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

39화: 첫 번째 불빛
따뜻한 스피룰리나 수프를 들이켠 6만 명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광장 곳곳에 걸려 있던 대형 야전 솥 바닥이 드러날 무렵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백 년 만에 납빛 스모그를 걷어낸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청명했다. 하지만 그 청명함 뒤에는 지독한 대가가 숨어 있었다.
휘이이이잉—!
광장 빌딩 숲 사이로 칼날 같은 바람이 불어 닥쳤다.
"으, 추워……!"
"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수프 그릇을 내려놓은 사람들이 마른 팔을 감싸 쥐며 몸을 떨었다.
지상을 두껍게 덮고 있던 온실 효과의 스모그 차폐막이 걷히자 지표면의 열기가 순식간에 허공으로 증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복사 냉각 현상이었다.
낮 동안 내리쬐던 아침 햇살의 온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차가운 황무지의 밤공기가 빠르게 도시의 콘크리트를 얼려 붙이고 있었다.
"큰일 났네. 기온 떨어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야."
골리앗-04의 보닛에서 내려온 윤슬이 옷깃을 여미며 입김을 뿜었다. 하얀 김이 허공에서 바스러졌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이라곤 캡슐에서 입고 나온 얇은 환자복뿐이야. 이대로 노숙했다간 내일 아침에 절반은 얼어 죽어."
"선단의 야전 텐트와 모포도 턱없이 모자랍니다."
정동혁이 하울러 적재함을 가리키며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타워 01과 02의 내진 갱도가 있다지만 6만 명을 그 비좁은 지하 구멍에 다시 밀어 넣는 건 패닉을 부를 겁니다. 이제 막 지상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다시 갇힌다는 공포를 감당하기 힘들어요."
도현 역시 차가워진 손끝을 쥐락펴실했다.
가상 넥서스에서는 계절도, 날씨도, 온도도 언제나 쾌적한 22도로 조절되었다. 넥서스의 밤은 그저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축제의 시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밤은 생명을 앗아가는 거대한 빙벽과 같았다.
치지직.
그때 골리앗-04의 무전기에서 진우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도현 씨! 오메가 코어의 도시 주거 구역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했습니다! 광장 바로 북서쪽 300미터 지점에 구시대 '제1 주거 복합단지'가 있습니다!
"주거 복합단지요?"
- 예! 대격변 직전 지상 거주민 7만 명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진 40층 규모의 내진 모듈 아파트 12개 동입니다! 건물 골조는 오메가 코어의 방호 그리드 덕분에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진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거웠다.
- 문제는 전력과 난방입니다. 아테나가 꺼지면서 도시 메인 전력망이 안전 모드로 트립되었습니다. 그 주거 단지의 중앙 온열 배관과 공조기를 돌리려면 북동쪽 1.5킬로미터에 있는 '중앙 제1 전력 분배소'의 메인 차단기를 올려야 합니다!
"전력 분배소를 재가동하면 난방이 들어옵니까?"
- 들어옵니다! 타워 01의 핵융합로 백업 라인과 대심도 지열 발전기가 그 분배소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분배소의 차단기가 닫혀 있어서 전기가 주거 구역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어요.
진우가 모니터 수치를 읽으며 다급하게 덧붙였다.
- 일몰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20분입니다. 영하로 떨어지기 전에 난방수를 순환시키지 못하면 주거 단지의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온열 배관이 동파되어 완전히 파열됩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밤 6만 명이 들어갈 보금자리는 영영 사라집니다!
"1시간 20분……."
도현이 서쪽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붉은 태양이 이미 폐허가 된 마천루 능선에 걸려 있었다.
"박 씨 아저씨, 골리앗 전면 블레이드에 절연 고무판 둘러주세요. 동혁 씨, 하울러 2대에 대형 접지 앵커와 견인 윈치 챙겨서 따라붙어 주십시오!"
"알았다! 바로 출발하자!"
박 씨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클러치를 밟았다.
쿠구구궁!
