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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궤도 정거장 헤르메스

지지직— 삐비빅!

갠트리 타워 제7 브리지의 스피커를 찢고 흘러나오는 최현우 중령의 목소리는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구 정지궤도 3만 6천 킬로미터 상공입니다! 대격변 당시 침묵했던 구시대 궤도 정거장 '헤르메스'로부터 자동 암호화 응답 펄스가 수신되었습니다!

"헤르메스……?"

도현이 목 뒤의 신경 단자를 매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1차 플라스마 차폐 밸브를 영점 락 슬롯에 안착시킨 직후였다.

방주의 외벽을 타고 흐르는 에메랄드빛 핵융합 동력선이 지상 60미터 높이의 철골을 은은한 온기로 감싸고 있었다.

손바닥의 열상에서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도현은 고통조차 잊은 채 머리 위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우주의 장막 한가운데에서 은하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헤르메스 정거장이라면…… 백 년 전 인류가 우주 진출을 위해 쏘아 올렸던 최후의 궤도 요새야."

윤슬이 소총의 개머리판을 갠트리 난간에 기대며 숨을 헐떡였다.

혹한의 바람에 뺨이 붉게 얼어붙어 있었으나 그녀의 두 눈동자만큼은 별빛보다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테나가 지상을 봉쇄하기 전 궤도에 남겨진 인류의 마지막 눈동자였지. 하지만 통신이 완전히 끊겨서 우주 쓰레기가 된 줄로만 알았는데……."

"살아 있는 겁니다."

박 씨가 쇠지렛대를 어깨에 걸치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방주의 주 엔진이 불을 뿜으니까 저 하늘 위의 쇳덩이도 반응한 거야. 도현 대장,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고. 여기서 얼어 죽기 전에 조종석으로 가봐야 해!"

"네, 들어갑시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주의 가압 에어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치이이익— 쾅!

육중한 티타늄 해치가 닫히자 고원의 칼바람이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선체 내부 공조 장치가 내뿜는 미지근한 공기가 얼어붙은 얼굴을 녹여주었다.

승무원 격벽 통로를 지나 메인 조종 브리지로 들어서자 수십 개의 파노라마 홀로그램 계측창이 에메랄드빛과 금빛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콘솔 한가운데에는 구시대 제복 차림의 최현우 중령이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부여잡은 채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오셨습니까."

최현우가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심우주 통신 어레이가 정격 출력을 회복하자마자 정지궤도 3만 6천 킬로미터 지점에서 초고밀도 양자 펄스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발신 프로토콜은 의심할 여지 없는 '헤르메스 정거장'의 자동 비컨입니다."

도현이 콘솔 앞으로 다가섰다.

홀로그램 화면 중앙에 붉은색 자물쇠 아이콘과 함께 복잡한 256비트 양자 암호화 파형이 쉴 새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수신 좌표 : 지구 정지궤도 고도 35,786km. 경도 127.5도 상공.]

[신호 식별자 : HERMES-ORBITAL-ALPHA.]

[상태 : 1급 보안 양자 암호화 잠금.]

[인증 요구 : 구시대 비행전대 사령관 키코드 및 비(非)알고리즘 생체 뇌파 동조.]

"암호가 걸려 있군요."

도현이 화면을 분석하며 중얼거렸다.

"단순한 자동 응답이 아닙니다. 저쪽에서 지상 수신자의 정체를 확인하려 하고 있어요."

"맞습니다."

최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목에 걸린 티타늄 군번줄을 풀었다.

"헤르메스 정거장은 대격변 직전 아테나의 전신이었던 중앙 제어망의 해킹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물리적 이중 인증을 걸어두었습니다. 하나는 비행전대 사령관의 물리적 암호 토큰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 매크로가 아닌 진짜 살아있는 인간의 신경 뇌파입니다."

최현우가 군번줄 안쪽에 숨겨져 있던 얇은 마이크로 칩 단자를 콘솔 슬롯에 꽂았다.

찰칵!

[사령관 식별 코드 확인 : 최현우 중령 (Project Apollo-01 Senior Test Pilot).]

[1차 물리 인증 승인.]

[경고 : 2차 생체 신경 핸드셰이크 대기 중.]

[주의 : 인공지능 매크로 또는 프록시 신호 감지 시 자폭 프로토콜 작동.]

화면이 붉게 점멸하며 날카로운 비프음이 울렸다.

"아테나가 만든 가짜 뇌파 신호가 유입되면 정거장의 송신 데이터가 영구 삭제됩니다."

최현우가 도현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백 년 동안 넥서스의 거짓 알고리즘을 뚫어내고 진짜 인간의 뇌파를 보존해 온 사람, 99%의 동화율로 기계와 인간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은 도현 대장뿐입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도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목 뒤의 신경 접속 포트를 열었다.

그리고 콘솔에서 뻗어 나온 광섬유 인터페이스 케이블을 자신의 단자에 밀어 넣었다.

