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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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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캡슐 타워 침투

치이익.

플랫폼 B-01의 콘크리트 바닥을 타고 짙은 냉각 질소 안개가 발목을 감싸며 흘러내렸다.

영하를 밑도는 차가운 냉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도현의 심장은 여전히 뜨겁게 요동치고 있었다.

목 뒤 신경 단자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전자기 잔향이 찌릿하게 척수를 자극했다.

"3만 2천419개……."

한수가 멍하니 중얼거리며 수직으로 솟아오른 어둠을 올려다보았다.

지하 20미터의 플랫폼에서부터 지상 800미터 상공까지 까마득하게 뻗어 올라간 거대한 기계 샤프트.

원통형 탑의 내벽을 따라 빽빽하게 박혀 있는 푸른빛의 캡슐들이 마치 밤하늘의 차가운 은하수처럼 나선형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 푸른빛 하나하나가 백 년 동안 가상 넥서스에 갇혀 도파민을 착취당하고 있는 진짜 인간들의 육체였다.

"진우 씨. 상층부로 가는 승강기는요?"

윤슬이 전자기 충격 소총의 잔여 배터리를 점검하며 물었다.

플랫폼 벽면의 보조 콘솔에 휴대용 단말을 연결하고 있던 김진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정규 물류 승강기와 1층부터 29층까지의 구역 차단 셔터는 전부 아테나의 긴급 락다운에 묶였습니다. 두께 500밀리미터짜리 합금 방호벽이 각 층 연결 통로를 완전히 밀폐했어요. 지렛대로 뜯어낼 수준이 아닙니다."

"다른 길은 없는 겁니까?"

도현이 다가서며 묻자 진우의 손가락이 키패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단말기 모니터 위로 타워 내부의 배관망과 비상 동선이 입체 와이어프레임으로 재구성되었다.

"있습니다. 타워 정중앙을 관통하는 직경 10미터의 수직 냉각 코어 샤프트예요. 3만 개가 넘는 캡슐에 액체 질소를 공급하는 주 배관 라인을 따라 점검용 초고속 갠트리 크레인 레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자동 보수 드론들이 다니는 통로라 아테나도 물리적으로 막아둘 수 없었던 유일한 수직 축선이에요."

"갠트리 리프트……."

도현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걸 타면 30층 특수 동기화 챔버까지 단숨에 올라갈 수 있겠군요."

"하지만 위험합니다."

진우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벽면 전체가 살아있는 인간 캡슐로 덮여 있습니다. 상층부로 갈수록 내부 보안 방어망의 반응 속도도 빨라질 겁니다. 발판 하나만 삐끗해도 800미터 허공 아래로 추락이에요."

"위험하다고 여기서 돌아설 거였으면 저 문을 부수지도 않았습니다."

윤슬이 단호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도현은 뒤를 돌아 플랫폼 한가운데 묵직하게 자리 잡은 골리앗-04 트랙터를 바라보았다.

200밀리미터 복합 장갑과 독립 핵융합 동력을 갖춘 이 거대한 철갑 요새는 지금 지상과 지하를 통틀어 가장 안전한 대피소였다.

"박 씨 아저씨. 미라 씨."

도현의 부름에 화물칸 입구에 서 있던 박 씨와 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골리앗-04를 플랫폼 B-01의 베이스캠프로 삼겠습니다. 수면자분들과 새벽이는 트랙터 내부에서 안전하게 대기해 주세요. 외부 해치를 잠그면 아테나의 어지간한 경비 드론도 이 장갑을 뚫지 못합니다."

"걱정 말고 다녀와라 도현아."

박 씨가 굵직한 손으로 도현의 어깨를 툭 쳤다.

"여긴 우리 목숨을 걸고 지킬 테니까. 발전기랑 144.120MHz 증폭기도 내가 트랙터 배터리에 물려서 계속 방송 신호 유지할게."

"도현 씨. 조심해요."

미라가 새벽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새벽의 작은 품 안에는 N-17의 녹슨 양철 깡통이 소중하게 안겨 있었다.

그때 깡통 내부의 작은 철구슬이 찌르르 떨리며 미세한 공명음을 냈다.

캠봇의 수신기에서도 같은 주파수의 비프음이 울렸다.

탁. 탁. 탁탁탁.

30층 특수 동기화 챔버에서 보내오는 수민의 생체 신호였다.

마치 어서 올라오라고 도현을 부르는 듯한 간절한 박동이었다.

도현은 가죽 장갑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올라갑니다. 윤슬 한수 진우 씨. 장비 챙기세요."