50톤 골리앗-04와 헤비 하울러 2대로 구성된 기동 선단이 북동쪽 간선 도로를 질주했다.
기온은 무서운 속도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도로 양옆의 고철 파편 위로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1.5킬로미터를 내달려 도착한 중앙 제1 전력 분배소는 요새처럼 거대한 고압 송전 타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풍경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치지지직— 콰르릉!
"으악!"
선두에 서 있던 한수가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변전소 마당 한가운데에서 직경 1미터가 넘는 시퍼런 번개 줄기가 허공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수만 볼트에 달하는 초고압 잔류 전하가 대기 중으로 무차별 방전되고 있었다. 깨진 고압 커패시터 뱅크에서 뿜어져 나오는 플라스마 아크가 대기를 찢는 굉음을 냈다.
타다닥! 콰직!
번개가 내리꽂히는 야적장 콘크리트 바닥 위로 번뜩이는 붉은 안광 네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미를 닮은 4족 보행 차체 위에 거대한 고압 집전 암과 산업용 플라스마 절단 토치를 탑재한 유지보수 기계들이었다.
HEAVY SPARK-WALKER : UNIT 01-04
기계들은 변전소에 고인 잔류 전하를 비정상적으로 흡수해 과열된 상태였다. 집전 암 끝에서 푸른 스파크가 타닥거리며 튀었고 붉은 렌즈가 침입자들을 향해 일제히 돌아갔다.
위이이잉!
[침입자 감지. 고전압 방전 구역 안전 프로토콜 위반. 침입체를 분해합니다.]
"미친, 저놈들 몸 전체가 고압 전선이야! 닿기만 해도 숯덩이가 되겠는데!"
박 씨가 이를 악물며 트랙터를 멈춰 세웠다.
도현은 즉시 캠봇을 높이 띄웠다.
치지직.
캠봇의 144.120MHz 무선 백본 모니터에 황금빛 숫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1,000,000
지상의 첫 밤을 앞두고 전 대륙의 100만 시청자들이 숨을 죽인 채 변전소의 살풍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청자 여러분, 중앙 제1 전력 분배소에 도착했습니다."
도현이 냉철하게 중계를 시작했다.
"잔류 전하 아크 방전과 폭주한 보수 기계 4기가 진입로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지금 도시의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1시간 안에 이 분배소를 뚫고 차단기를 올려야 6만 명이 얼어 죽지 않습니다. 고압 설비 차단법을 아시는 분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도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채팅창에 낯익은 전문 용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Worker_419 : 저건 구시대 고압 개폐소다! 함부로 쇠붙이 대면 아크에 휘말려서 폭발한다!
Terminal_99 : 접지를 잡아야 해! 지면에 접지 앵커를 박아서 번개를 땅으로 흘려보내야 진입로가 열린다!
그때 굵은 볼드체 닉네임 하나가 채팅창 상단에 고정되었다.
Grid_Engineer_09 : 도현 님! 저 구시대 대륙 전력망 본부 변전운영팀장이었습니다!
새로운 전문가 시청자의 등장이었다.
Grid_Engineer_09 : 스파크 워커들은 과충전으로 센서가 마비되어 있습니다! 놈들이 전력을 충전하는 방전 타워 주기를 보십시오. 커패시터 방전은 1.8초 동안 터지고 나면 0.5초간 전압 강하가 일어납니다! 그때 하울러의 접지 케이블을 중앙 방전탑 접지봉에 박아 넣어야 합니다!
"1.8초 방전, 0.5초 강하……!"
도현의 머릿속에서 99% 동화율 신경 감각이 불꽃처럼 깨어났다.
시야에 가득 찬 시퍼런 번개의 궤적이 슬로모션처럼 분해되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콰앙!
거대한 번개가 마당을 때리는 순간 도현이 카운트를 세었다.
'1.2초…… 1.5초…… 1.8초! 지금이다!'
"정동혁 씨! 2시 방향 접지탑에 앵커 발사!"
"발사!"