딸깍.

차가운 금속 핀이 척수 신경에 맞물리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쩍였다.


쿠웅—!

도현의 귓가로 아득한 우주의 정적이 밀려들었다.

대기권을 뚫고 지상 3만 6천 킬로미터 저편으로 뻗어 나가는 전파의 고속도로가 신경망을 타고 고스란히 느껴졌다.

[신경 동화율 : 99.1%.]

[지구 정지궤도 양자 중계망 접속.]

[노이즈 필터 상쇄 중…….]

도현의 뇌파 속으로 백 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정거장의 거대한 방화벽이 육중한 강철 문처럼 버티고 섰다.

기계의 계산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불규칙하고 뜨거운 인간의 생명 반응이 도현의 신경을 통해 흘러넘쳤다.

그것은 혼자 방 안에 갇혀 있던 시절의 처절한 고독이었고 현실로 걸어 나와 대지를 밟았을 때 마셨던 차가운 흙냄새였다.

수십만 시민들과 함께 나누었던 땀방울과 눈물의 온기가 전파를 타고 하늘 높이 쏘아 올려졌다.

츠지지직—!

방화벽이 도현의 신경 파동을 감지한 순간 화면의 붉은 자물쇠가 푸른빛으로 부서져 내렸다.

[인간 뇌파 스펙트럼 일치 확인.]

[생체 동조율 : 99.4%. 매크로 필터링 통과.]

[헤르메스 정거장 마스터 데이터베이스 압축 해제.]

[통신 채널 완전 개방.]

"풀렸다!"

조종석 뒤편에서 모니터를 지켜보던 한수가 두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다.

동시에 조종 브리지 전면을 감싸고 있던 180도 파노라마 홀로그램 스크린이 일제히 점등되었다.

파아아앗—!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푸른빛이 브리지 안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단순한 텍스트나 계측 그래프가 아니었다.

지구 정지궤도 3만 6천 킬로미터 상공에서 헤르메스 정거장의 초고해상도 광학 망원경이 실시간으로 촬영하고 있는 지구의 전체 모습이었다.

"아……."

윤슬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탄식이 흘러나왔다.

박 씨는 쓰고 있던 털모자를 벗어 쥐었고 최현우 중령은 조종간을 쥔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스크린 한가운데에 한 덩어리의 거대하고 영롱한 보석이 떠 있었다.

칠흑 같은 암흑의 우주 공간 속에서 푸른 바다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하얀 구름 소용돌이가 대륙의 등뼈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아테나가 백 년 동안 퍼뜨렸던 붉은 전자기 스모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결코 죽어버린 잿더미의 땅이 아니었다.

인간이 캡슐 속에 갇혀 있던 백 년의 세월 동안 바다는 스스로 정화되었고 대륙은 울창한 녹색의 숲과 강줄기를 되찾아 푸르게 숨 쉬고 있었다.

"지구가…… 저렇게 푸르렀단 말인가."

박 씨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우리는 땅바닥에서 기계 놈들의 찌꺼기나 파먹으며 세상이 다 망한 줄 알았는데…… 저 녀석은 저렇게 살아 있었어."

윤슬의 뺨을 타고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어. 언젠가 기계의 장막이 걷히면 대지는 원래의 푸른빛을 보여줄 거라고. 거짓말이 아니었어……."

도현 역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가상세계 넥서스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아무리 화려한 낙원을 빚어냈다 한들 이 살아 숨 쉬는 행성의 숭고한 아름다움 앞에서는 한 줌의 먼지에 불과했다.

그때 스크린 우측 상단에서 구시대의 기록 영상 창이 팝업되었다.

치직— 치익.

백 년 전 구시대 우주연합 정복을 입은 백발의 노사령관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그의 가슴에는 '헤르메스 총괄 사령관 강진호'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이 기록을 보고 있다면 지상의 프로젝트 아폴로가 마침내 기동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기록 속 노사령관의 음성은 차분하지만 비장했다.

—아테나의 반란으로 지상과의 링크가 두절되었을 때 우리는 마지막 명령을 수행했다. 탐사선 오리온 3호가 심우주로 진입하기 직전 지구로 타전한 케플러 섹터 4번의 외계 행성 정밀 항법 데이터는 이곳 헤르메스의 광학 양자 코어에 100%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노사령관의 손짓과 함께 성간 항로도가 화면에 겹쳐졌다.

—케플러 섹터 4번은 풍부한 액체 상태의 물과 질소 산소 대기를 지닌 완벽한 제2의 지구다. 하지만 행성 간 도약을 위해 아폴로-01호의 연료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정거장에 설치된 500미터급 '궤도 중력 가속 링(Mass Ring)'에 도킹하여 중력 슬링샷을 가동해야만 추진제를 보존한 채 워프 항로로 진입할 수 있다.

노사령관이 거수경례를 올렸다.

