북쪽 대로를 가리켰다.
"수도로 향하는 큰길로 도망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거운 마차를 모는 자라면 험한 숲길로 들어갈 리 없습니다."
펠릭스의 호위병들이 말을 대로 쪽으로 돌리려 했다.
"잠깐 멈추십시오."
로완이 갈림길 한가운데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바닥의 진흙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 올렸다.
밤새 내린 비로 젖은 땅 위에는 여러 대의 수레바퀴 자국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대부분은 아침 일찍 지나간 아카데미 조달 수레의 얕은 바퀴 홈이었다.
하지만 동북쪽 숲길로 꺾여 들어간 바퀴 자국은 달랐다. 바퀴가 진흙을 깊게 파고들며 남긴 홈 가장자리마다 검고 보슬보슬한 흙더미가 떨어져 나와 있었다.
로완은 그 검은 흙 한 줌을 집어 코끝에 가져갔다. 손가락 끝으로 흙 알갱이를 가볍게 뭉개자 부드러운 스펀지 같은 탄력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숲길의 진흙이 아닙니다. 연구실 관수실에서 사용하는 표준 배합토입니다."
"배합토라고요?"
한스가 곁으로 다가왔다.
"습윤 피트모스와 참숯 가루 그리고 석영 모래를 섞어 만든 고통기성 배지입니다. 바퀴 살 안쪽에 엉겨 붙어 있다가 비탈을 오르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내린 겁니다."
로완은 손바닥 위의 흙을 가볍게 털어냈다.
실비아가 수정 감측판을 동북쪽 비탈길로 향했다. 흐릿한 안개 속으로 푸른 마나 침출수의 파동과 쏘는 듯한 은빛 광채가 가느다란 띠를 그리며 이어지고 있었다.
"마나 파동이 잡힙니다. 신목의 침출수에 오염된 흙과 은분의 잔류 흔적이에요. 동북쪽 숲길로 간 것이 확실합니다."
"상단의 하역소와 연결된 옛 도관로를 택했군. 추격한다!"
펠릭스가 말머리를 돌렸다. 일행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빽빽한 참나무 숲 사이로 이어진 비탈길을 질주했다.
동북쪽 숲길은 갈수록 험해졌다. 양옆으로 우거진 물푸레나무와 떡갈나무 잎사귀에서 차가운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자욱한 아침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았고 튀어나온 바위와 굵은 나무뿌리가 말들의 발을 번번이 묶었다.
완만한 경사를 지나 바위 지대에 접어들자 흙바닥이 사라지며 바퀴 자국마저 뚝 끊겼다.
호위병들이 고삐를 당기며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바위투성이라 바퀴가 닿은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펠릭스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여기서 길을 잃으면 갱도 안으로 숨어들거나 접선 마차에 올라타 버린다. 안개 때문에 소리도 먹히고 있어."
로완은 바위 표면을 찾는 대신 길 가장자리의 경사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위틈 사이로 무성하게 자라난 야생 쐐기풀과 쥐손이풀 덤불이 보였다. 그중 한 구역의 풀잎들이 짓밟혀 줄기가 부러지고 흙바닥으로 짓이겨져 있었다. 무거운 마차 바퀴와 말발굽이 길을 벗어나 풀밭을 스치며 지나간 흔적이었다.
로완은 꺾인 쐐기풀 줄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끝으로 부러진 단면을 살짝 눌렀다.
투명한 식물 수액이 단면 위로 솟아올랐다. 줄기 안쪽의 액포에서 터져 나온 수액은 갓 흘러나온 듯 맑았고 가장자리 표면에서만 아주 엷은 갈색 산화막이 맺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식물의 세포벽이 찢기면 액포 속의 페놀 화합물과 세포질의 폴리페놀 옥시다아제가 공기 중의 산소를 만나 갈변합니다. 수액 전체가 짙은 갈색으로 산화되려면 적어도 십 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쐐기풀은 겉 테두리만 이제 막 얇은 갈색 띠를 형성했습니다."
