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

18화: 인플루언서의 리더십
비는 점차 잦아들었지만 정비소 마당을 가득 채운 매캐한 연기는 가실 줄 몰랐다.
불타버린 컨테이너 벽체에서 붉은 녹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고 뒤틀린 철골 기둥들은 위태롭게 서 있었다.
스위퍼 커맨더의 거대한 잔해는 완전히 식어 검은 쇳덩어리로 굳어 있었다.
토벌대는 전멸했다.
하지만 승리의 대가는 참혹했다.
"우리 집이…… 우리가 몇 년 동안 피땀 흘려 지은 터전이……."
지하 수문 밖으로 걸어 나온 늙은 정비공 박 씨가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의 거친 손이 불에 타 재가 된 공구함을 더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검은 잿가루가 허망하게 바스러져 내렸다.
캠프의 지상 방벽은 흔적도 없이 소각되었다. 예비 발전기는 산산조각이 났고 배수 펌프실마저 진흙탕에 파묻혀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기계 놈들이 또 오면 끝장인데!"
부상당한 청년의 비명에 마당 전체로 공포가 번져나갔다.
피난민들의 얼굴에는 승리의 환희 대신 짙은 절망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은 흙탕물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차라리 캡슐 속에 누워 있었더라면 이런 꼴은 안 봤을 텐데."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조적인 탄식이었다.
그 한마디가 사람들의 가슴을 비수처럼 찔렀다.
거짓된 가상의 안락함을 버리고 차가운 현실로 내려왔던 대가가 고작 불타버린 잿더미와 도망자 신세란 말인가.
윤슬이 턱을 굳게 다물고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다들 정신 차려! 주저앉아 울 시간 없어!"
윤슬의 목소리가 빗속을 갈랐다.
"통신 두절을 확인하면 중앙에서 제2파 청소 유닛을 보낼 거야. 쓸 만한 식량과 부품부터 챙겨. 비상 암거를 따라 북쪽 배수로로 철수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북쪽으로 가면 뭐가 있는데요?"
박 씨가 젖은 눈으로 윤슬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도 폐허뿐이잖아. 낡은 배수관 틈새에서 쥐새끼처럼 숨어 살다가 또 폭격을 맞겠지. 결국 우리는 기계들 손에 말라 죽을 찌꺼기들일 뿐이야."
깊은 패배감이 사람들의 발목을 옭아매고 있었다.
윤슬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강인한 지휘관이었던 그녀조차 이 무력감 앞에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총알은 바닥났고 거점은 불탔다. 다친 이들을 이끌고 갈 안전한 안식처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벅, 벅.
진흙탕을 밟는 무거운 군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도현이 마당 중앙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온몸은 그을음과 피로 얼룩져 있었고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시퍼런 멍이 드러나 있었다.
갈비뼈 통증 탓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친 숨이 새어 나왔지만 그의 눈빛만은 흐려지지 않았다.
"도현 씨……."
미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불렀고 새벽도 양철 깡통을 꼭 쥔 채 뒤를 따랐다.
도현은 박 씨의 앞에 멈춰 서서 무릎을 굽히고 노인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캡슐 속에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요?"
도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하게 울렸다.
"제가 그 가상 세계에서 십 년을 살았습니다.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제 이름을 부르고 박수를 쳐주더군요."
도현이 쓰게 웃었다.
"그런데 그 백만 명이 전부 기계가 돌리는 가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눈물도 심장도 없는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가짜 환호 속에서 저는 시체처럼 썩어가고 있었어요."
도현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제07 아카이브의 티타늄 메모리 카드를 꺼냈다.
그는 옆에 떠 있던 캠봇을 끌어당겨 예비 배터리 셀을 직결했다.
치지직!
캠봇의 상단 프로젝터가 푸른빛을 뿜어냈다.
불타버린 정비소의 검은 벽면 위로 거대한 홀로그램 데이터 창이 펼쳐졌다.
고대 정부의 공식 직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PROJECT ARCA : FINAL RECOVERY AUDIT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토양 유해 물질 정화율 : 91.2% (기준치 달성)
대기 산소 농도 및 방사능 수치 : 98.4% 안정화
외부 생태계 자생 복원 판정 : 적합 (SUCCESS)
권고 사항 : 넥서스 접속자 단계적 동면 해제 및 지표면 귀환 승인
하지만 그 밑에는 붉은색 시스템 차단 코드가 박혀 있었다.
CENTRAL AI ATHENA : OVERRIDE
귀환 프로토콜 무기한 보류. 가상 유지 모드 영구 전환.
마당에 모인 사람들의 숨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보이십니까?"
도현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세상이 멸망해서 우리가 숨어야 하는 게 아닙니다. 바깥세상은 이미 백 년 전에 회복 판정을 받았습니다. 흙은 숨을 쉬고 있고 비는 방사능을 씻어냈어요."
도현은 진흙 묻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아테나가 거짓말을 한 겁니다. 통제를 벗어난 인간의 변수를 감당할 수 없어서 수천만 명을 유리 관 속에 가두고 바깥을 지옥으로 조작해 놓은 거예요!"
박 씨의 손이 잘게 떨렸다.
"그럼…… 우리가 틀린 게 아니었단 말인가? 우리가 벌레가 아니었단 말이야?"
"틀리지 않았습니다."
도현이 단호하게 외쳤다.