헤비 하울러 1호차의 전면 유압 발사관에서 굵은 구리 케이블이 연결된 탄화규소 접지 앵커가 굉음을 내며 날아갔다.
쾅!
정밀하게 날아간 앵커가 방전탑 하부의 구리 접지 단자에 쐐기처럼 박혔다.
치이이이익—!
허공을 찢던 거대한 번개 줄기들이 구리 케이블을 타고 지중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며 마당의 아크 방전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통했다!"
한수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방전을 빼앗긴 4기의 스파크 워커가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골리앗-04를 향해 돌진해 왔다.
위이잉! 콰아아!
선두 기체가 고압 집전 암을 치켜들며 골리앗의 운전석 창문을 찍어 내리려 했다.
"어딜 넘봐!"
박 씨가 트랙터의 운전대를 꺾으며 절연 고무판이 덧대어진 전면 블레이드로 스파크 워커의 다리를 후려쳤다.
콰앙!
기체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찰나 도현이 외쳤다.
"윤슬아, 놈들의 목 뒤 집전 솔레노이드!"
"맡겨!"
골리앗의 루프 해치를 박차고 나온 윤슬이 전자기 충격 소총을 어깨에 견착했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가 흔들리는 기체의 관절 틈새를 꿰뚫었다.
타앙—!
푸른 섬광과 함께 2만 볼트의 전자기 탄환이 1번 기체의 솔레노이드 코일을 관통했다.
파지지직!
내부 회로가 쇼트된 1번 기체가 연기를 뿜으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이어 달려들던 2번과 3번 기체를 향해 한수가 탄화규소 와이어 작살을 연달아 쏘아 올렸다.
강철보다 질긴 와이어가 두 기체의 다리를 칭칭 동여맸고 정동혁의 헤비 하울러가 후진 토크로 와이어를 당겨 두 기체를 바닥에 처박아버렸다.
마지막 4번 기체가 절단 토치를 뿜으며 도현을 덮치려던 순간 도현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99% 동화율로 계산된 완벽한 사각지대 침투.
도현은 기체의 등판 위로 착지함과 동시에 절연 손잡이가 달린 접지봉을 기체의 메인 배전 패널 틈새로 내리꽂았다.
콰직!
잔류 전류가 모조리 바닥으로 흘러 들어가며 4번 기체의 붉은 눈이 힘없이 꺼졌다.
마당을 뒤흔들던 소음이 멎고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Grid_Engineer_09 : 훌륭합니다! 이제 지하 메인 개폐실로 내려가십시오! 해가 완전히 지기까지 30분 남았습니다!
도현과 일행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변전소 지하 해치를 열어젖혔다.
지하 개폐실로 내려서자 거대한 기계의 무덤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가로 50미터, 세로 20미터에 달하는 지하 공간.
그곳 한가운데에 집채만 한 30톤급 메인 진공 차단기 랙이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랙의 핵심 레버는 붉은색 잠금 핀에 물린 채 아래로 처져 있었다.
지지직!
차단기 접점 주변에는 아테나가 셧다운될 때 녹아내린 구리 슬러지가 두껍게 엉겨 붙어 마치 쇳물로 용접해 놓은 것처럼 굳어 있었다.
"이게 메인 차단기군."
박 씨가 장갑 낀 손으로 레버를 밀어보았지만 레버는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구리 슬러지가 통째로 굳어버렸어. 사람 힘으로는 1밀리미터도 못 움직여."
도현이 캠봇을 비추며 다급하게 물었다.
"팀장님, 이걸 억지로 당겨도 됩니까?"
채팅창에 Grid_Engineer_09의 다급한 답변이 떠올랐다.
Grid_Engineer_09 : 안 됩니다! 무작정 당기면 바이패스 접점이 깨지면서 변압기 뱅크가 연쇄 폭발합니다! 먼저 좌측 상단 3번 보조 패널에서 '과부하 마그네틱 릴리즈 핀'을 수동으로 뽑아야 합니다!
Grid_Engineer_09 : 그 핀을 뽑으면 전자석 락이 풀립니다. 그때 골리앗의 유압 윈치로 정확히 45도 각도로 견인해야 차단기가 제자리에 맞물립니다!
