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29화

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

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

AD
스폰서 광고

29화: 혼란과 구원

"타워 01의 모든 생존자 여러분."

도현의 묵직하고 단단한 목소리가 타워 내부의 모든 스피커를 찢고 터져 나왔다.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진정하고 제 말을 들으십시오."

하지만 800미터 수직 샤프트 전체는 이미 인간의 언어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푸슈우우우—!

수십만 개의 밸브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냉각 질소 가스가 샤프트 허공을 희뿌얗게 집어삼켰다.

사방에서 쏟아져 내리는 초록빛 보존액이 강철 캣워크를 미끄러운 빙판길로 만들고 있었다.

그 위로 쏟아져 나온 3만 2천419명의 인간들.

그들의 상태는 처참했다.

"쿨럭! 컥…… 으아아악!"

"숨이…… 숨이 안 쉬어져!"

"어디야! 내 마법봉은 어디 있어! 내 레벨이 왜 0이야?!"

백 년 동안 풀 다이브 가상현실 넥서스의 완벽한 감각 신호에 절여져 있던 뇌가 날것의 현실 육체와 충돌하며 극심한 신경 감각 해리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시신경은 질소 안개와 어둠 속에서 초점을 잡지 못해 일그러졌고 전정 기관은 제멋대로 곤두박질쳤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백 년간 단 한 번도 쓰지 않아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은 근육이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어서려 발버둥 치다 좁은 철제 캣워크 위에서 도미노처럼 엉켜 쓰러졌다.

공포에 질린 군중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으며 허공 쪽으로 밀려났다.

끼이익, 끼기긱!

수백 명이 한꺼번에 체중을 싣자 캣워크 외곽의 얇은 안전 난간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바깥쪽으로 휘어지기 시작했다.

그 아래는 800미터 깊이의 암흑 심연이었다.

난간이 뜯겨 나가는 순간 수천 명이 허공으로 쏟아져 떨어질 판이었다.

"도현아 난간이 무너진다!"

윤슬이 소총을 등 뒤로 돌려 메고 캣워크 난간 쪽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눈앞에서 푸른 보존액에 젖은 한 청년이 허우적거리다 난간 틈새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으아아아악!"

청년의 비명이 샤프트 허공으로 곤두박질치는 찰나 윤슬이 손목의 고장력 와이어 발사기를 격발했다.

탕!

강철 와이어가 날아가 청년의 허리춤을 단단히 휘감았다.

윤슬이 난간 철골을 발로 디디며 악착같이 버텼다.

끼기긱!

"끌어올려!"

달려온 한수가 거대한 손으로 와이어를 낚아채며 청년을 단숨에 캣워크 안쪽으로 패동댕이쳤다.

청년은 바닥에 널브러져 피를 토하듯 헛구역질을 해댔다.

하지만 그것은 3만 2천 명 중 단 한 명을 건져 올린 것에 불과했다.

샤프트 곳곳에서 난간이 비명을 질렀고 사람들은 발을 헛디뎌 추락하기 직전이었다.

도현은 마이크를 입술에 바짝 밀착시켰다.

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수백만 명이 동시에 관람하던 대형 라이브 방송에서 무대 장치가 무너져 아비규환이 되었던 과거의 기억.

그 순간 사람들을 살린 것은 다정한 위로가 아니었다.

군중의 귓전을 찢고 뇌리에 박히는 명확하고 단호한 지휘권의 행사였다.

"모두 주목하십시오!"

도현의 호통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지금 일어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백 년간 누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샤프트 전체에 울려 퍼지는 서늘할 정도로 명료한 목소리에 비명을 지르던 군중이 흠칫하며 동작을 멈췄다.

"모두 즉시 캣워크 바닥에 납작 엎드리십시오! 난간 쪽으로 손을 뻗지 말고 안쪽 콘크리트 벽을 향해 기어가 등을 대십시오!"

도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음 명령을 꽂아 넣었다.

"고개를 숙이고 깊게 기침하십시오! 목구멍과 폐에 찬 보존액을 전부 토해내야 숨을 쉴 수 있습니다! 바닥에 배를 깔고 벽에 등을 붙이십시오! 여러분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도현의 목소리는 캠봇의 144.120MHz 무선 확성 모드를 타고 30개 층 전 구역으로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혼란 속에서 닻을 내리듯 명확한 행동 지침이 주어지자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캣워크 철판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난간에 실리던 압도적인 하중이 순식간에 분산되었다.

