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천재 식물학자

17화: 봉인된 장부의 한 줄
새벽 종이 울리기 전 자료실의 복도는 얼음처럼 조용했다.
로완은 온실에서 묻혀 온 흙을 털어 내고 낡은 계단 앞에 섰다. 한 손에는 빈 유리판 상자를 들었고 다른 손에는 어젯밤 봉인한 C구획 시료 목록이 들려 있었다.
펠릭스가 품에서 접힌 문서를 꺼냈다. 붉은 학장 직인이 중앙에 선명했다.
"열람 허가서는 받아 왔어. 원본 장부를 이 자리에서 확인하고 다시 봉인하라는 내용이야."
"장부를 빌리지는 않습니다."
"알고 있어. 서명할 사람도 데려왔지."
펠릭스가 문을 두드리자 은테 안경을 쓴 서기관이 빗장을 풀었다. 그는 허가서와 펠릭스의 가문 인장을 번갈아 보았다.
"지하 보관고는 습기 때문에 원본 훼손 위험이 큽니다. 사본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사본에는 빈 줄만 남고 종이에 새겨진 압흔은 사라집니다."
로완이 대답했다.
서기관은 더 묻지 않고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지하 보관고의 문을 열자 차고 눅눅한 냄새가 올라왔다. 오래된 종이 냄새 사이로 젖은 숯과 금속 냄새가 섞여 있었다.
로완은 발걸음을 멈췄다.
"이 안에 물이 들어왔습니까?"
"비가 온 것도 아닌데요. 배수관이 새는 모양입니다."
바닥의 물자국은 낮은 곳으로 퍼지지 않고 벽 쪽에서 장부 보관함을 향해 뻗어 있었다. 로완은 손가락을 대지 않고 냄새를 맡았다. 폐창고 세척조에서 맡았던 은분 냄새였다.
"먼저 바닥을 기록하겠습니다. 한스는 유리판을 펼쳐 주세요."
한스가 마른 유리판 세 장을 물길 양옆에 세웠다. 실비아가 수정 감측판을 젖은 부분 위에 가져가자 은빛 선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C구획 포대에서 나온 것과 같은 결입니다. 파동은 약하지만 분명해요."
펠릭스의 손이 검자루로 내려갔다.
"누가 벌써 장부를 건드린 거지?"
"아직 장부에 손댄 사람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물이 어디까지 갔는지 먼저 봐야 합니다."
로완은 보관함 아래에 마른 종이를 밀어 넣었다. 물길은 가장 낮은 선반의 다리에서 꺾여 벽 안쪽의 좁은 홈으로 들어갔다. 선반은 젖었지만 장부는 아직 마른 상태였다.
첫 번째 묶음의 표지에는 신목 북쪽 배수 공사 자재 출납 장부라고 적혀 있었다. 첫 장에는 모래 열두 포와 참숯 네 포가 기록되어 있었다. 다음 줄은 비어 있었고 그 뒤에는 공인 연구실 관수실로 운반된 참숯 두 포라는 기록이 이어졌다.
로완은 빈 줄 위에 손을 얹었다. 잉크는 없었지만 종이에는 세 갈래로 나뉜 홈이 남아 있었다.
"문양이 찍힌 게 아니라 눌려 있습니다."
실비아가 몸을 낮췄다.
"도관 설계 기호와 같아요. 물길의 방향을 표시한 흔적입니다."
배수로 보강용 참숯 네 포는 신목 북쪽 공사 현장으로 보내져야 했다. 그러나 세 번째 포대의 운송란에는 다른 줄을 지운 흔적과 함께 연구실 반입 표시가 덧붙어 있었다. 표시된 잉크는 앞뒤 기록보다 새것이었다.
"오염 포대는 처음부터 연구실 숯으로 들어온 게 아닙니다. 신목 공사 자재에 섞여 들어온 뒤 반입처가 바뀌었어요."
펠릭스가 기록용 종이를 꺼내는 순간 안쪽 복도에서 철제 잠금쇠가 부딪혔다.
찰칵.
보관고의 두 번째 문이 닫혔다.
서기관이 고개를 돌렸다.
"안쪽 문은 제가 열어 두었습니다."
