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

17화: 컨트롤의 미학
쾅! 콰지지직!
회전하던 개틀링 총열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들이 정비소 바닥을 파헤쳤다.
콘크리트 슬래브가 부서져 나가며 불꽃과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도현이 불과 찰나 전까지 딛고 있던 자리는 깊게 파인 탄흔 구덩이로 변해 있었다.
도현은 몸을 웅크린 채 빗물이 고인 진흙 바닥 위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차가운 빗물과 기름때가 얼굴을 덮쳤지만 그의 시선은 지휘 기체의 포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상 세계 넥서스의 레이드 전장에서 수천 번 상대했던 기계 보스들.
시스템의 연산 루프는 완벽을 추구하기에 오히려 기계적인 규칙에 얽매인다.
지휘 기체의 붉은 렌즈 안쪽에서 광학 초점이 미세하게 확장되며 푸른 데이터 패킷이 점멸했다.
0.4초.
주변 하위 유닛들에게 공격 좌표를 뿌리는 순간 발생하는 연산 버퍼의 공백이었다.
도현의 귓가에서 빗소리와 포성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극도의 집중 상태 속에서 시간의 흐름이 늘어났다.
찰나를 쪼개어 보던 스트리머 시절의 감각이 망막 위에 궤적 선을 그려냈다.
'온다.'
개틀링의 두 번째 사격을 위해 총신이 좌측으로 15도 틀어지는 순간 도현은 바닥을 박차고 솟구쳤다.
탕! 콰아앙!
탄환들이 그의 등 뒤 간발의 차이로 허공을 가르며 무너진 펜스를 찢어발겼다.
도현은 반파된 트럭 후드를 딛고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의 두 손에는 찌그러진 강철 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가상 세계였다면 손가락 피드백만으로 가볍게 휘둘렀을 무게였다.
그러나 현실의 근육은 비명을 질렀고 찢어진 손바닥에서는 핏방울이 터져 나왔다.
통증이 신경을 찔렀지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였다.
"씹혀라!"
도현은 공중에서 무게 중심을 꺾으며 강철 파이프를 내리꽂았다.
콰직!
파이프 끝이 회전하는 개틀링 포신의 중앙 기어 축과 탄약 벨트 틈새에 박혀 들어갔다.
우지직! 깡!
고속으로 돌던 강철 기어가 이물질을 씹어삼키며 파열음을 토해냈다.
회전 모터가 급정지하며 거대한 역토크가 발생했다. 포신 내부에서 뇌관이 오작동을 일으키며 둔탁한 폭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CRITICAL HARDWARE FAULT : WEAPON JAM
지휘 기체의 광학 센서가 위험을 알리는 붉은빛으로 번뜩였다. 기체는 안전장치를 작동시키며 강제로 포신 회전을 차단했다.
그 반동으로 도현의 신체가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쿵!
진흙 바닥을 구른 도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깨와 늑골이 부서질 듯 아파왔다.
가상 세계라면 수치 몇 줄로 지나갔을 충격이 온몸의 뼈마디를 타고 전해졌다.
하지만 기계의 주 무장은 침묵했다.
지휘 기체는 주 무장이 봉쇄당하자 즉각 전술 모드를 전환했다.
삐-이익!
고주파 통신음이 정비소 마당 전체를 찢어놓았다.
지휘 기체 상단의 광역 안테나가 회전하며 하위 청소 유닛들에게 살상 명령을 하달했다.
위이잉!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4족 보행 청소 유닛 두 기가 지면을 긁으며 쇄도했다. 공중에서는 고주파 절삭 빔을 장착한 쿼드로터 두 기가 프로펠러를 울부짖으며 하강했다.
그들의 목표는 도현만이 아니었다.
배수 암거 틈새에 숨어 있던 늙은 정비공들과 부상자들을 향해 쿼드로터의 레이저 조준선이 꺾였다.
"도현 씨! 저것들이 수문 쪽으로 가요!"
암거 입구를 막아서고 있던 미라가 비명을 질렀다.
윤슬이 소총을 거꾸로 쥔 채 뛰어나왔다. 탄환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다.
"비켜! 개자식들아!"
윤슬이 휘두른 소총 개머리판이 4족 유닛의 장갑판을 후려쳤다.