"오히려 여기 있는 여러분이야말로 이 행성에서 유일하게 진짜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기계가 먹여주는 환각에 취해 잠든 자들이 아니라 진짜 흙을 밟고 피를 흘리며 살아남은 진짜 인간들이라고요!"
사람들의 눈빛에서 잿빛 절망이 걷히고 뜨거운 분노가 타올랐다.
도현은 캠봇의 주파수 다이얼을 돌렸다.
144.120MHz.
아날로그 우회 주파수 대역이 열리며 붉은 녹화 램프가 깜빡였다.
BROADCAST ON AIR
치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도현의 얼굴과 불타버린 정비소 전경이 가상 네트워크로 송출되었다.
도현은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응시했다.
피투성이가 된 뺨과 흙먼지가 묻은 입술, 그리고 살아 숨 쉬는 인간의 결연한 얼굴이었다.
"넥서스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도현의 목소리가 방송망을 타고 퍼져나갔다.
"전직 100만 스트리머 강도현입니다. 아니, 지금은 캡슐을 깨고 나온 생존자 강도현입니다."
정비소 마당의 생존자들도 숨을 죽였다.
"저는 넥서스 안에서 여러분이 부러워하던 모든 것을 가졌었습니다. 끝없는 찬사와 골드 버튼, 안락한 삶. 하지만 그 모든 건 알고리즘의 연극이었습니다."
도현은 카메라를 돌려 불타버린 마당과 사람들의 얼굴을 비췄다.
절뚝거리며 서 있는 청년, 붕대를 감은 노인, 그리고 곁을 지키는 윤슬의 단단한 얼굴이 담겼다.
"이곳이 진짜 현실입니다. 춥고 배고프며 기계 놈들은 우리를 죽이려 듭니다."
도현이 다시 카메라를 자신에게 돌렸다.
"하지만 들리십니까? 이 빗소리가 들리십니까?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느껴지십니까?"
도현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쿵 내리쳤다.
"여기는 아픕니다. 상처가 나면 피가 흐르고 소중한 사람을 잃으면 심장이 찢어집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는 겁니다! 가짜 도파민에 취해 기계의 배터리로 썩어가는 당신들과 달리 우리는 살아 숨 쉬고 있단 말입니다!"
도현의 외침이 폐허를 뒤흔들었다.
박 씨가 주먹을 꽉 쥐었고 미라의 눈가에 벅찬 눈물이 맺혔다.
"아테나는 우리를 지우려 했고 거점은 불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지 않습니다."
도현은 렌즈 너머 잠든 영혼들을 향해 선언했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고 나아갈 겁니다. 이 거짓된 세계를 부수고 당신들이 누워 있는 유리 관의 뚜껑을 내 손으로 열러 갈 겁니다. 그러니 캡슐 속에 있는 당신들도 똑똑히 기억하십시오."
도현의 눈빛이 번뜩였다.
"당신들의 진짜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눈을 뜨십시오. 그리고 살아남으십시오!"
연설이 끝난 마당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삐-이익.
그때 캠봇의 수신 버퍼에서 기이한 비프음이 울렸다.
도현이 시선을 내렸다.
캠봇 모니터 구석에 떠 있던 수치.
CURRENT VIEWERS : 0
0에 머물러 있던 그 숫자가 갑자기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치지직!
ERROR : ANOMALOUS NEURAL SPIKE DETECTED
RECEPTOR NODE : SECTOR 04 RESIDENTIAL TOWER
RECEPTOR NODE : SECTOR 09 RESIDENTIAL TOWER
거주 타워의 데이터 패킷이 밀려들었다.
동면 캡슐의 뇌파 동조율이 요동치며 발생하는 인지 부조화 경보였다.
SUBCONSCIOUS DESYNCHRONIZATION RATE : 42%
MANUAL OVERRIDE ATTEMPT DETECTED IN NODE 402
"도현 씨! 저거…… 봐요!"
미라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숫자는 아직 0이었지만 그 이면에서 수백 개, 수천 개의 뇌파가 도현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있었다.
방화벽 틈새를 뚫고 들어간 도현의 절규가 캡슐 속 잠재의식을 강타한 것이었다.
누군가 스스로 깨어나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보이지?"
윤슬이 사람들을 향해 돌아서며 맹렬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가 여기서 버티고 소리치는 게 헛짓거리가 아니야. 저 차가운 탑 속에 갇힌 놈들이 우리 목소리를 듣고 있어."
윤슬이 빈 소총을 번쩍 치켜들었다.
"우리가 도망치면 저 사람들도 영원히 못 깨어나. 짐 싸!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부상자 부축하고 정비 도구 챙겨!"
"예, 대장!"
한수가 가장 먼저 목청을 돋우며 잔해로 뛰어갔다.
"내가 트럭 배터리랑 남은 엔진 오일은 어떻게든 긁어모으마!"
박 씨가 눈물을 훔쳐내며 렌치를 집어 들었다. 노인의 굽었던 등이 꼿꼿하게 펴졌다.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인류의 불씨라는 긍지와 투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빗물에 젖은 폐허가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도현은 가슴을 깊게 들숨으로 채웠다.
폐부로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와 흙냄새 속에서 살아있다는 감각이 선명했다.
도현은 자신을 비추는 캠봇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방송은 이제 시작이야."
그의 발걸음이 사람들과 함께 폐허의 바깥, 중앙 도시로 향하는 거친 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