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

20화: 동시 접속자 100명
제04-C 생체 보관 돔을 빠져나온 일행은 서둘러 배수 암거로 돌아왔다.
도현과 윤슬은 엔지니어 김진우를 부축했고 한수와 생존자들도 갓 깨어난 여섯 명의 수면자들을 업거나 안은 채 터널 깊숙이 옮겼다.
"이쪽입니다! 바닥에 기름때가 덜 묻은 자리로 눕혀요!"
미라가 손전등을 비추며 달려 나왔다. 늙은 정비공 박 씨가 폐차 시트에서 뜯어낸 스펀지와 모포로 바닥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새벽은 양철 깡통을 품에 안은 채 커다란 눈망울로 사람들을 맞이했다.
"진우 씨, 천천히 앉으세요. 벽에 기대고."
도현이 진우의 등을 받치며 콘크리트 벽에 앉혔다.
진우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배양액에 젖은 환자복이 살갗에 달라붙어 있었고 오랫동안 굳어 있던 손가락은 마비되어 펴지지 않았다.
"저체온증이 심해요. 입술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미라가 트럭 배터리에 열선 코일을 연결해 데운 미온수를 건넸다. 박 씨는 거친 손으로 진우의 어깨에 두툼한 솜이불을 둘러주었다.
"고생들 했다. 산 송장 꼴로 누워만 있다가 찬바람 맞았으니 뼈마디가 녹아내릴 것 같겠지. 조금만 참아라. 우리도 다 그렇게 기어 나와서 버텼다."
노인의 손은 거칠었지만 전해지는 체온은 뜨거웠다. 진우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져 모포를 적셨다.
"진짜…… 사람이군요."
진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넥서스에서는 손을 잡아도 촉각 피드백 신호만 지직거렸는데. 이 손은…… 정말로 따뜻해요."
함께 구출된 이들도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흐느꼈다. 기계의 살균 가스가 아닌, 땀과 기름 냄새가 밴 살아있는 온기 속에서 그들은 비로소 숨을 쉬고 있었다.
위이잉.
도현의 어깨 위로 날아오른 캠봇의 전면 렌즈가 푸른빛을 깜빡였다. 144.120MHz 아날로그 우회 주파수가 암거 내부를 가르며 신호를 송출하고 있었다.
도현이 모니터를 확인했다.
CURRENT VIEWERS : 7
돔 안에서 처음 기록되었던 숫자 7이 깜빡이더니 이내 요동쳤다.
CURRENT VIEWERS : 12
CURRENT VIEWERS : 19
"숫자가 올라갑니다!"
한수가 놀란 눈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도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가상 세계에서 100만이라는 숫자를 볼 때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한 자리씩 늘어나는 이 숫자는 캡슐 속에서 누군가 눈을 뜨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있다는 증거였다.
"제04구역 완충선에는 폐쇄된 구시대 피난 벙커랑 보관소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진우가 굳은 턱을 움직이며 말했다.
"도현 님의 방송이 외곽 비상 방재망을 타고 번져나가고 있는 겁니다. 잠들어 있던 단말기들이 신호를 잡고 있어요."
쿠구구궁!
배수 암거 천장을 울리는 묵직한 진동과 함께 벽면을 타고 흙먼지가 쏟아졌다.
삐-이익! 찌르르르!
캠봇의 수신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노이즈가 터져 나왔다. 화면 속 영상이 일그러지며 푸른 데이터 선들이 찢겨 나갔다.
WARNING : HIGH-POWER RF JAMMING DETECTED
CARRIER SIGNAL DEGRADATION : 78%
ATHENA CLASS-B SUPPRESSION PULSE ACTIVE
"기계 놈들이 전파를 덮어버리고 있어!"
윤슬이 탄환 없는 소총을 낚아채며 천장을 노려보았다.
상공에서 거대한 반중력 엔진의 저주파 울림이 지면을 뒤흔들었다. 아테나 중앙 통제망이 외곽 돔의 연쇄 탈출을 Class-B 사태로 규정하고 광역 노이즈 펄스를 방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모니터 속 시청자 수가 급격히 곤두박질쳤다.
CURRENT VIEWERS : 9
CURRENT VIEWERS : 4
"신호가 끊겨요! 증폭 회로가 과열되고 있습니다!"
미라가 외쳤다. 캠봇 하단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상 현실 넥서스로 향하는 통로가 닫힐 위기였다.
이대로 방송이 꺼지면 도현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나려던 이들이 다시 깊은 강제 동면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안 돼…… 끊기면 안 됩니다."
도현이 이를 악물며 캠봇을 움켜잡았다. 비상 접근 키를 쥐어보았으나 잔여 전력 11퍼센트로는 고출력 재밍을 뚫을 수 없었다.
그때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진우가 무릎으로 기어 나왔다.