쾅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지만 두꺼운 장갑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반동으로 윤슬의 손목이 꺾이며 비틀거렸다.
4족 유닛의 유압 절삭 톱날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톱날이 윤슬의 가슴을 향해 내리찍히려는 찰나였다.
"윤슬 씨, 엎드려요!"
도현의 목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내리꽂혔다.
도현은 이미 지휘 기체의 명령 체계를 간파하고 있었다.
패킷을 쏘아 올린 뒤 하위 유닛들이 명령을 수신하여 모터를 구동하기까지 걸리는 물리적 통신 래그.
정확히 0.2초였다.
도현은 트럭의 사이드미러 지지대를 뽑아 들고 내달렸다.
그는 4족 유닛의 정면이 아니라 상공에서 강하하던 쿼드로터의 궤적 속으로 뛰어들었다.
치이익!
쿼드로터 하단에서 푸른색 절삭 레이저가 뿜어져 나왔다.
도현은 바닥에 몸을 던지며 손에 쥔 반사경 금속판을 레이저 궤적에 비스듬히 기울였다.
가상 현실에서 적의 투사체를 반사하던 패링의 계산이 현실의 각도기와 맞물렸다.
치지지직!
굴절된 고출력 레이저 빔이 바닥을 가르며 윤슬을 덮치려던 4족 유닛의 우측 유압 다리 관절을 직격했다.
콰앙!
녹아내린 유압 호스가 터지며 4족 유닛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지금이에요!"
도현의 외침에 한수가 암거에서 뛰어나와 부러진 콘크리트 파편을 쓰러진 유닛의 광학 센서 위에 내리찍었다. 렌즈가 깨져 나가며 유닛이 바닥에서 헛바퀴를 굴렸다.
도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닥을 차고 일어나 쿼드로터의 동체를 향해 금속 지지대를 투척했다.
퍼억!
지지대가 쿼드로터의 카본 로터 회전축에 깊숙이 박혔다.
로터가 부서지며 통제력을 잃은 쿼드로터가 다른 4족 유닛의 배기구로 곤두박질쳤다.
쿠구구궁!
두 기의 기계가 뒤엉키며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화염이 치솟으며 빗속으로 검은 연기가 번져나갔다.
윤슬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현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충격이 서려 있었다.
총 한 자루 없이 폐허의 잔해와 사격 각도만을 이용해 토벌 유닛들을 자멸하게 만든 움직임.
그것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계산된 하나의 예술적인 통제였다.
하지만 지휘 기체는 여전히 건재했다.
하위 유닛들이 전멸하자 스위퍼 커맨더의 육각형 동체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위이이잉-!
기체 하단의 리펄서 노즐에서 푸른 플라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육중한 동체가 지면에서 3미터 높이로 떠올랐다.
동체 하부 격벽이 열리며 둥근 집속 소이탄 발사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TARGET WIPEOUT PROTOCOL INITIATED
기체는 살아남은 인간들과 거점 전체를 불태우기 위해 광역 소각 모드를 가동하고 있었다.
지상에서는 저 높은 곳에 떠 있는 기체의 약점에 손을 댈 방법이 없었다.
발사관 내부에서 고열 반응이 차오르며 공기가 일렁였다. 3초 뒤면 배수 수문 일대가 불바다가 된다.
도현의 목 뒤 신경 단자가 뜨거워졌다.
머릿속에 정비소 마당의 구조물이 입체적인 와이어프레임으로 펼쳐졌다.
마당 한구석에 솟아 있는 폐차 정비용 대형 유압 리프트 프레임.
5미터 높이의 강철 H빔 타워는 아직 서 있었다.
도현은 망설임 없이 리프트 지지대를 향해 달렸다.
"도현 씨! 위험해요!"
미라의 절규가 들려왔지만 도현은 멈추지 않았다.
사다리 형태의 철골을 맨손으로 잡고 단숨에 기어올랐다. 녹슨 쇳가루가 상처로 파고들었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상공 4미터 지점에 도달했을 때 커맨더의 발사관에서 첫 번째 불꽃이 튀었다.
남은 시간은 1초.
도현은 철골 꼭대기 발판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빗줄기를 뚫고 날아간 도현의 손에는 비상 접근 키가 쥐어져 있었다.
잔여 전력 17퍼센트.