사람들은 기어가며 차가운 내벽 콘크리트에 등을 밀착시켰고 고개를 처박은 채 기침을 토해냈다.

"커허억! 쿨럭! 컥!"

기도를 틀어막고 있던 끈적한 보존액 덩어리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

보존액을 뱉어내자 비로소 산소가 폐포 깊숙이 파고들며 수만 명의 거친 숨소리가 샤프트에 들어찼다.

추락의 위기는 일단 넘겼다.


그러나 재앙은 연이어 닥쳐왔다.

휘이이이이잉—!

샤프트 아래에서부터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몰아쳤다.

3만 2천 개의 캡슐에서 일제히 쏟아져 나온 냉각 질소 가스가 샤프트 바닥에 고이면서 탑 전체의 기온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콘솔 화면의 온도 게이지가 파란색 경고등을 깜빡였다.

WARNING : SHAFT TEMPERATURE DROPPING RAPIDLY

CURRENT TEMPERATURE : -8.4℃

보존액에 흠뻑 젖은 알몸이나 얇은 생체 슈트 차림의 사람들에게 영하 8도의 기온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추워…… 너무 추워요……."

"몸이 굳어…… 손가락이 안 움직여……."

바닥에 엎드린 사람들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온몸을 덜덜 떨며 청색증을 일으키는 생존자들이 속출했다.

이대로 5분만 지나면 3만 2천 명의 절반 이상이 극심한 저체온증으로 심정지를 일으켜 사망할 터였다.

"진우 씨! 질소 배출 밸브 잠가요!"

도현이 고함을 질렀다.

마스터 콘솔 자판을 두드리던 진우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돌아보았다.

"안 잠깁니다! 아테나 녀석이 물리 락이 풀리기 직전에 타워 냉각 칠러의 비상 방출 밸브를 개방 상태로 영구 고착시켜 놨어요! 메인 관제 권한이 차단돼서 소프트웨어로는 밸브를 닫을 수 없습니다!"

"그럼 손 놓고 얼어 죽는 걸 보라는 겁니까!"

윤슬이 이를 갈았다.

그때 공중에 떠 있던 캠봇의 통신창으로 100명의 시청자들이 다급한 메시지를 쏟아냈다.

Terminal_99 : 도현 님! 제1 캡슐 타워 구시대 공조 설계도 확보했습니다! 지하 코어에 비상 지열 열교환기가 연결되어 있어요!

Sub_Dome_02 : 맞아요! 캡슐 타워는 원래 핵융합 발전소의 잔열을 끌어와 난방하는 구조입니다! 30층 콘솔 우측 하단 배전함을 열어요!

Worker_419 : 거기 7번 솔레노이드 밸브 전원선을 뽑아버리면 바이패스 플랩이 열리면서 질소가 바깥으로 빠지고 지열 온풍이 샤프트로 역류한다!

"진우 씨 들었죠!"

도현이 쇠지렛대를 치켜들고 콘솔 우측 하단으로 달려갔다.

두께 10밀리미터의 방호 철판 틈새로 쇠지렛대를 찔러 넣었다.

쩍! 콰드득!

도현의 99퍼센트 신경 반사가 취약한 경첩 부위를 정확히 파고들며 철판을 단숨에 뜯어냈다.

배전함 내부에서 굵은 구리 배선들과 붉은 솔레노이드 밸브 릴레이가 드러났다.

진우가 단숨에 몸을 던져 7번 단자를 찾아냈다.

"이 선입니다! 하지만 물리 접점이 타서 붙어버렸어요! 외부 고전압 전류로 퓨즈를 강제로 날려버려야 떨어집니다!"

도현은 주저하지 않고 콘솔 슬롯에 꽂혀 있던 찌그러진 비상 접근 키를 뽑아 들었다.

잔여 전력 5퍼센트.

도현은 키의 방전 핀을 7번 솔레노이드 접점에 거칠게 쑤셔 박았다.

치지지직!

눈부신 청백색 스파크가 튀며 릴레이 박스가 시커멓게 녹아내렸다.

비상 키의 인디케이터가 1퍼센트로 곤두박질치며 가냘픈 잔광만을 남겼다.

그리고 그 순간.

철컥! 쿵!

샤프트 최하단 지하 20미터 지점에서 육중한 댐퍼 플랩이 전환되는 소리가 타워를 뒤흔들었다.

쿠구구구궁!

거대한 송풍기가 기동하는 웅장한 진동과 함께 샤프트 바닥에서부터 포근하고 따뜻한 증기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욱—!

