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로 귀환한 절대마법사

18화: 누명
가람동 외곽 물류단지의 철문 너머로 붉고 푸른 경광등이 밤하늘을 어지럽게 갈랐다.
사이렌 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찢으며 아스팔트 도로 위로 낮게 깔렸다. 진우는 컨테이너 그늘 아래로 걸어 나오며 품속의 물건들을 가만히 매만졌다. 방수 봉투에 밀봉한 「에테르 1차」 연구 일지와 강태호의 목 뒤에서 떼어 낸 제어구 저장핵이 손끝에 단단히 만져졌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짧고 날카로운 진동을 연달아 울렸다.
진우가 화면을 켜자 포털 사이트의 긴급 알림과 메신저 속보가 화면 가득 떠올랐다.
[긴급 속보] 가람동 물류단지서 무허가 불법 헌터 난동… A급 헌터 강태호 중상.
[포털 헤드라인] 아레스 길드 현장 단속반 습격당해… 협회 비상 체포조 긴급 편성.
[사회면 톱] 미등록 각성자, 불법 개조 장비로 공권력 무력화 후 도주 중.
진우는 걸음을 멈추고 기사 상단에 첨부된 짤막한 동영상을 재생했다.
화면 속에는 쓰러진 강태호와 그 앞에 선 진우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강태호의 목 뒤에서 튀던 불꽃과 양팔 증폭기가 부서져 흩어지는 순간만이 교묘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앞뒤 맥락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강태호가 제어구를 과부하시키며 야적장 전체를 폭파하려던 순간도 아레스 추적조가 무차별로 마력탄을 난사하던 장면도 화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무릎을 꿇은 A급 헌터를 차갑게 내려다보는 진우의 실루엣뿐이었다.
영상 하단에는 굵고 붉은 글씨의 자막이 번쩍였다.
- 아레스 길드 소속 정예 헌터를 기습한 미등록 불법 헌터 강진우. 현장 증거를 강탈한 뒤 도주 중. 시민들의 적극적인 제보 요망.
기사 아래의 댓글창은 이미 수천 개의 글로 폭주하고 있었다.
- E급 등록증을 위조한 범죄자라던데 진짜인가요?
- A급 헌터를 저렇게 만들 정도면 전문 살인 청부업자 아닌가.
- 저런 놈들은 살려 둘 필요도 없다. 협회는 즉각 사살 명령을 내려라.
- 가람동 주민인데 지금 밖에 사이렌 소리 엄청 크게 들려요. 무서워서 문 다 잠갔습니다.
- 대형 길드 헌터도 저 모양인데 일반 시민은 어떻게 살라고 저런 걸 방치하나.
물류단지 앞 대로변을 지나던 야간 화물 기사들과 배달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길가에 멈춰 서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웅성거렸다.
"야 저기 봐라. 가람동에 무허가 살인마가 떴단다."
"얼굴 사진도 올라왔네. 20대 초반 청년이라는데 이 근처에 숨어 있는 거 아니야?"
"당장 문 잠그고 다른 길로 돌아가자. 마주치면 큰일 난다."
사람들은 화면 속 글자와 영상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다. 불과 수백 미터 뒤 폐쇄된 야적장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우는 스마트폰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아르카디아에서는 칼과 마법이 진실을 갈랐다. 피를 흘린 자가 패자였고 살아남아 서약을 맺은 자가 승자였다. 전장에서 벌어진 일은 전장의 흙과 피가 증명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달랐다.
보이지 않는 전파와 조작된 몇 줄의 기록만으로 한 사람을 흉악한 범죄자로 만들 수 있었다. 칼 한 자루 쥐지 않고도 수많은 사람의 눈과 귀를 틀어막는 힘이었다.
'이것이 현대의 전쟁인가.'
진우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분노라기보다는 낯선 질서에 대한 차가운 관찰에 가까웠다.
물리적인 무력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장막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진우는 주머니 속의 드론 송신 기록 단말을 손끝으로 훑었다. 자신이 확보한 진실을 이 장막 너머로 건네지 못한다면 부모님의 흔적 또한 거짓 속에 파묻히고 말 터였다.
가람천을 가로지르는 낡은 철교 아래.
어둠 속에 서 있던 은색 승합차의 비상등이 두 번 깜빡였다. 진우가 다가가자 조수석 문이 급하게 열렸다.
"진우 씨!"
