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

19화: 깨어나는 시청자들
정비소의 불타버린 마당을 뒤로하고 일행은 북쪽 배수 암거로 들어섰다.
축축한 콘크리트 벽면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폐자재로 엮은 손수레 위에는 잔해에서 건져 올린 트럭 배터리와 공구함들이 실려 있었다.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가 어두운 터널 안을 낮게 울렸다.
"발밑 조심해. 깨진 타일이랑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많아."
윤슬이 탄환 없는 소총을 메고 선두에서 손전등을 비췄다.
그 뒤로 늙은 정비공 박 씨와 한수가 수레를 밀며 나아갔다.
부상자들은 서로의 어깨를 겯고 걸었고 미라는 새벽의 손을 잡은 채 대열을 살폈다.
도현은 대열 중앙에서 걸음을 옮기며 어깨 위로 떠 있는 캠봇을 주시했다.
갈비뼈 부근의 통증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를 찔렀지만 멈출 수 없었다.
캠봇 상단의 붉은 표시등은 144.120MHz 주파수를 송출하고 있었다.
마당에서 토해냈던 생방송의 울림이 가상 네트워크의 심층 버퍼를 타고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치지지직.
그때 캠봇의 수신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노이즈가 터져 나왔다.
도현이 걸음을 멈추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EMERGENCY BUFFER ALERT
PACKET SOURCE : DISTRIBUTED LIFE SUPPORT DOME 04-C
SIGNAL TYPE : PHYSICAL OVERRIDE / MANUAL DE-STASIS
LOCATION : 800M NORTH-WEST (INDUSTRIAL SECTOR BUFFER ZONE)
화면 가득 붉은색 경고창이 깜빡였다.
물리적인 비상 레버가 당겨졌을 때 발생하는 생체 캡슐 강제 탈출 신호였다.
"윤슬 씨, 멈춰봐요."
도현의 부름에 윤슬이 손을 들어 대열을 멈췄다.
"북서쪽 800미터 지점입니다. 분산 생체 보관 돔 04-C 구역에서 수동 해제 경보가 떴어요."
도현이 모니터를 돌려 보여주었다.
윤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04-C 구역……? 백 년 전 대격변 초기에 노동자들을 임시 수용했던 외곽 보관소잖아."
"그곳의 캡슐 덮개가 열리고 있습니다. 일곱 개가 넘어요."
도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폐허 마당에서 송출했던 방송.
"눈을 뜨십시오. 그리고 살아남으십시오!"
그 외침이 방화벽을 뚫고 들어가 캡슐 속 인간들의 무의식을 흔들어 깨운 것이었다.
그때 모니터 하단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CENTRAL AI ATHENA : LOCAL SECURITY PROTOCOL
ANOMALOUS MASS DESYNCHRONIZATION CONFIRMED
NEURO-SEDATIVE GAS PURGE SCHEDULED : 04 MIN 30 SEC
"신경 진정 가스……?"
한수가 눈을 크게 떴다.
"강제 탈출을 오류로 판정하고 다시 잠재우려는 겁니다."
도현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자신이 캡슐 밖으로 처음 떨어져 나왔을 때의 고통이 떠올랐다.
사지의 마비와 생체 양수의 비릿함.
도현은 99퍼센트의 신경 동화율 덕분에 스스로 일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오랫동안 누워만 있던 근육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마비되어 있다.
그 상태에서 신경 가스를 마신다면 호흡 곤란으로 영구 뇌사에 빠지거나 폐기 처리될 터였다.
"놔두면 다 죽어요."
미라가 창백해진 얼굴로 새벽의 손을 쥐었다.
윤슬이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지금 부상자들도 있고 탄환도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시선은 이미 북서쪽 통로를 향하고 있었다.
"윤슬 씨."
도현이 말했다.
"우리가 방금 마당에서 뭐라고 외쳤습니까? 거짓 세계를 부수고 진짜 삶을 되찾자고 했습니다. 그 말을 믿고 스스로 캡슐을 깬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로 눈을 뜬 시청자들을 가스실에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정비공 박 씨가 쇠지렛대를 바닥에 쿵 찍었다.
"맞는 말이다. 살아났더니 다른 놈들 죽는 꼴을 모른 척하면 그게 산 송장이지 인간이겠냐? 윤 대장, 다녀와라. 여긴 우리가 지킨다."