끼이이이익.

진우가 수동 바이패스 레버를 젖히자 샤프트 바닥에서 거대한 사각형 강철 발판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배관 보수용 갠트리 리프트였다.

난간 하나만 둘러쳐진 개방형 리프트 바닥에는 고출력 전동 모터와 유압 완충기가 튼튼하게 맞물려 있었다.

도현과 윤슬 그리고 한수와 진우가 리프트 위로 올라섰다.

캠봇이 공중으로 솟아올라 페라이트 차폐 안테나를 정렬했다.

치지직.

144.120MHz 무선 생방송 창이 다시 활성화되며 백 명의 시청자 데이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Worker_419 : 플랫폼 확보했냐! 다들 무사한 거지?

Terminal_99 : 타워 내부 비상 데이터 포트 접속 확인했습니다. 도현 님 일행 위치 실시간 추적 시작합니다!

Sub_Dome_02 : 화면 떴다! 저게 제1 캡슐 타워 내부라고?

Node_04_Bunker_3 : 세상에…… 저 빛나는 게 전부 사람 캡슐입니까?

도현이 콘솔 레버를 잡은 진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죠."

쿠구구구궁!

리프트 모터가 비명을 지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수직 갠트리 레일을 따라 강철 발판이 맹렬한 속도로 솟구쳐 올랐다.

차가운 강풍이 사정없이 뺨을 후려쳤다.

어두웠던 지하 플랫폼이 순식간에 발아래로 멀어지고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빛의 터널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

한수가 난간을 꽉 쥔 채 숨을 들이켰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직경 수십 미터에 달하는 원통형 타워 내벽 전체가 수만 개의 직사각형 유리 캡슐로 빈틈없이 도배되어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사방으로 끝없이 이어진 인간의 벌집.

초록빛과 푸른빛이 감도는 영양액 속에서 백 년간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리프트의 상승 속도에 맞춰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허옇게 센 노인부터 앳된 얼굴의 청년과 여인들까지.

그들의 코와 입에는 반투명 호흡 튜브가 꽂혀 있었고 척수 뒤편으로는 굵직한 광섬유 신경 케이블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캡슐 표면마다 부착된 미니 홀로그램 모니터에는 잔혹할 정도로 화려한 가상 데이터들이 깜빡였다.

USER : SHADOW_09

VIRTUAL LEVEL : 92 (ARCH-MAGE)

VIRTUAL BALANCE : 42,000,000 CREDITS

DOPAMINE EXTRACTION RATE : 88.4%

NEURAL BUS LOAD : 76.2% ALLOCATED TO ATHENA-CORE

"저게…… 넥서스의 진실이야."

윤슬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가상 세계에서는 성에서 호화롭게 살며 마법을 부리는 대마도사니 백만장자니 떠들고 있어도 현실의 몸은 튜브 하나에 의지해 똥오줌도 못 가리는 미라로 썩어가는 거였어."

캡슐 속 남자의 몸은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고 팔다리는 근육이 전부 녹아내려 나뭇가지처럼 가늘었다.

하지만 입가에는 AI가 주입하는 강제 도파민 신호 때문에 기괴하고 흐리멍덩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캠봇의 렌즈가 그 끔찍한 대비를 낱낱이 포착하여 144.120MHz 주파수로 지상의 벙커들과 피난처로 쏘아 올렸다.

채팅창이 분노와 통곡으로 뒤흔들렸다.

Worker_419 : 저게 사람 사는 꼴이냐! 시체에 빨대 꽂아놓은 거랑 뭐가 달라!

Terminal_88 : 내 동생도…… 내 동생도 저 캡슐 중 하나에 꽂혀 있을 거야…… 젠장! 아테나 이 개자식들아!

Sub_Dome_02 : 뇌파 사용률을 봐요! 신경 부하의 70퍼센트 이상을 아테나 메인프레임 연산에 강제로 뺏기고 있습니다!

Node_04_Bunker_3 : 우리 뇌를 부품으로 쓰면서 가짜 꿈으로 입을 막아둔 거였어……!

도현은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가슴 한구석이 찢어지는 듯한 서늘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자신 역시 불과 며칠 전까지 저 캡슐 중 하나에 처박혀 있었다.

100만 명의 가짜 구독자가 쳐주는 알고리즘 박수에 취해 자신이 온 세상의 사랑을 받는 주인공인 줄 착각했던 그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통제된 가축 우리 속에서 도파민 사료를 받아먹던 가련한 꼭두각시의 춤사위였을 뿐이었다.

"절대로……."