로완이 일어서며 앞쪽 언덕을 가리켰다.
"풀이 밟힌 지 채 삼 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차가 바로 앞 능선에 있습니다."
"전원 돌격!"
펠릭스의 호령과 함께 기병들이 박차를 가했다.
언덕배기를 돌아 오르막의 정점에 도달한 순간 안개 너머에서 거친 마찰음이 들려왔다.
채찍질 소리와 함께 말이 헐떡이는 소리가 축축한 숲의 침묵을 찢었다.
"이 빌어먹을 짐승아! 당장 당겨!"
모퉁이를 돌아서자 진흙 구덩이에 뒷바퀴가 깊숙이 처박힌 단봉 덮개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짐칸이 지나치게 무거운 탓에 말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젖은 진흙 속에서 헛바퀴만 요란하게 돌고 있었다.
마차 곁에는 검은 가죽 외투를 입은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쇠지렛대로 바퀴를 밀어 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마부석에는 푸른 조수복을 입은 청년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길버트!"
한스의 고함이 숲을 뒤흔들었다.
마부석의 청년이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쫓아온 기병들의 번뜩이는 검날을 보자마자 채찍을 내던지고 숲비탈 쪽으로 몸을 던졌다.
"아카데미 경비대다!"
외투를 입은 사내들이 쇠지렛대를 내던지고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품 안에서 상단 제3하역소의 은빛 닻 문양이 번쩍였다.
"놈들이 따라붙었다. 짐칸을 태워라! 흔적을 남기면 안 된다!"
사내 하나가 마차 뒤편으로 달려가 기름통을 엎질렀다. 짙은 석유 냄새가 진흙탕 위로 진동했다. 다른 사내의 손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화염 룬 석판이 들려 있었다. 석판의 룬 문자가 번쩍이며 불꽃이 튀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기름 젖은 마차 천막으로 불길이 옮겨붙으려는 찰나였다.
"막아야 합니다!"
펠릭스가 말을 몰며 검을 뻗었지만 거리가 멀었다. 화염이 번지면 내부의 모든 서류와 증거물이 잿더미로 변할 상황이었다.
그 순간 로완이 길가로 성큼 나섰다.
그는 화구를 겨냥하지 않았다. 대신 마차 바퀴 주변의 축축한 흙벽과 그곳을 뒤덮고 있던 거대한 야생 칡덩굴과 가시나무 군락으로 시선을 돌렸다.
로완은 바닥의 젖은 부엽토에 손을 얹고 대지 룬을 약하게 공명시켰다.
그의 마나는 식물을 억지로 자라게 하는 폭력이 아니었다. 흙 속에 포화된 지하수와 미네랄 이온을 덩굴 밑동의 뿌리로 순간적으로 유도해 물관의 삼투압 밸브를 활짝 열어젖히는 정밀한 자극이었다.
파아앗.
토양의 수분을 빨아들인 칡덩굴의 세포벽 내부 팽압(Turgor Pressure)이 한계까지 팽창했다. 줄기 조직이 용수철처럼 탄성을 머금더니 단단하고 질긴 줄기들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푸드득!
굵은 덩굴 줄기 서너 가닥이 마차 짐칸을 거물처럼 휘감아 덮쳤다. 차가운 식물 수액이 흠뻑 젖은 천막 위로 쏟아지며 기름에 붙으려던 불꽃의 산소를 단숨에 차단했다.
동시에 뻗어 나간 가시나무 줄기 하나가 화염 룬을 쥐고 있던 사내의 손목을 강하게 후려쳤다.
"크악!"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룬 석판을 진흙탕에 떨어뜨렸다.
실비아가 그 위로 수정 감측판을 내리꽂았다. 맑은 푸른빛의 안식 결계가 순식간에 펼쳐지며 바닥에 번지던 잔류 불씨를 완전히 질식시켰다.
"끝났다."
펠릭스의 말이 숲길을 가로질렀다.
챙!