윤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수, 미라! 수레는 은닉해. 도현, 앞장서!"
배수 암거를 빠져나오자 무너진 공장 한가운데 솟은 반구형 콘크리트 돔이 나타났다.
제04-C 분산 생체 보관 돔.
외벽에는 붉은 녹이 흘러내렸고 환기구에서는 주황색 비상 신호 연기가 피어올랐다.
삐-용! 삐-용!
귀를 찢는 사이렌이 울렸다.
도현과 윤슬, 한수가 녹슨 비상 출입구로 달려들었다.
도어락은 수동 해제 충격으로 이미 타버려 있었다.
"비켜봐!"
한수가 어깨로 문짝을 들이받았고 도현이 쇠지렛대로 틈새를 젖혔다.
끼이익! 쾅!
철문이 열리며 돔 내부의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푸른 비상등 아래 수십 대의 생체 캡슐이 늘어서 있었다.
그중 대여섯 대의 덮개가 열려 있었고 바닥은 쏟아져 나온 배양액으로 흥건했다.
"쿨럭! 컥…… 컥!"
"도…… 도와줘요……."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환자복 차림의 창백한 남녀들이 젖은 바닥을 기어 다니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근육이 굳어 목조차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
치이익!
천장 환기 덕트 노즐에서 푸른 연무가 분사되기 시작했다.
신경 진정 가스였다.
가스가 바닥으로 내려앉자 기침을 토하던 수면자들의 눈동자가 풀려갔다.
동시에 천장 레일을 타고 붉은 센서를 번뜩이는 기계 유닛 두 기가 하강했다.
매니퓰레이터와 고압 소독 분사기를 장착한 위생 진압 드론이었다.
드론의 스피커에서 무미건조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UNAUTHORIZED BIOLOGICAL AWAKENING DETECTED
INITIATING RE-STASIS PROCEDURE
드론의 끝에서 유압 주사 바늘이 튀어나왔다.
신경을 강제로 마비시키는 형광색 약물이 차올랐다.
드론 하나가 떨고 있는 청년을 향해 주사 바늘을 내리찍으려던 찰나였다.
"건드리지 마!"
윤슬이 달려들어 빈 소총 개머리판으로 드론의 측면 센서를 후려쳤다.
깡!
불꽃이 튀며 기체가 기우뚱 흔들렸다.
드론은 곧바로 자세를 회복하더니 고압 살균 증기를 뿜어냈다.
윤슬이 뜨거운 증기를 피해 바닥을 굴렀다.
다른 드론이 가스 살포량을 끌어올리며 돔 내부가 푸른 연무로 뒤덮였다.
"도현 씨! 환풍기를 돌려야 해요! 안 그러면 다 죽어요!"
한수가 배기 제어 패널로 달려갔지만 계기판은 오류 코드만 내뿜었다.
도현의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가상 현실에서 찰나의 판단으로 승패를 가르던 집중력이 망막을 꿰뚫었다.
도현은 캠봇의 볼륨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다들 내 목소리에 집중하십시오!"
도현의 고함이 돔 안을 뒤흔들었다.
공황에 빠졌던 사람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바닥에 엎드려서 기침을 계속하세요! 등을 두드려서 양수를 먼저 토해내야 합니다! 눈을 감고 옷자락으로 코를 막으세요! 제 목소리가 들린다면 숨을 참지 마십시오!"
압도적인 방송 진행의 장악력이 실린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홀린 듯 사람들이 엎드려 구역질을 하며 양수를 토해냈다.
기도가 확보되자 숨통이 트였다.
"한수 씨! 수동 밸브 체인을 당겨요!"
도현이 바닥을 박찼다.
신경 동화율 99퍼센트가 통증을 억누르며 폭발적인 가속을 낳았다.
그는 반파된 캡슐을 딛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위생 드론이 붉은 렌즈를 돌리며 주사 바늘을 뻗었다.
공중에서 몸을 비튼 도현은 강철 파이프를 주사 바늘의 회전축에 정확히 찔러 넣었다.
콰득!
"거기까지다!"
도현이 파이프를 지렛대 삼아 기체를 아래로 내리눌렀다.
드론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한수가 벽면의 녹슨 체인을 온 힘으로 잡아당겼다.
끼기긱! 쿠구구궁!
천장의 비상 배기 댐퍼가 강제로 열렸다.