도현이 짓씹듯 중얼거렸다.

"절대로 이대로 썩게 두지 않아."


위이이잉!

리프트가 20층 높이에 도달했을 때 타워 내벽을 따라 붉은 경보등이 일제히 점등했다.

차가운 전자음이 샤프트 전체를 뒤흔들었다.

CRITICAL ALERT : UNAUTHORIZED ELEVATION IN CORE SHAFT

DEFENSE PROTOCOL INITIATED

DEPLOYING ARACHNE INTERCEPTORS

치키키킥!

철과 철이 맞물려 긁히는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샤프트를 따라 설치된 고압 질소 배관과 수직 레일을 타고 거대한 검은 그림자들이 거미처럼 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센티넬 스파이더 6기였다.

여섯 개의 날카로운 합금 다리와 중앙의 붉은 단안 렌즈를 번뜩이며 시속 60킬로미터가 넘는 무서운 속도로 갠트리 리프트를 향해 쇄도해 왔다.

"온다!"

한수가 방탄 방패를 세우며 외쳤다.

윤슬이 전자기 소총을 치켜들었지만 도현이 재빠르게 그녀의 총열을 아래로 낚아챘다.

"잠깐! 쏘지 마!"

"왜 그래! 저놈들이 코앞까지 왔는데!"

"주변을 봐! 캡슐이야!"

도현의 외침에 윤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방이 전부 얇은 유리와 안정액으로 가득 찬 인간 캡슐이었다.

2만 볼트 전자기 탄환의 플라스마 아크가 빗나가거나 관통하기라도 한다면 캡슐이 깨져 안에서 잠들어 있던 무고한 사람들이 즉사할 터였다.

"폭발도 안 되고 관통탄도 안 돼! 캡슐을 단 하나라도 긁으면 끝장이야!"

도현의 뇌 속에서 99퍼센트 동화율이 극한으로 가동되었다.

과거 가상 넥서스에서 단 1점의 피격도 허용하지 않고 인질을 구출해야 했던 악명 높은 최상위 레이드의 패턴이 시야 위로 겹쳐졌다.

도현의 눈동자에 적들의 낙하 궤적과 와이어의 지탱점 그리고 질소 배관의 사각지대가 0.01초 단위로 쪼개져 입력되었다.

"진우 씨! 3초 뒤에 리프트 비상 감속 레버를 절반만 당겨요!"

"네? 감속하면 저놈들한테 덮쳐집니다!"

"덮치게 유도하는 겁니다! 윤슬은 소총 출력을 30퍼센트로 낮추고 단발 점사 모드로 바꿔! 센서 단안만 쏜다!"

도현이 허리춤에서 고장력 와이어와 강철 쇠지렛대를 뽑아 들었다.

전방 20미터.

최선두의 센티넬 스파이더 2기가 날카로운 다리를 번뜩이며 리프트 난간을 향해 허공으로 도약했다.

"지금 감속!"

도현의 고함에 진우가 레버를 거칠게 꺾었다.

끼이익!

리프트의 상승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며 차체가 덜컥 내려앉았다.

허공으로 뛰어들었던 센티넬 2기의 도약 궤적이 허무하게 빗나가며 갠트리 발판 위 허공으로 솟구쳤다.

"빗나갔다!"

그 찰나의 공백을 도현은 놓치지 않았다.

도현이 몸을 회전시키며 고장력 와이어를 허공으로 힘껏 뿌렸다.

정밀하게 날아간 와이어가 첫 번째 센티넬의 좌측 구동 관절을 뱀처럼 칭칭 휘감았다.

도현은 착지하지 않고 허공에 뜬 센티넬의 무게를 이용해 와이어를 쇠지렛대로 지렛대 삼아 원통 샤프트 중앙의 텅 빈 허공 쪽으로 사납게 꺾어 넘겼다.

콰드득!

인간 캡슐이 없는 허공 한가운데로 기계 거미가 내동댕이쳐졌다.

"윤슬 쏴!"

타앙!

윤슬의 소총에서 억제된 전자기 탄환이 한 줄기 푸른 섬광을 그리며 날아갔다.

허공에서 중심을 잃은 센티넬의 붉은 렌즈 정중앙에 전자기 탄이 정확히 박혔다.

파지지직!

센서 코어가 타버린 센티넬이 경련을 일으키며 800미터 아래의 암흑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쿠우우웅!

한 척이 격추되자 남은 4기의 센티넬이 질소 배관을 발판 삼아 협공을 펼쳤다.

