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

16화: 토벌대의 습격
천장에서 떨어진 붉은 비상등이 방공호 바닥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ARCHIVE LOCKDOWN IN 52 SECONDS
벽면에 박힌 경보 패널에서 날카로운 전자 비프음이 연달아 터졌다. 지하 전체를 울리는 둔중한 진동과 함께 복도 양 끝의 유압 차단문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도현은 품속의 메모리 카드를 재킷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목 뒤 단자에서 찌릿한 열감이 척추를 타고 번졌다. 17퍼센트 남은 비상 접근 키의 잔여 전력이 미세한 신호 간섭을 일으키며 관자놀이를 쑤셨다.
"망설일 시간 없어. 뛴다!"
윤슬이 소총을 어깨에 밀착시키며 앞장섰다.
통로 저편 어둠 속에서 붉은 광학 렌즈 네 개가 번뜩였다. 두 기의 선발 청소 유닛이었다. 거미처럼 깔린 네 개의 강철 다리 위로 고주파 절삭 톱날과 탄환 발사관이 달린 기계였다.
기계의 전면 스피커에서 메마른 합성음이 흘러나왔다.
비인가 개체 감지. 즉시 소거 절차를 개시합니다.
"엎드려요!"
도현이 소리쳤다.
타타타탕!
고주파 탄환이 좁은 통로를 긁어댔다. 파편과 분진이 터져 나오며 시야를 가렸다. 한수가 벽 뒤에서 점사로 응사했다. 총탄이 드론의 전면 장갑판에 맞아 튕겨 나가며 날카로운 불꽃을 튀겼다.
"장갑이 너무 두꺼워! 흠집도 안 나!"
한수가 악을 썼다.
ARCHIVE LOCKDOWN IN 38 SECONDS
철문이 바닥을 향해 굉음을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문틈은 이미 성인 허리 높이까지 좁아져 있었다. 닫히면 서버실과 함께 영원히 갇힌다.
도현은 캠봇의 제어 단자를 오른손에 감아 쥐었다.
가상 세계에서 마주쳤던 방어 기계들의 공격 전조였다. 저 유닛들은 사격 직전 내부 축전기를 충전하느라 0.6초 동안 센서 초점을 고정한다.
"미라 씨, 왼쪽 배관 밸브 쳐요!"
"네?"
"지금 당장!"
미라가 렌치로 고압 증기 배관 밸브를 후려쳤다. 파이프 이음매가 터지며 뜨거운 백색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치이익!
청소 유닛들의 센서가 증기 속에서 방향을 잃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도현이 캠봇의 플래시를 과전압으로 터뜨렸다.
번쩍!
폭발적인 섬광이 복도를 채웠다. 센서 과부하로 두 기의 유닛이 일제히 비틀거렸다. 도현은 바닥의 육중한 강철 잔해를 걷어차 전방 드론의 다리 관절 사이에 틀어박았다.
콰직!
관절 모터가 비명을 지르며 유닛 하나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통과해요!"
도현이 새벽을 안고 바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윤슬과 한수 그리고 미라가 차례로 닫혀가는 방화문 틈새로 몸을 던졌다. 쿵! 거대한 합금 문이 지면과 부딪치며 닫혔다. 뒤편에서 문짝을 긁는 소리가 들렸으나 철판을 뚫지는 못했다.
비상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왔다.
녹슨 비상구를 걷어차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차가운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도현은 북동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윤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기…… 우리 캠프 쪽이잖아."
북동쪽 지평선 너머로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빗속에서도 피어오르는 불길 위로 붉은색 비상 신호탄 세 발이 연달아 터졌다.
치이익.
도현의 손목에 연결된 캠봇 액정에 붉은 글자가 점멸했다.
CLEANING UNIT REGIMENT ASSIGNED
TARGET PROFILE: ANALOG HUMAN SETTLEMENT
단순한 수색대가 아니었다. 아테나가 파견한 정규 청소 편대였다. 아카이브의 비인가 접속을 감지한 중앙 통제망이 생존자 거점 좌표를 특정하고 소각하기 위해 토벌대를 투입한 것이었다.
"거기엔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어."
윤슬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정비 노인들이랑 다친 사람들뿐이야. 무기도 낡은 권총 몇 자루가 전부라고."
한수가 이를 갈며 소총을 고쳐 맸다.
"캠프까지 직선으로 1.5킬로미터다. 도로로 달리면 십 분이면 가."
"안 돼요."
도현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그는 캠봇 렌즈를 공중으로 향했다. 회색빛 구름 아래로 십여 대의 비행 드론들이 편대를 이루어 선회하고 있었다. 로터의 파열음이 지상까지 깔려왔다.
"저건 고고도 광역 감시망입니다. 개활지로 나가는 순간 상공에서 집속 소이탄이 쏟아져요. 삼 분도 못 버티고 몰살당합니다."
"그럼 어떡하라는 거야! 저 사람들이 다 죽을 때까지 보고만 있자고?"
윤슬이 도현을 향해 다가왔다.
도현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구하러 갑니다. 내가 이 좌표를 열었고 내 신호 때문에 저것들이 움직였으니까요."
도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우회하되 감시망의 맹점을 타고 들어갑니다. 미라 씨, 아까 주운 폐차 배터리 셀 줘 봐요."
미라가 외투 안에서 배터리 셀을 꺼냈다. 도현은 주머니칼로 배터리의 안전 회로 피복을 벗겨냈다.