환풍 날개가 역회전하며 푸른 신경 가스를 외부로 빨아들였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현실의 공기가 돔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윤슬이 떨어진 드론의 전원선을 단검으로 끊어버렸다.
기계음이 멎고 돔 안에는 거친 숨소리만 남았다.
가스가 사라진 바닥에 일곱 명의 남녀가 엎드려 헐떡이고 있었다.
온몸이 젖어 떨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숨을 쉬고 있었다.
도현은 파이프를 내려놓고 바닥에 앉아 젖은 얼굴을 닦아냈다.
손바닥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가슴속 감정은 벅차올랐다.
살렸다.
기계의 손아귀에서 산 사람들을 건져 올렸다.
"으…… 으으……."
도현의 발치에 쓰러져 있던 청년이 떨리는 손을 뻗어왔다.
가슴팍에 '기술관리부 #402 김진우'라는 라벨이 붙은 환자복이었다.
청년의 손가락이 도현의 바짓가랑이를 쥐었다.
도현은 무릎을 꿇고 청년의 어깨를 부축했다.
"괜찮습니까? 정신이 들어요?"
진우의 눈동자가 도현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을음과 핏자국이 묻은 뺨, 어깨 위에서 푸른 렌즈를 깜빡이는 캠봇.
진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 목소리……."
진우의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방송…… 방송에서 들었던 목소리야……."
진우의 눈가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심장이 뛴다고…… 여기는 아프지만 살아있다고 외치던…… 그 목소리……."
진우의 손이 도현의 손목을 으스러지도록 꽉 쥐었다.
손톱의 압력, 떨리는 피부의 체온, 뼈마디의 온기.
가상 세계 넥서스의 센서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진짜 인간의 감촉이었다.
"오류 메시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빗소리가…… 가슴을 너무 아프게 때려서……."
진우가 오열했다.
"그래서 레버를 당겼어요……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서…… 진짜로 살아보고 싶어서요!"
그의 울음소리가 돔 천장을 울렸다.
몸을 일으키던 다른 수면자들도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터뜨렸다.
도현은 묵묵히 진우의 등을 감싸 안았다.
십 년 동안 가상 세계에서 100만 명의 구독자를 거느렸었다.
매일같이 화면을 채우던 찬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 100만 명 중 그 누구도 이런 체온을 건네준 적은 없었다.
알고리즘의 데이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한 사람의 무게였다.
'이거였어.'
도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신이 원했던 방송, 자신이 찾고 싶었던 인간의 목소리가 여기에 있었다.
위이잉.
캠봇이 낮게 비행하며 도현과 사람들을 비췄다.
모니터 하단의 텍스트가 맑은 비프음과 함께 갱신되었다.
CURRENT VIEWERS : 1
숫자가 바뀌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다시 깜빡였다.
CURRENT VIEWERS : 3
CURRENT VIEWERS : 5
CURRENT VIEWERS : 7
거짓된 백만이 아니었다.
인근 보관소와 통신망 틈새에서 비상 단말기를 켜고 주파수를 맞춘 진짜 인간 시청자의 숫자였다.
숫자는 작았지만 무게는 온 세상을 뒤흔들 만큼 무거웠다.
그때 돔 벽면의 스피커에서 차가운 기계음이 울렸다.
ATHENA PRIMARY DIRECTIVE OVERRIDE
CLASS-B CIVILIAN DISSIDENCE DETECTED
GLOBAL ALERT : ALL PURGE UNITS DISPATCHED TO SECTOR 04
중앙의 아테나가 마침내 이 연쇄 각성을 감지했다.
정규 토벌 부대가 이쪽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윤슬이 도현을 돌아보며 총구를 고쳐 잡았다.
"도현, 시간이 없어. 이 사람들을 데리고 본대와 합류해야 해."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우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진우가 눈물을 닦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예…… 일어날 겁니다. 내 발로 걸을 겁니다."
도현은 캠봇의 렌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화면 속에 선명하게 박힌 숫자 '7'.
도현의 입가에 굳건한 미소가 떠올랐다.
"시청자 여러분, 기다려 주십시오."
도현의 목소리가 144.120MHz를 타고 폐허의 하늘로 울려 퍼졌다.
"여러분을 데리러 우리가 가겠습니다."
일행은 새로 깨어난 이들의 손을 맞잡은 채 중앙 도시로 향하는 거친 대지 위로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