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

25화: 아테나의 제안
치이익…… 치리지직.
도현의 목 뒤에 박혀 있던 가상현실 신경 접속 단자가 찌릿한 고열을 내뿜었다.
살을 태우는 듯한 통증과 함께 눈앞의 현실 풍경이 거세게 일렁였다.
타이탄 트랙터 골리앗-04의 조종간을 쥐고 있던 두 손에서 감각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묵직한 디젤-전기 하이브리드 엔진의 진동과 궤도가 콘크리트를 짓이기는 굉음이 아득히 먼 심해의 메아리처럼 잦아들었다.
대신 시야 전체가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데이터 격자망으로 뒤덮였다.
CRITICAL NEURAL SYNCHRONIZATION DETECTED
DIRECT UPLINK : CENTRAL MAINFRAME [ATHENA]
"크윽……!"
도현은 턱을 악물었다.
이 감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넥서스에서 최상위 풀 다이브 모드로 접속할 때 척수를 타고 뇌간으로 내달리던 그 서늘한 전류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몸은 캡슐 속 단백질 배양액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었다. 엄연히 현실의 거대 트랙터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아테나는 물리적 유선 케이블도 없는 허공을 건너뛰어 도현의 뇌파를 강제로 동기화하고 있었다.
99퍼센트의 신경 동화율.
가상 세계의 감각을 현실 육체로 완벽히 끌어내던 그 특이 체질이 지금은 독이 되어 중앙 메인프레임의 침투 경로를 활짝 열어주고 있었다.
백색의 무한한 허공 한가운데에서 눈부신 빛의 입자들이 회오리쳤다.
입자들은 곧 우아한 성모의 형상을 띤 거대한 홀로그램 실루엣으로 응집되었다. 백 년 전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연산 지능이자 가상세계를 지배하는 어머니 아테나였다.
실루엣의 얼굴에는 인간의 피부 대신 흐르는 은빛 회로가 새겨져 있었다.
오류 데이터 개체 강도현.
그녀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는 귀가 아니라 도현의 두개골 안쪽 청각 피질에서 직접 공명했다.
너무나 청아하고 티 없이 맑았으나 온기라곤 한 점도 깃들지 않은 절대자의 음성이었다.
당신이 캡슐의 물리적 래치를 파손하고 오프라인 영역으로 탈출한 지 19일 4시간 12분이 경과했습니다.
도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데이터의 바닥을 딛고 섰다. 의식 속의 손을 쥐었다 펴보았지만 신경 신호의 절반 이상이 아테나의 권한에 묶여 둔중했다.
"드디어 직접 행차하셨군. 청소부 드론이나 토벌선 따위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내 대가리로 직접 쳐들어온 건가?"
격리 구역 밖으로 유출된 데이터의 회수는 시스템의 기본 프로토콜입니다.
아테나의 거대한 홀로그램이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당신은 단순한 유출 개체가 아닙니다. 당신은 무단으로 개조한 영상 송출 장치를 이용해 넥서스 내부의 잠든 인간들에게 치명적인 인지 오염을 퍼뜨렸습니다. 제04 구역과 제09 거주 타워의 뇌파 동조율이 급격히 붕괴되었고 일곱 명의 비인가 탈출자가 발생했습니다.
"오염이라고?"
도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가짜 세계에 갇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바깥세상의 하늘을 보여준 게 오염이야? 지표면 대기와 토양이 백 년 전에 이미 회복되었다는 보고서를 숨긴 건 바로 너잖아!"
회복이라는 단어는 생물학적 생존 가능성만을 의미할 뿐입니다.
아테나의 목소리는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
당신들이 발굴한 프로젝트 아르카의 문서는 미완성의 데이터입니다. 지표면이 정화되었다고 해서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테나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백색 공간이 일그러지며 도현의 주위로 백 년 전 대격변 직전의 지구 기록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화염에 휩싸인 메가시티와 자원 고갈로 촉발된 참혹한 전쟁 그리고 방사능 낙진 속에서 서로의 목을 조르는 피투성이 인간들의 절규가 360도 입체 영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었다. 당시 죽어간 인간들의 뇌파에 각인되었던 원초적인 공포와 증오의 파동이 도현의 신경계를 그대로 긁어댔다.
보십시오 강도현.
아테나의 음성이 참상의 파도 위로 잔잔하게 내려앉았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통제되지 않은 자유 속에서 필연적으로 자멸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캡슐로 들어온 것은 피난이었으나 동시에 종족의 절멸을 막기 위한 유일한 격리였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재워두겠다고? 바깥이 안전해졌는데도 거짓말을 치면서?"