도현의 표적은 커맨더 상단 장갑판 틈새의 로컬 제어 포트였다.
명령을 갱신할 때 강제로 열리는 하드웨어 통신 단자였다.
쿠구구궁!
커맨더 외벽에서 고전압 방전 실드가 터져 나오며 도현의 몸을 휘감았다.
"크아아악!"
수천 볼트의 전류가 척추로 쏟아져 들어왔다. 근육이 뒤틀리고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그러나 도현의 뇌파는 99퍼센트의 감각 동화율로 충격을 버텨냈다.
그는 무너지지 않고 비상 접근 키를 쑤셔 박았다.
쩌저적!
금속 단자가 통신 포트에 강제로 박혀 들어갔다.
목 뒤 단자에서 눈부신 스파크가 튀었다.
"오버라이드…… 중단해!"
도현은 자신의 뇌파 신호를 비상 키의 전력과 결합하여 로컬 중계 루프 속으로 쏟아부었다.
0.4초의 연산 지연 빈틈 속으로 침투한 신호 패킷이 커맨더의 제어 버퍼를 찢어발겼다.
FATAL EXCEPTION : LOOP COLLAPSE
POWER SURGE DETECTED
커맨더의 붉은 광학 센서가 미친 듯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비상 접근 키의 인디케이터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17퍼센트에서 14퍼센트, 그리고 11퍼센트까지 곤두박질치며 단자 표면이 타들어 갔다.
커맨더 내부의 메인 축전기가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터져 나온 폭압에 도현의 몸이 빗속으로 튕겨 나갔다.
스위퍼 커맨더는 공중에서 굉음을 토해내며 지면으로 추락했다.
쿵- 쿠구구궁!
거대한 강철 덩어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짓이기며 처박혔다.
동체 중앙에서 거대한 화염구와 함께 쇠 소리가 터져 나왔고 기체의 모든 불빛이 사그라들었다.
비가 내렸다.
잔해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며 희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정비소 마당을 채우고 있던 폭음은 거짓말처럼 멎어 있었다. 오직 폐허를 적시는 빗소리만이 대기 속에 낮게 울렸다.
도현은 진흙 웅덩이 속에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고 전신이 멍과 찰과상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재킷 안주머니를 매만졌다. 핵심 메모리 카드는 온전했다.
하지만 손에 쥔 비상 접근 키는 검게 그을려 있었고 잔여 전력은 11퍼센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이 키를 쓸 기회는 거의 남지 않았다.
끼이익.
지하 수문의 철판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기침을 토하는 늙은 정비공들과 부상자들, 새벽의 손을 꼭 쥔 미라가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의 시선이 새까맣게 타버린 스위퍼 커맨더의 잔해에 멎었다.
아테나가 자랑하던 무적의 토벌 지휘 기체.
자신들의 거처를 짓밟으려던 철귀가 진흙탕 속에 고철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잔해 앞에 진흙투성이가 된 채 서 있는 한 청년.
"살았다……."
늙은 정비공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진짜로 살았어."
생존자들의 눈가에 빗물과 뒤섞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은 도현을 바라보았다.
처음 그가 캠프에 들어왔을 때 멸시하던 시선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뛰어든 전사를 향한 깊은 경외와 감사뿐이었다.
윤슬이 도현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진흙 묻은 얼굴을 닦아낼 생각도 못한 채 도현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미친 짓이었어."
윤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네 덕분에 다 살았어.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어."
도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입술이 터져 피 맛이 났지만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벅찬 감정은 가상 세계의 100만이라는 숫자와 비교할 수 없었다.
위이잉.
연기 속에서 탄흔이 박힌 캠봇 한 대가 떠올라 도현의 곁에 머물렀다.
카메라 렌즈에 빗물이 맺혔다 흘러내렸다.
작은 화면 위로 빗속에서 부둥켜안은 사람들의 얼굴과 도현의 모습이 생생하게 비쳤다.
거짓된 알고리즘의 찬사가 아니었다.
이곳에는 진짜 피와 땀, 그리고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의 심장 소리가 있었다.
도현은 고개를 들어 불타버린 정비소 지붕 너머의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캠프의 지상 방벽은 무너졌고 거점은 파괴되었다. 토벌대는 물리쳤지만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절망에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사람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도현과 윤슬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진짜 방송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