"도현 님! 벽 쪽을 보세요! 저기 녹이 슨 배전함을요!"
진우의 손가락이 암거 한구석에 파묻힌 낡은 금속 단자함을 가리켰다.
"백 년 전 대격변 직전에 묻어둔 구시대 민방위 비상 유선 통신 트렁크입니다! 무선 전파가 아니라 두꺼운 구리선과 동축 케이블로 지하 깊숙이 매설된 물리 회선이에요!"
"물리 회선?"
"아테나의 전파 재밍은 허공의 무선 신호만 교란할 뿐입니다. 지하 구리선까지는 간섭할 수 없어요! 저 트렁크에 캠봇 출력 단자를 결선하면 외곽 전역의 수신 모니터로 방송을 쏠 수 있습니다!"
"박 씨 아저씨! 쇠지렛대랑 공구함 가져와요!"
도현의 외침에 박 씨가 쇠지렛대로 단자함 덮개를 후려쳐 뜯어냈다. 내부에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굵은 구리선과 동축 단자가 엉켜 있었다.
진우가 마비된 손을 떨며 분통을 터뜨리자 도현이 그의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진우 씨, 설명만 해주십시오. 손은 제가 움직이겠습니다."
도현은 캠봇에서 송출선 두 가닥을 뽑아내고 비상 접근 키를 꺼냈다.
"중앙의 굵은 접지선과 7번 동축 단자입니다! 트럭 배터리 전원을 12볼트로 감압해서 중간 브리지에 걸어야 해요!"
진우의 정확한 지시 속에서 도현의 손놀림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가상 세계 최상위 랭커로서 갈고닦았던 미세 컨트롤 감각이 손가락 끝으로 출력되었다. 피복을 벗겨내 동축 단자에 감고 비상 접근 키의 잔여 11퍼센트 증폭단을 브리지로 물린 뒤 배터리를 접촉시켰다.
파지지직!
푸른 스파크가 튀며 암거 벽면을 밝혔다. 구식 계전기가 묵직하게 맞물려 돌아갔다.
철컥! 위이이잉-!
캠봇의 노이즈가 단숨에 씻겨 나갔다.
ANALOG TRUNK LINE LINKED : SUCCESS
BYPASSING RF JAMMING VIA UNDERGROUND COAXIAL MESH
OUTPUT POWER BOOSTED : 340%
지하 암거에 묻혀 있던 백 년 전의 구리선들이 깨어났다. 캠봇의 144.120MHz 신호가 땅속 깊은 곳을 관통하며 외곽 벙커들과 거주 타워의 비상 모니터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치직, 치지직.
캠봇 모니터 위에 꺼져가던 푸른 창이 다시 활짝 열렸다.
CURRENT VIEWERS : 28
CURRENT VIEWERS : 47
CURRENT VIEWERS : 63
숫자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그것은 단순한 숫자의 증가가 아니었다. 텍스트 수신 버퍼 위로 글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상 세계 넥서스에서 도현을 둘러싸고 있던 매크로들의 정형화된 댓글이 아니었다. '도현 님 멋져요!' 따위의 공허한 찬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Node_04_Bunker_3 : 진짜 사람입니까? 밖에서 말하고 있는 겁니까?
Sub_Dome_02 : 방금 돔 안으로 파란 가스가 들어왔습니다. 환풍기를 거꾸로 돌리라는 게 사실인가요?
Terminal_88 : 비가 온다고요? 흙탕물이 튄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Worker_419 : 진우야! 402호 김진우 맞냐? 살아있냐고!
오타가 섞이고 띄어쓰기가 엉망인 투박한 문장들. 글자마다 공포와 의문,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진우가 화면을 보자마자 모니터 앞으로 몸을 던졌다.
"성태 형님! 나 진우예요! 나 살았습니다!"
진우가 마이크를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나 지금 밖으로 나왔습니다! 캡슐 덮개 열고 나왔어요! 형님, 내 말 들리면 레버 당겨요! 아테나 말 듣지 말고 그냥 당겨요!"
진우의 외침이 지하 유선망을 타고 피난 벙커들로 메아리쳤다. 화면 속 글자들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Sub_Dome_02 : 환풍 체인을 당겼습니다! 가스가 빠져나갑니다! 숨이 쉬어져요!
Node_04_Bunker_3 : 나도…… 레버에 손을 얹었습니다. 진짜 바깥에 사람이 있는 거죠?
Terminal_12 : 제발 얼굴을 보여주세요.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주세요.
도현은 가슴을 쥐어짰다. 그는 캠봇 앞으로 다가섰다. 흙먼지가 묻은 얼굴, 찢어진 입술, 상처투성이인 손을 그대로 렌즈 앞에 비췄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도현의 목소리가 방송망을 울렸다.