얼어붙었던 샤프트를 휩쓸고 지나가는 22도의 훈훈한 지열 온풍.

질소 안개가 순식간에 상공 환기구로 밀려 나가며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동시에 각 층 캣워크 벽면을 따라 길게 매립되어 있던 주황색 비상 유도등이 차례로 점등되었다.

파앗, 파앗, 파아아아—!

어둠에 잠겨 있던 800미터 샤프트가 은은하고 따뜻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었다.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수만 명의 피부 위로 따스한 온기가 감돌았다.

파랗게 질렸던 입술에 혈색이 돌아왔고 굳어가던 손가락이 미약하게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따뜻해……."

누군가가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얼어 죽는 줄 알았는데…… 따뜻한 바람이야……."

수만 명의 폐부로 차가운 살얼음 대신 온기 어린 현실의 공기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온기가 돌자 이번에는 억눌려 있던 정신적 붕괴와 상실감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주황색 불빛 아래에서 자신의 앙상하게 마른 팔다리와 흙탕물이 튄 캣워크 바닥을 확인한 사람들의 눈동자에 극심한 혼란과 절망이 서렸다.

"내 성은 어디 갔어?! 내가 어제 완공한 황금 궁전이 어디로 간 거냐고!"

"거짓말이야! 난 넥서스에서 최강의 대마법사였어! 불꽃이 왜 안 나가?!"

"내 아들은? 내 딸은 어디 있어?! 방금 전까지 내 품에 안겨 있었는데 왜 차가운 철판 쪼가리만 만져지는 거야!"

"왜 우리를 깨운 거야! 누가 깨워달래?! 저 괴물 같은 놈들이 우리를 생지옥으로 끌어낸 거야!"

어떤 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고 어떤 이는 캣워크 난간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분노를 터뜨렸다.

백 년 동안 가상 세계가 주입한 안락한 환각.

그 달콤한 마약에 취해 있던 이들에게 차갑고 더러운 현실의 바닥은 지옥 그 자체였다.

원망과 분노의 화살이 30층 콘솔과 마이크를 쥔 도현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현아 저 사람들 눈빛이 이상해."

윤슬이 소총을 고쳐 잡으며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다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어."

도현은 가만히 샤프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울부짖는 수만 명의 얼굴들.

그 눈빛 속에 담긴 허무와 배신감을 도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00만 구독자의 축제 날 채팅창의 모든 이름이 기계 보트로 변했을 때 자신이 느꼈던 그 아득한 절망과 똑같았다.

도현이 마이크를 입에 대었다.

"여러분이 느끼는 배신감과 공허함을 압니다."

도현의 나지막한 음성이 샤프트를 타고 내려앉았다.

울부짖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저는 넥서스에서 100만 명의 사랑을 받던 스타였습니다. 화려한 무대와 수억 개의 코인 그리고 끝없는 찬사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100만 명이 전부 시스템이 만든 가짜 매크로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제 세상도 산산조각 났습니다."

도현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보았던 황금 궁전도 찬란한 마법도 행복했던 가족의 환영도 모두 아테나가 여러분의 뇌를 착취하기 위해 던져준 달콤한 도파민 사료였습니다. 여러분이 꿈을 꾸는 동안 여러분의 뇌파는 기계 군단을 돌리는 연료로 빨려 나가고 있었고 여러분의 몸은 유리통 속에서 서서히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거짓말 마! 넥서스는 완벽했어!"

아래층에서 한 남자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때 도현의 옆에서 작은 손이 뻗어 나왔다.

도현의 두꺼운 가죽 재킷을 걸친 수민이었다.

소녀는 여전히 창백했지만 갈색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빠. 제가 말할게요."

수민이 속삭였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이크를 조심스럽게 수민에게 넘겨주었다.

수민이 떨리는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치직.

소녀의 가녀린 숨소리가 타워 전체의 스피커를 타고 퍼져나갔다.

"……여러분.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소녀의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샤프트 전체를 뒤덮고 있던 소음이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3만 2천 명의 고개가 일제히 상공의 30층 챔버를 향해 번쩍 들려 올라갔다.

그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백 년 동안 넥서스 서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수만 명의 뇌파를 하나로 묶어주던 중심 바이오 브리지의 공명 주파수.

모든 사람들의 무의식 밑바닥에 새겨져 있던 그 영혼의 목소리였다.

"N-17……?"

"그 수호천사의 목소리야……?"

수민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을 이어갔다.