로완은 젖은 냄새가 짙어진 것을 느꼈다. 펠릭스가 문으로 달려갔지만 문 아래로 먼저 물이 흘러나왔다. 희미한 은빛 거품이 물결을 타고 번졌다.
"장부를 옮기겠습니다!"
한스가 손을 뻗었다.
"아니요. 젖은 표지를 들면 종이가 찢어집니다. 물부터 멈춥니다."
로완은 바닥 홈 가장자리에 마른 모래를 눌러 담았다. 물길을 보관함에서 바깥쪽으로 돌리자 한스가 유리판을 경사로 세워 흐르는 물을 빈 배수통으로 유도했다.
실비아가 감측판을 바닥에 눌렀다. 푸른빛이 번지며 오래된 배관의 방향이 드러났다.
"벽 안쪽에서 물이 올라옵니다. 신목 쪽 관로와 연결된 것 같아요."
"신목을 거친 물이라면 이렇게 탁한 은분 파동이 남지 않습니다."
로완은 물 한 방울을 유리판에 떨어뜨렸다. 은빛 선이 가장자리에서 세 갈래로 갈라졌다가 검게 굳었다.
"폐창고 세척조의 침전물과 같습니다. 누군가 장부를 씻으려고 배수관을 역으로 사용했습니다."
펠릭스가 잠금쇠를 검으로 쳤다. 낡은 빗장이 부러지자 안쪽 통로가 드러났다. 사람은 없었다. 다만 벽의 밸브가 반쯤 열려 있었고 손잡이에는 젖은 숯가루가 묻어 있었다.
"도망간 겁니까?"
한스가 물었다.
"도망갔는지는 모릅니다. 밸브부터 잠급니다."
로완은 천으로 손잡이를 감싼 뒤 조금씩 돌렸다. 물이 멎자 손잡이의 숯가루를 유리병에 넣고 밀랍으로 봉했다.
그때 바깥쪽 문이 세게 열렸다.
온실 감독관이 붉어진 얼굴로 들어왔다. 뒤에는 자료실 서기관이 서 있었다.
"공인 연구실의 시료를 왜 자료실 지하까지 가져온 겁니까? 원본 장부를 건드린 책임은 누가 질 거요?"
"장부를 건드린 건 제가 아닙니다. 물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로완은 젖은 바닥을 가리켰다.
감독관은 물길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오래된 배관 문제일 뿐이오. 오염 포대도 당신 연구실에서 관리한 물건 아닙니까? 전부 넘기시오. 내 인장이 붙은 포대라면 내가 조사하겠소."
펠릭스가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조사하면 원본과 시료가 함께 사라질 수도 있겠군."
"귀족 생도가 관리 행정을 모욕하는 건가?"
"행정이라면 기록을 남기면 됩니다."
로완은 두 사람 사이에 봉인함을 놓았다.
"오염 시료는 넘기지 않습니다. 감독관님은 붉은 인장을 언제 누구에게 맡겼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감독관의 눈썹이 꿈틀했다.
"인장은 내 사무실에 있습니다. 포대에 찍혔다고 해서 내가 오염시켰다는 뜻은 아니오."
"그 말은 맞습니다. 아직 감독관님을 범인으로 지목하지 않았습니다. 인장에 접근 가능한 사람의 범위를 확인해야 합니다."
로완은 C구획 포대에서 떼어 낸 밀랍 조각과 장부의 출고 표시를 나란히 놓았다. 붉은 밀랍 가장자리에는 작은 균열이 있었다. 인장을 찍은 뒤 포대를 풀었다가 다시 묶은 흔적이었다.
펠릭스가 운송표를 펼쳤다.
"참숯 네 포의 첫 목적지는 신목 북쪽 배수 공사야. 그런데 야간 운송표에는 세 번째 포대만 연구실 관수실로 바뀌어 있어. 변경 시각은 자정 직전이고."
실비아가 날짜별 감측 기록을 맞춰 보았다.
"그 시각에 신목 북쪽 배수관의 파동이 한 번 끊겼어요. 물길을 막고 포대를 옮긴 뒤 다시 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감독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날 밤 나는 사무실을 비우지 않았소."
"그렇다면 인장을 빌려 간 사람을 찾으면 됩니다."
로완은 자료실 서기관에게 야간 열쇠 대여 장부를 요청했다. 서기관은 망설이다가 얇은 장부를 가져왔다.