최민아가 차에서 뛰어내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치신 곳은 없어요? 강태호는…… 정말 그 악명 높은 A급 헌터를 혼자 상대하신 거예요?"
"살아 있다. 장비만 끊어 뒀으니 생명에는 지장 없다."
진우의 덤덤한 대답에 민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곧바로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기사 보셨죠? 아레스 놈들이 손을 썼어요. 야적장 상황을 전부 왜곡해서 방송사에 넘겼습니다."
"보았다."
"제가 협회 조사관을 만나서 강성태 박사님과 이혜숙 연구원님의 원본 서류철을 정식으로 접수했거든요. 접수증까지 확실하게 받아 뒀어요. 그런데……."
민아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레스가 진우 씨를 특수절도 및 살인미수 혐의로 긴급 지명수배했어요. 협회 감사 규정상 피의자로 입건된 자와 관련된 민원 조사는 신병이 확보될 때까지 전면 보류 처리된대요."
"합법적인 경로를 먼저 얼려 버린 셈이군."
"네. 우리가 가져온 원본 서류를 협회 금고에 묶어 두고 진우 씨를 체포해서 입을 막으려는 속셈이에요. 그사이에 서류를 인멸하거나 조작할 시간을 벌겠다는 거죠."
민아의 주먹이 떨렸다. 소형 길드를 운영하며 대형 길드의 횡포를 수없이 봐 왔지만 이 정도로 노골적이고 치밀한 조작은 상상 이상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사람을 납치하고 던전에 몰아넣은 범죄자들이 오히려 법과 언론의 뒤에 숨어 있어요."
"권력을 쥔 자들이 기록을 만드는 법이다. 아르카디아의 영주들도 늘 그랬지."
진우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평온했다. 백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왕국과 귀족들의 권력 다툼을 지켜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냉정함이었다.
그때 철교 위 도로에서 요란한 경적 소리가 울렸다.
검은색 SUV 세 대가 서치라이트를 켜고 천변 도로를 질주했다. 차체 옆면에는 아레스 길드의 붉은 문장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상공에서는 시청 관제 드론과 아레스의 사설 정찰기가 붉은 적외선 센서를 번뜩이며 수풀과 갈대밭을 훑었다.
- 알립니다. 인근 주민들은 외출을 삼가시고 수상한 인물을 목격하면 즉시 아레스 상황실로 연락 바랍니다. 가람동 일대에 위험 등급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차량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위압적인 방송이 밤하늘을 무겁게 울렸다.
민아가 반사적으로 허리의 검자루를 쥐었다.
"수색조가 벌써 천변까지 밀고 들어왔어요. 차량으로 이동하는 건 위험해요. 시내 주요 교차로마다 검문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차는 여기에 두고 걷는다."
"네? 드론 열화상 카메라가 하늘을 덮고 있는데요?"
"따라와라."
진우가 왼손을 들어 가볍게 허공을 그었다.
1서클 굴절과 은닉의 결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얇게 내려앉았다.
달빛과 가로등 불빛이 진우와 민아의 어깨를 비추는 순간 미세하게 꺾이며 그림자 속으로 흡수되었다. 발바닥 아래에는 소리 차단의 막이 형성되어 자갈을 밟는 소리조차 공기 중으로 퍼지지 않았다.
상공을 선회하던 정찰 드론이 바로 머리 위를 지나쳤지만 렌즈 속 화면에는 그저 텅 빈 갈대밭만이 잡힐 뿐이었다. 열 감지 센서조차 진우가 펼친 미세한 마력막에 부딪혀 차가운 강물의 온도만을 기록했다.
민아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걱거리던 풀잎 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이런 기술이……."
"숨을 죽이고 걸어라."
진우는 추적조의 시선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어두운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반 경찰이나 명령에 따라 출동한 하위 헌터들과는 불필요하게 부딪힐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상부의 거짓말에 휘둘리고 있는 장기말에 불과했다.
가람동 구도심 외곽의 재개발 구역.
철거를 앞둔 낡은 상가 건물 3층의 빈 사무실에 두 사람이 들어섰다. 창문마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어 바깥의 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안전한 장소였다.
바닥에는 버려진 서류 뭉치와 부서진 책상이 뒹굴고 있었다. 민아가 가방에서 휴대용 보조 배터리와 변환 어댑터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기는 전기가 끊긴 구역이라 외부 통신 추적이 어려워요. 우선 가져오신 저장핵부터 확인해 보죠."