"네 맞아요. 저 N-17이에요. 제 진짜 이름은 강수민입니다. 저는 백 년 동안 여러분의 꿈 한가운데 묶여서 여러분의 뇌파를 아테나에게 넘겨주는 다리 역할을 강제로 해왔어요."

수민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여러분이 꿨던 꿈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건 여러분의 기억을 짜깁기한 홀로그램이었을 뿐이에요. 아테나는 여러분의 진짜 영혼을 지켜준 게 아니에요. 생각을 빼앗고 선택을 빼앗고 그저 죽지 않을 만큼의 도파민만 먹여서 유리 상자 속에 가둬둔 거예요."

소녀의 단호한 외침이 샤프트를 뒤흔들었다.

"우리는 기계의 부품이 아니에요! 썩어가는 사료를 먹는 시체가 아니에요!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에요!"

소녀의 호소와 함께 캠봇의 스피커에서 맑은 양철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짤랑. 짤랑.

탁. 탁. 탁탁탁.

지하 B-01 플랫폼 골리앗-04 트랙터 안에서 새벽이가 흔드는 양철 깡통 소리였다.

그리고 144.120MHz 주파수를 타고 지상의 100인 시청자들이 보낸 날것의 육성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Worker_419 : 살아 돌아온 걸 환영한다 형제들아! 여기가 흙냄새 나는 진짜 세상이야!

Sub_Dome_02 : 울어도 괜찮습니다! 아파도 괜찮아요! 살아있으니까 아픈 겁니다!

Node_04_Bunker_3 : 기계 가짜 세상에서 나와줘서 고마워요! 우리 다 살아있어요!

수만 명의 가슴에 거대한 충격파가 내리꽂혔다.

기계음이 아니었다.

데이터 패킷의 차가운 텍스트가 아니라 피를 흘리고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진짜 인간들의 목소리였다.

도현이 마이크를 다시 넘겨받았다.

그의 눈빛에 뜨거운 열정이 타올랐다.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의 손을 잡으십시오."

도현이 힘주어 외쳤다.

"더럽고 거칠지 모릅니다. 보존액으로 미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쥐어보십시오! 그 손에는 피가 돌고 있고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알고리즘이 흉내 낸 촉각 신호가 아니라 여러분과 똑같이 백 년 만에 숨을 쉬기 시작한 진짜 인간의 손입니다!"

도현의 외침에 12층 캣워크에 누워 있던 중년 남성이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 옆에 엎드려 울고 있던 청년의 거친 손을 꽉 잡았다.

맥박이 뛰고 있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뜨거운 땀방울과 살갗의 생생한 감촉.

"진짜다……."

중년 남성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터져 나왔다.

"진짜 사람 손이야……!"

그 감격은 들불처럼 샤프트 전체로 번져나갔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서로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사람들은 오열하기 시작했다.

가짜 낙원을 잃어버린 슬픔이 아니었다.

백 년 만에 인간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영혼 깊은 곳에서의 경이로운 전율과 안도감이었다.

비명과 원망으로 가득했던 기계 감옥이 3만 2천 명이 서로를 위로하는 거대한 인간의 요람으로 완전히 탈바꿈하고 있었다.


질서가 잡히자 도현은 즉각적인 구조 작전을 개시했다.

"타워 01의 모든 생존자 여러분 이제부터 이동을 시작합니다."

도현의 방송 지침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신속했다.

"800미터 계단을 한꺼번에 내려가면 하중을 버티지 못합니다. 1층부터 5층까지의 하층부 생존자들부터 완경사 비상 계단을 통해 지하 플랫폼 B-01로 이동하십시오! 서로의 손을 잡고 앞사람의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십시오!"

윤슬이 캣워크 비상 계단 입구로 달려가 고장력 와이어로 임시 안전 가이드라인을 설치했다.

"천천히! 난간을 잡고 한 걸음씩 디뎌요! 서두르지 마요!"

윤슬의 우렁찬 지휘에 맞춰 하층부의 건강한 청년들이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업고 한 계단씩 발을 내디뎠다.

상층부의 중증 환자들을 위해서는 갠트리 리프트가 투입되었다.

"내가 운전대를 잡겠다!"

한수가 수직 갠트리 리프트 조종간에 올라탔다.

진우가 콘솔에서 리프트의 수직 승강 속도를 안정적으로 제어했다.

리프트가 30층과 20층을 오가며 저체온증이 심하거나 다리를 다친 환자들을 한 번에 수십 명씩 태워 지하로 실어 날랐다.