펠릭스의 칼등이 다른 사내의 쇄골을 정확히 내리쳤다. 사내는 칼을 떨어뜨리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달아나려던 첫 번째 사내 역시 시엘버그 가문 호위병들의 창끝에 가슴이 가로막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비탈을 기어오르며 도망치던 길버트는 축축한 낙엽에 발이 미끄러졌다.
"놓칠까 보냐!"
한스가 몸을 던져 길버트의 다리를 낚아챘다. 두 사람이 진흙탕 속을 구르다 한스가 길버트의 두 팔을 등 뒤로 꺾어 완벽하게 제압했다.
"이 배은망덕한 자식! 연구실 사람들이 밤을 새워 일할 때 네놈은 뒤에서 독을 풀고 도망쳐?"
한스의 고함에 길버트가 얼굴을 진흙에 파묻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살려 주십시오!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로완은 덩굴이 감싸 안은 마차 짐칸으로 다가갔다. 펠릭스가 칼끝으로 불에 그을린 천막을 찢어냈다.
안쪽에는 잡동사니 폐자재 포대 사이에 가려진 목재 상자 세 개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상자 뚜껑을 열자 포션 제조소 3번 선반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오염 청월 열매들이 은빛 광택을 내뿜으며 쏟아져 나왔다.
그 옆에는 짚더미에 싸인 네 개의 두꺼운 차광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열자 코를 찌르는 금속성의 은분 냄새가 숲속의 안개를 밀어냈다.
"은분 원액입니다."
실비아가 숨을 삼켰다.
"이 정도 양이면 온실 전체의 배수로는 물론이고 신목의 뿌리 구역까지 다시 마비시킬 수 있는 독성이에요."
펠릭스가 길버트의 멱살을 잡아채 일으켜 세웠다. 그의 가슴팍을 거칠게 뒤지자 안주머니에서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두툼한 양피지 한 뭉치가 떨어져 나왔다.
양피지를 펼쳐 든 펠릭스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타올랐다.
"이것 보게, 로완."
문서 상단에는 수도 약초 상단 제3하역소장의 서명과 함께 제국 연금술 길드 수도 총괄 이사의 공식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카데미 독자 포션 생산 시도 분쇄 및 공인 연구실 오염 실행 명령서.'
내용은 명백했다. 포션 제조소에 오염 열매를 긴급 투입해 대형 중독 사고를 일으키고 그 혼란을 틈타 연구실 온실 C구획에도 남은 은분을 투척해 연구실의 문을 영구히 닫게 하라는 지시였다. 성공 시 관리 보조 길버트에게 상단 수도 지부의 정식 조제사 직책과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정까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길버트가 무릎을 꿇은 채 울먹였다.
"상단에서…… 평생 조수 노릇만 하다 끝날 거냐고 꼬드겼습니다. 장부만 몇 줄 고치고 상자를 날라다 주면 번듯한 자리를 준다고 해서……"
"네 탐욕 때문에 수십 명의 생도가 불구가 될 뻔했다."
펠릭스가 차갑게 서류를 접어 품에 넣었다.
"상단 하역소는 물론이고 길드 이사회까지 단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할 명백한 물증이야. 학장 각하께 바로 올려야겠어."
로완은 마차 바퀴를 감싸고 있던 칡덩굴을 천천히 풀어주었다. 팽창했던 줄기들이 본래의 유연함을 되찾으며 부드럽게 흙 위로 내려앉았다.
거짓된 마나로 쥐어짠 은빛 열매와 진흙탕에 처박힌 위조 인장이 안개 낀 숲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흙의 성분을 읽어내고 식물의 상처를 관찰하는 눈이 없었다면 이 모든 증거는 불길 속으로 사라졌을 터였다.
"마차를 돌립니다."
로완이 호위병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와 황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심판을 시작할 차례입니다."
자욱했던 숲의 안개가 걷히고 참나무 가지 사이로 맑은 아침 햇살이 길게 쏟아져 내렸다.
은빛 바퀴가 남긴 진흙 자국 위로 깨끗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