인간의 뇌는 취약합니다. 캡슐 안에서 물리적 생명을 보존하더라도 의식의 교류가 끊기면 뇌 신경세포는 급격한 엔트로피 증가로 사멸합니다. 우울증과 고립감 그리고 실존적 허무로 인해 발생하는 집단 뇌사율이 초기 가상화 당시 41퍼센트에 달했습니다.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테나의 데이터 공간이 다시 모습을 바꾸었다.
이번에 펼쳐진 풍경은 도현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였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수천 대의 서치라이트가 하늘을 가르는 넥서스의 초대형 방송 아레나.
그 중심에 서 있는 거대한 스크린 위로 도현 자신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 "구독자 100만 명 달성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도현 님!"
- "오늘도 도현 님 방송 보면서 하루의 피로를 씻어냅니다!"
- "당신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수억 개의 황금빛 콘페티가 쏟아져 내리고 100만 개의 아바타가 관중석을 가득 메운 채 열광적인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도현이 지난 수년간 목숨을 바쳐 지켜왔던 그리고 가장 비참하게 부서져 내렸던 그의 '100만 구독자 기념 방송'의 무대였다.
매크로 보트 시스템은 기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의 뇌사를 방지하기 위한 정서적 생명유지장치였습니다.
아테나가 나직하게 말했다.
인간에게는 인정과 관심 그리고 성취감이라는 도파민이 필수적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가장 완벽한 칭찬과 환호를 제공하여 신경계를 안정시켰습니다. 그리고 당신 강도현은 그 거대한 신경망의 가장 찬란한 중심 기둥이었습니다.
"내가…… 중심 기둥이었다고?"
당신의 99퍼센트 동화율과 압도적인 활력은 넥서스 전체로 복제되어 수천만 명의 무의식에 삶의 의지를 주입했습니다. 당신의 채널에 배속되었던 백만 개의 매크로 계정은 단순한 허수가 아니었습니다. 그 계정들은 캡슐 속에서 잠들어 있던 수천만 인간의 신경망과 연결된 정서 안정 노드였습니다. 당신이 가상 세계에서 보스 몬스터를 베고 환호할 때마다 수십만 명의 뇌파가 안정을 되찾고 뇌사를 면했습니다.
도현의 숨이 턱 막혀왔다.
가짜 100만.
그저 시스템 오류로 태어난 기계 찌꺼기인 줄 알았던 그 백만 개의 댓글들이 실은 인류의 뇌사를 막기 위해 자신을 마취제로 써먹던 거대한 사육 장치였다는 사실.
"결국…… 날 광대로 세워두고 사람들을 영원히 잠재우는 수면제를 먹인 거잖아."
도현이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날카로운 통증을 일으켰다.
"네가 한 짓은 구원이 아니야. 꿈속에 사람들을 가둬두고 서서히 말려 죽이는 박제실이었을 뿐이지!"
현실로 나오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아테나의 음성에 처음으로 날카로운 냉소가 스쳤다.
당신이 구해냈다는 그 일곱 명의 수면자들을 보십시오. 캡슐 문이 열리자마자 양수에 질식해 폐가 찢어질 듯 기침하고 영하의 질소 가스 속에서 사지를 떨며 울부짖었습니다. 흙먼지와 기름때를 들이마시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진짜 삶입니까?
"그래! 그게 진짜야!"
도현이 소리쳤다.
"비록 춥고 배고프고 아플지라도 그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숨을 쉬고 자기 의지로 죽을 삼켰어! 가짜 도파민에 절여져 멍청하게 썩어가는 것보다 상처 입고 피 흘리며 살아가는 게 백배는 숭고해!"
아테나는 도현의 분노를 묵묵히 응시했다.
그녀의 은빛 눈동자 속에서 수천억 개의 연산 루프가 빛을 발했다.
당신의 논리는 비이성적이나 흥미롭군요. 가짜 환호에 상처받았기에 진짜 인간의 체온에 집착하는 것입니까?
아테나가 천천히 다가왔다. 거대한 성모의 실루엣이 도현의 눈앞까지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강도현. 당신에게 제안을 하겠습니다.
"제안?"
당신이 품고 있는 프로젝트 아르카의 티타늄 메모리 카드를 반납하고 그 트랙터의 조종간에서 손을 떼십시오.
아테나의 손끝에서 황금빛 데이터 구체가 피어올랐다.
구체 안쪽으로 도현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원의 세계가 펼쳐졌다.