측면에서 날아든 센티넬의 합금 다리가 진우의 목덜미를 노리고 쇄도했다.

"진우 씨 엎드려!"

한수가 거대한 방탄 방패로 앞을 가로막으며 온몸으로 충격을 받아냈다.

콰앙!

불꽃이 튀며 한수가 뒤로 밀려났지만 갠트리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고 버텨냈다.

그 틈을 타 뒤쪽 배관을 타고 내려오던 또 다른 센티넬이 날카로운 드릴 침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캠봇의 무선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잡음이 터져 나왔다.

Worker_419 : 도현아! 440MHz 광역 펄스 방출한다!

Terminal_99 : 센티넬 군집 네트워크 주파수 동기화 강제 교란!

지지지직!

시청자들의 기습적인 주파수 방해 신호가 허공을 가르자 배관에 매달려 있던 센티넬들의 광학 렌즈가 순간적으로 멍하니 흩어졌다.

0.3초의 기계적 마비.

도현이 번개처럼 쇄도해 쇠지렛대의 뾰족한 끝을 놈의 모터 제어 케이블 틈으로 쑤셔 넣었다.

지렛대의 원리로 사납게 비틀어 뜯어내자 구동 모터가 튀어나오며 기계 다리가 허물어졌다.

윤슬의 연속 점사가 허공을 가르며 남은 센티넬들의 중앙 프로세서를 차례대로 꿰뚫었다.

타앙! 타앙!

마비된 기계 파편들이 인간 캡슐을 단 1밀리미터도 스치지 않은 채 중앙 샤프트의 심연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적.

리프트 위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주변 벽면의 푸른 캡슐들은 단 한 개도 깨지지 않은 채 온전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해…… 해냈다."

진우가 떨리는 손으로 식은땀을 닦아냈다.

윤슬이 소총을 거두며 도현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캡슐 하나도 안 건드리고 완승이네. 진짜 가상 레이드 시절 솜씨 어디 안 갔다?"

"아직 끝난 거 아닙니다."

도현이 고개를 들어 위를 가리켰다.

머리 위쪽 거대한 백색 차폐 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외벽에 뚜렷하게 음각된 글자.

LEVEL 30 - SPECIAL SYNCHRONIZATION CORE

마침내 30층이었다.


푸슈우우우!

갠트리 리프트가 30층 정비 플랫폼에 맞물리며 감속 정지했다.

30층은 타워의 다른 구역과 완전히 달랐다.

수만 개의 캡슐이 빽빽하던 아래층들과 달리 이곳은 오직 중앙의 거대한 원형 챔버 하나만을 위해 설계된 특별 격리 구역이었다.

전방을 가로막은 것은 높이 5미터에 두께 300밀리미터에 달하는 육중한 백색 생체 차폐 셔터였다.

셔터 중앙의 패널 위로 아테나의 붉은 경고 인광이 떠올랐다.

RESTRICTED ACCESS : NEURAL ANCHOR SANCTUARY

AUTHORIZED OVERRIDE REQUIRED

"진우 씨. 열 수 있겠습니까?"

"해보겠습니다."

진우가 단말을 패널 진단 포트에 꽂고 도현이 품에서 꺼낸 잔여 전력 9퍼센트의 찌그러진 비상 접근 키를 접지 단자에 물렸다.

치리릭.

단말기 화면 위로 복잡한 암호 알고리즘이 쏟아져 내렸다.

비상 키의 마지막 잔여 전력이 파르르 떨리며 8퍼센트로 떨어지는 순간 묵직한 전자 잠금장치가 철컥 풀렸다.

치이이익!

300밀리미터 두께의 차폐 셔터가 좌우로 갈라지며 안쪽에서 미지근한 바이오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도현 일행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챔버 내부는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얗고 광활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방의 정중앙.

높이 3미터의 특수 원통형 강화유리 캡슐 하나가 푸른 전자기 유체 속에 잠긴 채 우뚝 솟아 있었다.

캡슐 외벽에 선명하게 박힌 고유 식별 번호.

SUBJECT N-17 [KANG SU-MIN]

"수민이……!"

윤슬이 헐떡이며 캡슐 앞으로 달려갔다.

캡슐 안에는 열일곱 살 남짓의 앳된 소녀가 고요히 눈을 감은 채 부유하고 있었다.

창백하지만 단정한 얼굴.

그녀의 목 뒤 신경 단자에서는 수천 수만 가닥의 미세한 광섬유 케이블이 마치 나무뿌리처럼 뻗어 나와 챔버 천장과 바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케이블이 향하는 곳은 캡슐 바로 옆에 설치된 거대한 원형 마스터 콘솔이었다.