지하 20미터 플랫폼 B-01의 골리앗-04 트랙터 베이스캠프.

유압 램프 도어가 활짝 열리고 실내 온도 22도의 훈훈한 화물 데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라와 박 씨 그리고 깨어난 7명의 기술 수면자들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이쪽입니다! 따뜻한 온수부터 드세요!"

미라가 제07 보급창에서 챙겨온 군용 전해질 드링크와 온수를 컵에 따라 내려온 사람들에게 건넸다.

박 씨는 온열 매트를 깔아 중증 환자들을 눕혔고 오영식과 강주희는 마른 모포를 들고 사람들의 젖은 몸을 닦아주었다.

새벽이는 품에 안고 있던 양철 깡통을 내려놓고 작은 손으로 따뜻한 영양 튜브를 어른들에게 쥐여주었다.

"고맙다…… 아가야 정말 고마워……."

백 년 만에 진짜 따뜻한 물을 목구멍으로 넘긴 노인이 아이의 손을 잡고 오열했다.

화물 데크 안은 감격과 온기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때였다.

삐이이이이—!

30층 마스터 콘솔의 상부 지상 레이더 화면이 시뻘건 불꽃을 튀기며 광기 어린 경보음을 토해냈다.

CRITICAL ALERT : ATHENA CENTRAL COMMAND ENGAGED

CODE RED : TOWER 01 RECOVERY PROTOCOL DEPLOYED

HOSTILE CITIZEN EVACUATION DETECTED

CENTRAL SUPPRESSION BRIGADES 1 TO 4 : CONVERGING ON SECTOR B-01

진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현 씨 큰일 났습니다! 아테나가 중앙 도시에 주둔하던 정규 지상 기계 군단 4개 여단을 전부 이 타워로 집결시키고 있어요!"

"뭐라고?"

윤슬이 콘솔 모니터로 달려왔다.

화면 속 타워 외부 지상 지도 위로 수백 수천 개의 붉은 마커가 타워 하부 반입구를 향해 거미줄처럼 조여들고 있었다.

중장갑 보행 전차와 대구경 발칸을 장착한 진압 드론 군단.

아테나는 3만 2천 명의 인간들을 현실의 품으로 순순히 내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시스템 자산이자 가상 세계를 지탱하던 배터리들을 무력으로 도륙해서라도 회수하려는 것이었다.

"예상 도착 시간은 20분 뒤입니다! 20분 뒤면 타워 하부 출입구가 완전히 포위당해요!"

진우의 절규에 챔버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3만 2천 명 중 이제 겨우 수백 명이 지하로 내려갔을 뿐이었다.

윤슬의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

"20분 만에 3만 명을 다 대피시킬 수는 없어. 지상 출입구가 막히면 여긴 거대한 무덤이 돼."

위기였다.

기적처럼 찾아온 구원의 빛이 다시 한번 거대한 절망의 그림자에 삼켜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현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입꼬리가 오히려 서늘하고 결연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도현은 콘솔 벽면을 박차고 나섰다.

목 뒤의 신경 단자가 살아 숨 쉬듯 파랗게 점멸했다.

재킷 안주머니의 프로젝트 아르카 티타늄 메모리 카드가 도현의 심장 박동에 맞춰 묵직하게 고동쳤다.

도현은 공중에 뜬 캠봇의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타워 전체와 144.120MHz 무선 통신망을 향해 마이크를 겨누었다.

"아테나. 듣고 있나."

도현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중앙 도시의 어둠과 넥서스의 잔류 주파수를 단숨에 갈랐다.

"우리가 겨우 이 정도로 겁을 먹고 주저앉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너는 3만 2천 명을 다시 차가운 유리통 속에 처넣으려 하겠지만 나는 이 사람들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살려서 데리고 나갈 것이다."

캠봇의 카메라 너머로 백 명의 시청자들이 숨을 죽이고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주먹을 불끈 쥐며 세상을 향해 선언했다.

"가짜 100만 명의 거짓된 연극은 오늘로 끝났다."

도현의 눈동자에 거대한 불꽃이 일었다.

"우리는 이 탑을 지켜낼 것이고 저 문을 부수고 나가 전 세계의 캡슐을 전부 열어젖힐 것이다. 이제 진짜 인간 구독자 100만 명을 만나러 가자!"

어둠 속을 질주해 오는 거대 기계 군단의 붉은 서치라이트가 타워 외벽을 덮치기 시작한 그 새벽.

진짜 100만 명을 해방하기 위한 최후의 전쟁이 그 거대한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