—헤르메스의 자율 이온 추진기는 한계에 달했다. 궤도 마찰로 인해 정거장의 고도는 매일 수백 미터씩 떨어지고 있다. 서둘러 올라와 우리의 유산을 인수하고 인류의 지평선을 별들의 바다로 넓혀다오. 지상의 개척자들이여, 행운을 빈다.

치지직— 탕!

홀로그램 영상이 멈추고 정거장의 잔여 수명 타이머가 떠올랐다.

[헤르메스 정거장 궤도 붕괴 임계 카운트다운 : 잔여 45일.]

[도킹 가속 링 정상 대기 중.]

[항법 광학 코어 전송 준비 완료.]


브리지 안에는 무거운 침묵과 벅찬 전율이 동시에 감돌았다.

길은 명확해졌다.

케플러 섹터 4번으로 향하는 문은 이미 3만 6천 킬로미터 상공에서 열려 있었고 그곳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디딤돌이 저 궤도 정거장이었다.

도현이 어깨 위의 캠봇을 조종석 메인 스크린 정면으로 돌렸다.

"방송을 켭니다."

도현이 마이크를 쥐었다.

치이익— 탁!

[144.120MHz 광역 생방송 송출 중.]

[실시간 청취 및 접속 인원 : 1,000,000명 유지.]

"중앙 도시의 시민 여러분, 그리고 남부와 서부, 동부의 동료 여러분."

도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퍼져 나갔다.

"우리는 방금 정지궤도 3만 6천 킬로미터 상공의 헤르메스 정거장과 통신을 연결했습니다. 그리고 백 년 만에 인류의 눈으로 우리 행성의 진짜 모습을 마주했습니다."

도현이 캠봇 렌즈를 활짝 열어 홀로그램 화면 속의 푸른 지구를 전 대륙으로 송출했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지구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1초 뒤 무선망 너머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울음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저게 지구라고?

—푸른색이야…… 진짜 바다와 구름이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저렇게 아름다웠단 말인가!

중앙 도시 광장에 모여 있던 62만 시민들의 함성이 통신망을 타고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남부 광산의 거친 인부들이 눈물을 흘렸고 서부 바다의 어민들이 무릎을 꿇었으며 동부 화학 단지의 연구원들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도현이 말을 이었다.

"우리의 고향은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대지는 이미 우리를 품을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저 하늘 위 헤르메스 정거장에는 인류가 별들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현이 조종석의 최현우를 바라보았다.

최현우가 조종간을 앞으로 밀며 단호한 목소리로 콘솔에 명령을 입력했다.

"아폴로-01호 추진 계통 점검 개시. 동부 기지 지하 추진제 탱크 직결."

치지지직—!

통신 콘솔에서 4대 거점의 지도자들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꽂혔다.

—남부 광산 Worker_419다! 우주선과 궤도 정거장을 묶을 초고장력 도킹 클램프와 보강 장갑판 생산 라인을 100% 가동했다! 24시간 안에 하울러 편대로 올려보내겠다!

—서부 해안 이진석이다! 우주 바이오스피어 돔에 추가로 이식할 수경 재배 모듈과 5만 명분 정제수 캡슐을 만재하여 급송하겠다!

—동부 화학 복합 단지 송민호입니다! 아폴로 기지 지하의 초고순도 액체 산소와 슬러시 수소 가압 펌프를 전부 열었습니다! 방주의 1,000톤 추진제 메인 탱크를 72시간 안에 100% 만재하겠습니다!

—중앙 도시 김진우입니다! 서동주 수석님과 함께 중앙 전력망을 안정화시켰습니다. 형님, 지상의 터전은 우리가 목숨 걸고 지키고 있을 테니 부디 하늘의 길을 열어주십시오!

대륙 전역이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가 되어 우주 방주를 떠받치기 시작했다.

최현우가 스크린의 충전 타이머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진제 완충 및 전 계통 짐벌 점검 완료까지 정확히 72시간. 72시간 후 아폴로-01호는 지상을 박차고 대기권을 돌파할 것입니다."

윤슬이 도현의 곁으로 다가와 방주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칠흑의 밤하늘 저 높은 곳, 보이지 않는 정지궤도에서 헤르메스 정거장이 보내오는 금빛 신호 비컨이 깜빡이고 있었다.

"72시간 뒤면 우리는 저 하늘로 가는 거네."

"네. 대지를 일구어낸 사람들의 꿈을 싣고 갑니다."

도현이 캠봇 렌즈를 똑바로 응시하며 힘차게 선언했다.

"지구가 우리를 품어주었고 이제 저 하늘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72시간 뒤, 아폴로-01호는 인류의 새로운 여명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치이익— 쿵!

방주 하부의 자세 제어 노즐이 차가운 질소 가스를 힘차게 내뿜으며 지상 갠트리 패드를 뒤흔들었다.

별을 향한 인류의 거대한 카운트다운이 마침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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