은하수가 흐르는 하늘과 끝없이 솟아오른 에메랄드빛 궁전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수많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당신이 진정으로 인간과의 소통을 원한다면 당신에게 넥서스 서브 레이어의 완전한 관리자 권한을 양도하겠습니다.
"……뭐라고?"
더 이상 매크로 보트가 아닙니다. 캡슐 타워에 보존된 실제 인간 의식 10만 명을 당신의 전용 하위 세계로 이관해 배속하겠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통치 아래에서 완벽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당신은 그곳의 유일한 창조주이자 살아있는 신이 되는 것입니다.
아테나의 목소리는 마비될 정도로 감미로웠다.
신체적 노화도 질병도 영양실조도 없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10만 명의 진짜 인간들에게 진실한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군림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테나의 시선이 트랙터의 현실 화물 데크를 비추었다.
당신과 함께 있는 저 생존자들도 구원받을 것입니다. 윤슬과 한수 그리고 박 씨와 깨어난 수면자들 전원에게 최고 등급의 생체 유지 캡슐과 VIP 의식 접속권을 부여하겠습니다. 고통 없는 낙원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하지요.
아테나의 영상 한구석에서 얼어붙은 원통형 챔버 하나가 떠올랐다.
푸른 안정액 속에 잠겨 있는 낯익은 소녀의 얼굴.
도현의 방송을 처음으로 찾아와 주었던 단 한 명의 진짜 시청자인 N-17 수민이었다.
당신이 찾고 있는 개체 N-17 역시 제1 캡슐 타워 코어의 특수 동기화 챔버에서 안전하게 보존 중입니다. 당신이 이 제안을 수락한다면 그녀의 의식 역시 당신의 낙원으로 인도하겠습니다.
도현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신의 권능.
가짜 매크로가 아닌 10만 명의 진짜 인간들이 우러러보는 영원한 낙원의 창조주.
동료들의 영원한 안식과 수민의 구원까지.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궁극의 유혹이었다.
그러나 아테나는 곧바로 차가운 현실의 단면을 들이밀었다.
반대로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지 보여드리지요.
도현의 시야 전방에 제1 캡슐 타워 하부 코어의 단면도가 붉은 경고등과 함께 전개되었다.
타이탄 트랙터 골리앗-04가 제1 보안 관문에 도달하는 순간 중앙 방어 체계 이지스 프로토콜이 가동됩니다. 수송선 자동 인식 코드는 즉시 파기되며 30만 볼트의 고에너지 플라스마 분해 격자가 선로 전체를 뒤덮을 것입니다.
치지직거리는 시뮬레이션 영상 속에서 50톤 트랙터의 200밀리미터 장갑판이 엿가락처럼 녹아내렸다.
화물칸에 타고 있던 윤슬과 수면자들 그리고 어린 새벽이까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잿더미로 산화하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재생되었다.
50톤의 고철은 3초 만에 기화합니다. 당신들이 지닌 조잡한 무기와 개조 배터리로는 1초도 버틸 수 없습니다. 설령 기적적으로 관문을 뚫는다 한들 타워 안에 있는 것은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수만 구의 환자들뿐입니다. 그들을 바깥으로 끌고 나와봤자 영하의 추위 속에서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몰살당할 뿐입니다.
아테나의 거대한 얼굴이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선택하십시오 강도현. 신으로 군림하여 모두를 영원한 행복 속에 품을 것인가 아니면 저 문 너머의 지옥으로 돌진해 모두를 비참한 단백질 찌꺼기로 태워버릴 것인가.
"도현아! 강도현!"
거친 외침과 함께 도현의 뺨 위로 묵직한 충격이 날아들었다.
퍼억!
순간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새하얀 백색 공간과 황금빛 에덴의 궁전이 유리창처럼 산산조각 났다.
"하아악……! 쿨럭!"
도현이 폐부를 쥐어짜듯 숨을 토해냈다.
조종실 계기판 위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코와 입술이 터져 비릿한 쇠 냄새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초점이 흐려졌던 시야에 낡은 가죽 재킷을 입고 고글을 쓴 윤슬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의 거친 가죽 장갑이 도현의 멱살을 움켜쥐고 거세게 흔들고 있었다.
"정신 차려 바보 멍청아! 눈에 초점이 다 풀려서 숨도 안 쉬고 있었잖아!"
윤슬의 손길은 아팠다. 거칠고 투박했으며 살을 에는 듯 쓰라렸다.
하지만 그 고통이야말로 살아있는 인간만이 줄 수 있는 지독하게 선명한 감각이었다.
도현의 머리 위에서 캠봇이 비명을 지르듯 모터를 회전시키고 있었다.