자정 무렵 연구실 보조 열쇠 하나가 대여되어 있었다. 대여자 칸에는 이름 대신 직책만 남아 있었다. 서명은 물에 번져 첫 획과 마지막 긴 선만 식별할 수 있었다.
"이건 누가 쓴 겁니까?"
펠릭스가 물었다.
"당직자가 대신 적었을 수도 있습니다. 연구실 보조라면 여러 사람이 해당됩니다."
로완은 서명 아래의 종이가 세로로 눌린 것을 살폈다. 그는 장부 밑에 얇은 유리판을 밀어 넣고 연필 가루를 가볍게 문질렀다.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세 갈래 문양 옆에 짧은 숫자 세 개가 떠올랐다.
"삼, 일, 칠. 선반 번호인가?"
펠릭스가 다른 운송표를 넘겼다. 신목 공사 자재의 변경 목적지 옆에도 같은 숫자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지워진 문장의 윤곽이 남아 있었다.
로완이 유리판에 빛을 비추자 글자가 떠올랐다.
청월 열매 두 상자.
제국 포션 제조소 3번 선반.
"열매가 이미 나갔습니다."
감독관이 장부를 빼앗으려 했지만 펠릭스가 팔을 막았다.
"이제야 급해졌나?"
"정상 생산분일 수도 있소."
"정상이라면 왜 목적지와 수량을 지웠겠습니까?"
로완은 장부의 날짜를 청월 모주의 수확 기록과 대조했다. 두 상자가 출고된 날은 상단의 비밀 재배실에서 세 번째 열매를 뜯어낸 직후였다. 은분과 고농도 안식 마나에 노출된 열매일 가능성이 충분했다.
온실 C구획의 봉인병이 떠올랐다. 물을 머금은 절단면에서 번지던 은빛 껍질과 같은 결이었다.
"학장님께 즉시 보고해야 합니다."
자료실 문밖에서 무거운 지팡이 소리가 들렸다. 알버스 학장이 두 명의 결계 수호 마도사와 함께 들어왔다.
"보고는 이미 받았네. 자료실의 마나 경보가 울렸거든."
학장은 젖은 바닥과 봉인함을 확인했다.
"원본은 확보했나?"
"장부와 압흔판과 은분 시료를 따로 봉인했습니다. 오염 열매 두 상자는 포션 제조소 3번 선반으로 이동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 선반을 격리한다. 소문이 먼저 퍼지면 열매가 다른 곳으로 옮겨질 걸세."
로완은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한 줄을 지운 사람은 열매의 수량과 출고 시각을 정상 생산 기록 사이에 끼워 넣었다. 연구실과 자료실을 오갈 수 있고 야간 열쇠를 빌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직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록의 뿌리는 흙 밖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실비아 부교수님은 제조소의 감측을 맡아 주세요. 펠릭스는 운송표와 입고 장부를 대조해 주십시오. 한스는 온실로 돌아가 C구획과 D구획의 봉인을 확인하세요."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원님은요?"
"오염 열매가 살아 있는 조직인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죽은 증거보다 움직이는 증거가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학장이 손을 들자 수호 마도사가 봉인함 세 개에 서로 다른 색의 봉인을 찍었다. 원본 장부는 푸른 봉인, 압흔판은 흰 봉인, 은분 시료는 검은 봉인이었다.
그 순간 한스가 들고 있던 마지막 봉인병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톡.
유리병 안의 은분 침전이 바닥에 가라앉지 않고 위로 솟구쳤다. 세 갈래 파문이 청월 꽃가루처럼 피어나 병목을 향해 뻗었다.
로완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염이 아직 반응하고 있습니다."
학장이 낮게 물었다.
"무엇에 반응하는가?"
로완은 은빛 파문과 장부에 남은 목적지를 번갈아 보았다.
"같은 물을 먹은 살아 있는 열매가 근처에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제조소의 3번 선반을 비우기 전에 격리해야 합니다."
자료실의 창밖으로 아침 햇빛이 번졌다.
로완은 젖은 장부를 다시 봉인하고 제조소로 향했다. 작은 백근 두 개가 자라난 청월 삽수와 아직 번지는 은분 파문이 서로 다른 봉인함 안에서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