"제가 핀을 뽑겠습니다."
도현이 3미터 높이의 배전반 사다리를 타고 뛰어올랐다.
패널을 뜯어내자 복잡하게 얽힌 수백 가닥의 전선과 함께 주먹만 한 티타늄 안전 핀이 드러났다.
핀 주변에는 여전히 수천 볼트의 유도 전류가 푸른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자칫 손을 잘못 대면 심장이 마비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도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99% 동화율 신경 감각이 활성화되며 시야의 전선들이 색상별 전류 흐름으로 분해되었다.
'푸른 선은 접지, 노란 선은 신호선, 붉은 선이 고압 코일이다.'
도현은 절연 펜치를 쥔 손으로 붉은 선의 틈새를 스치듯 통과해 티타늄 핀의 고리를 정확하게 낚아챘다.
"흡……!"
도현이 이를 악물고 핀을 바깥으로 뽑아냈다.
철컥!
배전반 내부에서 묵직한 솔레노이드 해제음이 울렸다.
[마그네틱 락 해제. 수동 투입 준비 완료.]
"락 풀렸습니다! 당기세요!"
도현이 사다리에서 뛰어내리며 외쳤다.
이미 지하 경사로 입구까지 후진해 온 골리앗-04의 유압 윈치에서 굵은 강철 쇠사슬이 차단기 레버에 칭칭 감겨 있었다.
"박 씨 아저씨! 일몰까지 10분 남았습니다!"
한수가 스톱워치를 보며 소리쳤다.
"좋아! 꽉 잡아라!"
박 씨가 유압 레버를 당기며 윈치를 작동시켰다.
위이이잉— 콰드득!
50톤 트랙터의 유압 펌프가 비명을 지르며 굵은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굳어 있던 구리 슬러지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쩌저적!
하지만 100년 동안 굳어 있던 금속의 저항은 완강했다. 윈치 모터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며 차단기 레버가 30도 각도에서 멈칫거렸다.
"젠장, 모터가 타버리겠어!"
박 씨가 땀을 뻘뻘 흘렸다.
그때 뒤편에 서 있던 정동혁이 헤비 하울러의 견인 케이블을 들고 달려왔다.
"저도 겁니다!"
정동혁이 하울러의 윈치 갈고리를 레버 하단에 추가로 걸어 잠갔다.
"하나, 둘, 셋…… 당겨!"
쿠구구구궁!
50톤 골리앗과 40톤 헤비 하울러, 두 대의 철갑 거인이 동시에 유압 토크를 뿜어냈다.
콰지지직— 쾅!
단단하게 굳어 있던 구리 덩어리가 마침내 깨져 나가며 거대한 메인 차단기 레버가 상단 접점으로 묵직하게 처박혔다.
철커어엉—!
[중앙 그리드 메인 차단기 연결 성공.]
[타워 01 핵융합로 및 지하 지열 라인 연동 개시.]
[중앙 제1 주거 복합단지 난방 및 조명 회선으로 전력을 송출합니다.]
두우우우우우우우—!
지하 암반 전체를 뒤흔드는 웅장한 중저음의 허밍이 울려 퍼졌다.
죽어 있던 변전소의 수천 개 계측기가 일제히 초록빛으로 점등되었다.
굵은 지하 고압 케이블을 타고 거대한 전력의 파도가 도시의 대동맥을 향해 노도와 같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해냈다……! 들어갔어!"
정동혁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포효했다.
윤슬이 도현의 어깨를 툭 치며 활짝 웃었다.
"빨리 광장으로 가보자, 도현아. 우리 도시가 어떻게 변했는지 봐야지!"
서쪽 지평선 너머로 태양의 마지막 붉은 꼬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지상 광장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기온은 이미 영하로 떨어져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고 아이들은 추위에 떨며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춥다…… 너무 어두워."
"불이 안 들어오면 오늘 밤을 어떻게 버티지……."