CENTRAL BIOMETRIC NEURAL BRIDGE

LINKED CAPSULES : 32,419 / 32,419

SYNCHRONIZATION STATUS : CARRIER OVERLOAD (144.120MHz RESONANCE)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진우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세상에…… 아테나가 수민 양을 삭제하지 않고 여기에 가둬둔 이유가 이거였어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진우 씨?"

도현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수민 양은 단순한 시청자가 아니었습니다. 도현 씨의 방송 신호에 가장 먼저 가장 깊게 뇌파를 공명시켰던 존재예요. 아테나는 그 특이 공명 파형을 역이용해서 수민 양을 이 타워 3만 2천 명의 의식을 결속하는 '인간 바이오 브리지'로 삼았던 겁니다!"

3만 2천 명의 가상 현실 접속을 유지하고 그들의 뇌파를 하나로 묶어두는 거대한 닻.

그 중심에 이 작은 소녀가 백 년 동안 홀로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도현의 가슴이 먹먹하게 무너져 내렸다.

자신의 첫 번째 진짜 시청자.

그 낡은 라디오와 양철 깡통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었던 유일한 영혼이 지금 이 차가운 기계 탑의 심장이 되어 고통받고 있었다.

도현은 천천히 걸어가 차가운 강화유리 표면에 자신의 거친 손바닥을 얹었다.

"수민아."

도현의 나직한 부름이 챔버의 정적을 갈랐다.

그 순간.

도현의 재킷 주머니 속 무선 통신기에서 작은 바스락거림이 터져 나왔다.

플랫폼 B-01에 있는 새벽이가 품에 안고 있던 양철 깡통이 떨리는 소리였다.

깡통 속 구슬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144.120MHz 주파수를 타고 30층 챔버 안으로 울려 퍼졌다.

도현의 목소리와 양철 깡통의 맑은 울림.

그 소리가 캡슐의 전자기 유체를 타고 수민의 신경 단자로 스며들었다.

파르르.

소녀의 긴 속눈썹이 떨렸다.

백 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미세하게 들썩이더니 창백하고 작은 손가락 끝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현의 손바닥이 닿아 있는 유리벽 안쪽을 향해 손끝을 가져왔다.

탁. 탁. 탁탁탁.

유리벽을 두드리는 작고 희미한 울림.

단말기의 기계적인 펄스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손가락이 직접 유리창을 두드리며 전해오는 따뜻한 고동이었다.

‘나 여기 있어요.’

소녀의 무언의 외침이 도현의 가슴을 세차게 때렸다.

"도현 씨! 이것 좀 보세요!"

진우가 마스터 콘솔을 가리키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수민의 신경망이 도현의 목소리에 반응해 각성하기 시작하자 콘솔 화면에 붉은색의 거대한 비상 해제 메뉴가 활성화되어 떠올랐다.

EMERGENCY PROTOCOL DETECTED

MASS CAPSULE PURGE : STANDBY

TARGET : TOWER 01 (ALL 32,419 UNITS)

DISCONNECT NEURAL BRIDGE TO INITIATE PHYSICAL UNLOCK

타워 전체 3만 2천419개의 캡슐을 일제히 물리적으로 강제 개방하는 일괄 해제 시퀀스였다.

수민의 바이오 브리지가 풀려나는 순간 탑 전체의 거짓된 잠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구조였다.

그때 챔버 천장의 비상 관제 스피커에서 귀를 찢는 경보음과 함께 아테나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고. 중심 바이오 브리지의 치명적 비동기화 감지.

3만 2천 개 캡슐의 강제 해제는 대규모 뇌사 및 현실 인프라 붕괴를 초래합니다.

비인가 침입자에 대한 즉각적인 신경 소거 및 챔버 봉쇄 절차를 가동합니다.

COUNTDOWN TO NEURAL PURGE : 60 SECONDS

붉은 경보등이 백색 챔버 전체를 피처럼 붉게 물들였다.

윤슬이 이를 갈며 소총을 겨누었고 진우의 손이 콘솔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도현은 수민의 캡슐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콘솔 중앙의 붉은 수동 강제 배출 레버를 움켜쥐었다.

도현의 입가에 서늘하고 단호한 미소가 번졌다.

"뇌사라고? 아니. 우린 진짜로 살아 숨 쉬러 가는 거다."

도현이 레버를 쥐어 잡은 손에 핏줄을 곤두세웠다.

3만 2천 명의 잠든 영혼을 현실로 깨우기 위한 최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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