진우는 품에서 강태호의 제어구 저장핵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금속 칩에는 붉은색 마나 회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칩 표면에는 아레스 길드의 고유 각인과 함께 일련번호가 미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민아가 어댑터 단자에 칩을 연결하고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그러나 화면에는 푸른 데이터 대신 붉은 경고창이 깜빡였다.
[접근 불가: 아레스 길드 1급 군용 암호화 프로토콜 적용]
[보안 인가 키를 입력하십시오. 오류 3회 누적 시 내부 메모리 자동 파기]
민아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
"군용 2중 암호예요. 아레스 본부 메인 서버의 인가가 없으면 일반 단말로는 열 수 없어요. 억지로 해킹을 시도하다가는 내부 자폭 회로가 작동해서 데이터가 전부 타 버려요."
"드론에서 복사한 원본 영상은 어떻지?"
"그것도 시도해 봤어요."
민아가 포털 제보 게시판과 클라우드 저장소를 열어 보였다. 업로드 진행률이 0퍼센트에서 멈춘 채 붉은 느낌표가 떠 있었다.
[전송 실패: 방송통신 심의 및 치안 긴급 통제 키워드 필터링 적용]
"아레스가 가람동 일대 통신 기지국과 대형 포털사에 실시간 차단 코드를 심어 뒀어요. 진우 씨 얼굴이나 야적장 관련 영상 파일은 업로드 자체가 막혀 있습니다."
민아가 허탈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우리가 가진 건 확실한 진실인데 세상은 그 진실을 볼 통로 자체를 막고 있어요. 아레스가 쳐 둔 거대한 벽 앞에 갇힌 기분이에요."
진우는 묵묵히 금속 칩을 들여다보았다.
손가락 끝으로 미세한 마력을 흘려보내자 칩 내부의 마나 도선이 만져졌다. 물리적인 구조는 부술 수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전자 신호와 암호 체계는 마법으로 즉시 풀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마법은 자연의 법칙을 비틀고 에너지를 지배하지만 현대 사회의 디지털 통신망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또 다른 미로였다.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인간들이 설계한 인위적인 규약과 방화벽으로 이루어진 성벽이었다.
"힘으로 부수는 것만으로는 진실을 전할 수 없군."
진우의 말에 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리가 아무리 원본을 가지고 있어도 세상에 보여 주지 못하면 저들이 만든 거짓말이 진실이 되어 버려요. 협회의 부모님 서류도 영원히 묻히게 되고요."
민아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더니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방법이 하나 있어요."
"말해라."
"가람 전자상가 지하 깊은 곳에 '도깨비 골목'이라 불리는 암시장이 있어요. 길드의 손이 닿지 않는 블랙마켓이죠."
"그곳에 무엇이 있나?"
"아레스나 천공 같은 대형 길드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장비 수리공이자 해커가 있어요. 길드의 군용 보안 칩을 해독하고 자체 위성망을 통해 외부로 정보를 폭로하는 실력자예요."
"믿을 수 있는 자인가."
"돈과 거래를 따지는 냉정한 사람이지만 대형 길드의 은폐 공작에는 절대 협조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과거에 길드 사고로 가족을 잃었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 사람이라면 이 저장핵의 암호를 풀고 아레스의 필터링을 우회해서 원본 영상을 세상에 뿌려 줄 수 있을 거예요."
진우는 칩을 주머니에 넣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부모님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을 범죄자로 몰아세우는 자들의 목을 조르기 위해서라면 이 세계의 방식에 맞춰 줄 생각이었다. 칼을 휘두르는 적에게는 마법을 쓰고 거짓과 시스템 뒤에 숨는 적에게는 그 시스템을 뚫는 열쇠를 쓰면 그만이었다.
"가자."
"지금 바로요? 시내 전체가 감시 구역인데요?"
"망설일 이유가 없다."
진우가 먼지 쌓인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 대로변에는 여전히 아레스의 순찰 차량들이 번쩍이는 불빛을 흩뿌리며 밤의 거리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진우가 갇혔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언론과 제도를 장악했으니 힘없는 E급 헌터 하나쯤은 손쉽게 지워 버릴 수 있다고 확신할 터였다.
하지만 진우는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백 년 동안 전장을 헤쳐 오며 배운 한 가지는 적이 파놓은 함정이야말로 적의 심장을 찌를 가장 확실한 통로라는 사실이었다.
진우의 눈동자에 푸른빛이 차갑게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