"저는 넥서스에서 100만 구독자를 거느렸던 스트리머 강도현입니다. 하지만 그 백만 명은 전부 가짜였습니다. 저는 차가운 유리 관 속에서 홀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도현은 뒤를 돌아 생존자들을 비췄다. 윤슬이 다가와 도현의 곁에 섰다.
"이 사람은 윤슬입니다. 가상 세계가 아니라 이 거친 땅에서 살아남은 진짜 사람입니다."
박 씨가 렌치를 든 채 다가왔고 미라와 새벽도 모포를 든 채 카메라를 응시했다.
"정비공 박 씨 아저씨, 미라 씨, 아이 새벽이, 그리고 방금 구출된 김진우 씨와 동료들도 여기 함께 있습니다."
도현이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들리십니까? 우리는 지금 폐허가 된 배수 터널에 숨어 있습니다. 춥고 축축합니다. 갈비뼈는 부러질 듯 아프고 흙탕물 냄새가 진동합니다."
도현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그을음을 씻어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있습니다. 기계가 먹여주는 환각 속에서 잠든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누며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의 심장이 뛰고 있다면 레버를 당기십시오!"
윤슬이 소총을 번쩍 치켜들며 외쳤다.
"우리가 데리러 간다! 조금만 버텨라!"
그 순간 캠봇 모니터 계기판이 거대한 빛을 뿜어냈다.
삐-비비빅!
CURRENT VIEWERS : 79
CURRENT VIEWERS : 88
CURRENT VIEWERS : 95
숫자가 거침없이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치직 하는 맑은 기계음과 함께 선명한 세 자리 숫자가 모니터 중앙에 새겨졌다.
CURRENT VIEWERS : 100
화면 가득 100개의 생체 신호 그래프가 떠올랐다.
서로 다른 벙커와 캡슐에서 도현의 방송을 지켜보고 있는 100명의 인간들이 내뿜는 심박수와 호흡 그래프였다. 붉고 푸른 파동들이 실시간으로 요동치며 하나의 거대한 맥박처럼 고동쳤다.
Node_04_Bunker_3 : 울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울고 있어요.
Sub_Dome_05 : 살아서 만납시다. 꼭 살아서 만납시다 도현 씨.
Terminal_99 :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화면 너머에서 100명의 사람들이 도현의 말 한마디에 함께 울고 함께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도현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가상 현실에서 100만 명이 쏟아내던 수천만 개의 하트 앞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그 100만이라는 숫자는 그를 한없이 외롭게 만들었지만 지금 눈앞의 100이라는 숫자는 온몸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100명……."
도현이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짜 100명이야."
가짜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영혼이 마침내 온전한 구원을 얻는 순간이었다.
삐-이익.
그 감격의 순간 캠봇 모니터 심층 패킷 감시창에서 특이한 주파수 코드가 번쩍였다.
SYSTEM RECOGNITION ALERT
ENCRYPTED SESSION KEY : USER N-17 (SUMIN)
SIGNAL ORIGIN : CENTRAL CITY - RESIDENTIAL TOWER 01 CORE
NEURAL ACTIVITY : SUBCONSCIOUS DESYNCHRONIZATION DETECTED
"N-17……?"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07 아카이브의 좌표를 전해주고 강제 수면 모드에 들어갔던 첫 번째 시청자 N-17의 세션 신호였다.
중앙 도시 제1 캡슐 타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도현의 100명 동시 접속 방송에 반응해 N-17의 잠재의식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차가운 중앙 탑 어둠 속에서 여전히 도현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콰아아앙!
그때 배수 암거 상공을 찢는 굉음과 함께 환기창 틈새로 눈부신 서치라이트가 쏟아져 들어왔다.
푸른 섬광이 터널 내부를 대낮처럼 밝혔다. 아테나 중앙 직할 정규 토벌대의 비행 수송선이 마침내 제4구역 완충선 상공에 도달한 것이었다.
윤슬이 탄환 없는 소총을 고쳐 매며 이를 갈았다.
"사냥개들이 냄새를 맡았어. 더 이상 여긴 안전하지 않아."
도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에는 두려움 대신 서슬 퍼런 투지가 서려 있었다.
화면 속에 살아 숨 쉬는 100명의 시청자들을, 그리고 중앙 타워에서 희미하게 깜빡이는 N-17의 신호를 응시했다.
"도망치지 않습니다."
도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제 숨을 곳을 찾는 게 아닙니다. 저 탑으로 갈 겁니다."
도현은 캠봇 렌즈를 바라보며 100명의 진짜 인간들을 향해 선언했다.
"시청자 여러분, 채널을 고정하십시오. 우리가 중앙 도시로 진군합니다. 당신들이 있는 곳까지 전부 뚫고 가겠습니다."
도현의 선언과 함께 일행은 100명의 심장 소리를 등에 업고 중앙 도시를 향한 거대한 진군의 길 위로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