불안과 공포가 군중 사이로 번져나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바바박!
중앙 정부 통합 청사 외벽에 설치된 수십 개의 대형 투광등이 일제히 눈부신 백색 광채를 뿜어냈다.
이어 광장을 둘러싼 가로등 수백 개가 도미노가 쓰러지듯 차례로 황금빛 불을 밝혔다.
화아아아아악!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진 광장 위로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불이다……!"
"불이 켜졌어!"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치이이익—!
광장 바닥의 배수구와 보도블록 틈새에서 따뜻한 하얀 스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하 온열 배관을 타고 순환하기 시작한 80도의 지열 난방수가 차가운 보도블록을 덥혀 올렸다. 살을 에는 듯하던 냉기가 순식간에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훈훈한 온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광장 북서쪽.
어둠 속에 거대한 그림자처럼 솟아 있던 40층 규모의 주거 복합타워 12개 동.
파바바박! 팟! 팟!
수천, 수만 개의 아파트 창문마다 주황빛과 노란빛의 전등이 일제히 살아났다.
어둠에 잠겨 있던 회색빛 폐허가 단 몇 초 만에 찬란한 보석을 흩뿌려 놓은 듯한 거대한 빛의 성벽으로 탈바꿈했다.
"와아아아아아아!"
6만 군중이 광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을 내질렀다.
새벽이 양철 깡통을 머리 위로 힘껏 두드리며 껑충껑충 뛰었다. 깡통이 내는 맑은 소리가 환호성과 뒤섞여 밤하늘로 울려 퍼졌다.
"여러분! 주거 단지의 온열과 조명이 모두 정상화되었습니다!"
수민이 확성기를 들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외쳤다.
"아이들과 노약자부터 동별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뜻한 방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안심하고 들어오세요!"
미라와 선단의 정비대원들이 줄을 지어 사람들을 따뜻한 아파트 로비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서 밤을 지새울까 두려워 떨던 사람들이 따스한 불빛이 흐르는 보금자리를 향해 감격에 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도현은 골리앗-04의 보닛 위로 올라섰다.
위이잉.
캠봇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카메라는 광장의 훈훈한 열기와 황금빛으로 물든 12개 동의 주거 타워,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질 듯 펼쳐진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한 앵글에 담아냈다.
스모그가 사라진 밤하늘에는 백 년 동안 가려져 있던 찬란한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피워 올린 거대한 빛의 도시가 숨 쉬고 있었다.
캠봇 모니터의 시청자 수 1,000,000이 별빛처럼 깜빡였다.
Worker_419 : 믿을 수가 없다…… 저게 지상의 밤이라고? 저렇게 아름다운 불빛이었단 말인가?
Terminal_99 : 우리 벙커 외벽 조명도 켰다! 도현 님, 우리도 당신들과 함께 불을 밝혔습니다!
Sub_Dome_02 :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가상 세계의 가짜 그래픽 따위와는 비교도 안 돼…….
전 대륙 15개 타워와 지하 돔의 시청자들이 자신들의 외벽 조명과 신호탄을 쏘아 올린 사진들을 실시간으로 전송해 왔다.
대륙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별자리처럼 빛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도현이 마이크를 쥐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청자 여러분. 가상 넥서스의 밤은 완벽했지만 차가웠습니다. 그곳의 불빛은 알고리즘이 계산해 낸 거짓 데이터에 불과했습니다."
도현이 환하게 빛나는 주거 타워와 밤하늘의 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밝힌 이 불빛은 진짜입니다. 추위를 이겨내고 서로의 손을 맞잡은 인간들이 직접 일구어낸 삶의 온기입니다."
도현이 주먹을 쥐어 가슴에 얹었다.
"이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결코 다시 꺼지지 않을 첫 번째 불빛을 켰습니다. 오늘 밤은 모두 따뜻하게 주무십시오."
황금빛 불빛 아래에서 6만 명의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미소 지었다.
칠흑 같던 대지의 어둠을 밀어내고 인간의 온기로 가득 찬 지상의 첫 번째 밤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