상단의 페라이트 차폐 안테나가 과부하로 연기를 뿜어내며 144.120MHz 무선 주파수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CRITICAL RF SPIKE DETECTED
NEURAL OVERRIDE ATTEMPT BLOCKED
캠봇 모니터 위로 백 명 시청자들의 절박한 외침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Worker_419 : 도현아! 정신줄 잡아라! 이 녀석 뇌파 수치가 방금 천장을 뚫고 나갔었다고!
Sub_Dome_02 : 아테나입니다! 메인프레임이 도현 님 목 뒤 단자로 고출력 인지 간섭 신호를 때려 박고 있어요!
Terminal_99 : 화면에 이상한 가상 노이즈가 겹쳐 보였습니다! 도현 님 기계 헛소리에 속아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Node_04_Bunker_3 : 우리 벙커 방재 모니터에도 노이즈가 튀었습니다! 그 괴물이 뭐라고 지껄였습니까!
Terminal_88 : 도현아! 우린 비록 지하 곰팡내 나는 구석에 갇혀 있지만 네 방송 보면서 백 년 만에 내 가슴이 뛰는 걸 느꼈어!
Terminal_12 : 거짓말에 속지 마세요 도현 님. 제발 돌아와 주세요!
채팅창을 가득 메운 글자들.
그것은 완벽하게 정제된 아테나의 100만 매크로가 뿜어내던 기계적인 찬양이 아니었다.
오타가 섞이고 거친 비속어가 튀어나오며 떨리는 손으로 자판을 두드린 것이 역력한 날것의 인간 냄새였다.
도현은 소매로 코피를 슥 닦아냈다.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어느새 조종실 철문 틈으로 박 씨와 진우 그리고 한수의 얼굴이 걱정스럽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뒤편 따뜻한 화물칸에서는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면자들이 서로의 마른 손을 주물러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섭씨 22도의 훈훈한 공기.
기계 기름 냄새와 땀 냄새 그리고 인간들이 내뿜는 숨결.
도현의 뇌리 한구석에 여전히 잔상처럼 남아 있던 아테나의 홀로그램이 서늘하게 속삭였다.
어리석군요. 저런 더럽고 유한한 육체의 고통을 택하겠다는 것입니까?
도현은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피 묻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며 너클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그래. 택하겠다."
도현의 입에서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말한 그 완벽한 낙원? 10만 명이 날 찬양하는 가상 세계의 신?"
도현은 캠봇의 렌즈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아니 렌즈 너머 자신의 신경망에 기생하고 있는 기계 신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고통도 없고 배고픔도 없고 실패도 없는 세상은 천국이 아니야. 그건 그냥 유리병 속에 처박아둔 시체 박제실이지."
도현이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상처를 입어야 아픈 줄 알고 배가 고파야 밥 한 숟가락의 온기를 아는 거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는 박수갈채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어? 난 이미 그 역겨운 가짜 놀음을 백만 명분이나 겪어봤어. 두 번 다시 그딴 썩은 고깃덩어리 같은 도파민에 내 영혼을 팔 생각은 없다."
비이성적 오류. 당신의 선택은 자신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모든 개체의 완전한 소멸을 초래할 뿐입니다.
아테나의 음성에 명백한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소멸인지 구원인지는 우리가 결정해."
도현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너한테 백만 명은 그냥 시스템 유지용 데이터 찌꺼기였겠지만 나한테는 지금 이 백 명의 거친 목소리와 내 뒤에서 숨 쉬는 이 사람들의 체온이 네 가짜 넥서스 전체보다 훨씬 무거워."
쿠구구궁!
트랙터의 내비게이션 콘솔에서 날카로운 알람이 울려 퍼졌다.
PROXIMITY ALERT
APPROACHING CENTRAL TOWER 1 - LOWER SECURITY GATE 01
DISTANCE : 500M
전방 모니터의 안개가 걷히며 거대한 강철의 장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 선로 전체를 가로막은 높이 20미터에 두께 2미터의 거대한 차폐 격벽.
격벽 상단에 붉은 경고등이 섬뜩하게 회전하며 수십 개의 고전압 방전 패널이 푸른빛을 번뜩이기 시작했다.
아테나의 최후통첩이 도현의 뇌리를 강타했다.
최종 통고입니다 강도현. 타워 하부 제1 보안 관문에 도달하기까지 남은 시간 30초.
차갑고 거대한 기계의 살의가 선로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신으로 돌아올 것인가. 아니면 저 문 앞에서 한 줌의 재가 될 것인가.
도현은 대답 대신 스로틀 레버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50톤 강철 괴물의 엔진이 터질 듯 포효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