"단락 저항을 걸어서 1분 뒤에 과열 폭발하게 만들 겁니다. 고전압 방전 신호가 터지면 상공의 광학 레이더가 최소 30초 동안 그쪽으로 쏠려요."
도현이 배터리를 도로변 폐변전소 안쪽으로 힘껏 던졌다.
"지금부터 내 발자국만 밟고 뛰어요. 폐공장 파이프라인 밑으로 달립니다."
콰아앙!
등 뒤 폐변전소에서 푸른 스파크와 함께 방전 폭발이 일어났다.
상공을 선회하던 비행 드론 두 기가 급선회하며 폭발 지점을 향해 하강했다. 그들이 감시망을 비운 틈을 타 일행은 무너진 공장 건물 밑으로 쇄도했다.
도현의 머릿속에서 가상 세계의 감각이 현실 지형과 겹쳐졌다.
동화율 99퍼센트.
빗방울 궤적과 부서진 철골이 그리드 선처럼 시야에 펼쳐졌다. 드론 레이더의 3초 사각지대와 슬래브 아래 음영 구역이 최적 경로로 계산되었다.
"왼쪽으로 꺾어요! 파이프 아래로 포복!"
도현의 지시에 따라 일행은 자갈밭을 기고 무너진 벽체를 뛰어넘었다. 새벽은 한수의 품에서 숨을 죽였고 윤슬은 도현의 등 뒤를 엄호하며 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도현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가상 현실 화면 너머에서 무의미하게 올라가던 100만의 숫자.
그 거짓된 환호 속에서 느꼈던 지독한 공허감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그의 귓전을 때리는 것은 차가운 빗소리와 동료들의 가쁜 숨소리였다. 살아 숨 쉬는 진짜 사람들의 온기였다.
'절대로 죽게 두지 않아.'
마침내 폐 정비소와 지하 수문이 위치한 거점 외곽에 도달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했다.
콰르릉!
캠프의 유일한 지상 방어벽이었던 컨테이너 벽체가 화염에 휩싸이며 무너져 내렸다. 지상에는 검은 장갑의 스위퍼 드론 세 기가 진입로를 막아섰고 공중에서는 쿼드로터 절삭 드론들이 선회하고 있었다.
드론들은 환기구와 비상 배수구를 향해 소이탄을 쏟아붓고 있었다.
"쿨럭! 사람 살려!"
"문이 안 열려! 셔터가 찌그러졌어!"
지하 정비실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독가스 사이로 절규가 터져 나왔다.
"개자식들이……!"
윤슬이 소총을 겨누며 뛰어나가려 했다. 도현이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정면은 안 돼요! 탈출구를 먼저 차단하고 연기로 질식시키는 구조입니다."
"그럼 어쩌라고!"
"우리가 수문 쪽 우회로를 엽니다."
도현이 주변을 살폈다. 환기구 상공에서 쿼드로터 한 기가 내려와 배기창 안으로 절삭 빔을 쏘아대고 있었다. 저 배기창 아래가 생존자들이 갇힌 지하 홀이었다.
도현은 바닥의 강철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한수 씨, 미라 씨랑 새벽이 데리고 콘크리트 암거에 숨어요. 윤슬 씨는 내가 신호하면 환기구 센서를 쏴요."
도현은 곧장 몸을 날렸다.
도현은 불타는 트럭 잔해 위로 뛰어올랐다.
엔진 후드를 딛고 허공으로 도약하는 순간 드론 센서가 도현의 열원을 감지하고 붉은빛을 뿜었다.
위협 개체 감지. 제거 프로토콜.
드론의 절삭 빔이 도현의 가슴을 향해 꺾여 들어왔다.
그러나 도현의 몸은 이미 그 궤적을 벗어나 있었다. 가상 세계에서 보스의 즉사기를 피하던 감각이 현실 근육과 맞물렸다. 그는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레이저를 피하며 강철 파이프를 내리쳤다.
깡-!
둔탁한 소리와 함께 쿼드로터의 카본 로터 블레이드 두 개가 박살 나며 튕겨 나갔다.
균형을 잃은 드론이 불꽃을 튀기며 허공에서 맴돌았다.
"윤슬 씨, 지금!"
탕!
윤슬의 정밀 사격이 드론의 제어 코어를 정확히 꿰뚫었다. 드론은 굉음과 함께 지상으로 추락하며 폭발했다.
도현은 착지하자마자 배기창 옆의 수동 배수 밸브로 달려들었다. 녹슬어 들러붙은 거대한 핸들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바닥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와 핸들을 적셨다.
"열려라…… 제발 열려!"
도현이 온몸의 체중을 싣고 핸들을 꺾었다.
끼기긱!
녹슨 톱니가 비명을 지르며 배수 수문이 들려 올라갔다. 안쪽에 고여 있던 유독가스가 빠져나오며 지하로 통하는 비상 진입로가 열렸다.
"기침 소리 들려요! 이쪽으로 나와요!"
도현이 수문 안쪽 어둠을 향해 소리쳤다.
늙은 정비공이 다친 청년을 부축하며 기어 나왔다. 이어 생존자 서너 명이 기침을 토하며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도현 씨……? 윤슬 대장……?"
살아남은 사람들의 눈에 믿을 수 없다는 빛이 스쳤다.
하지만 안도할 시간은 없었다.
지축을 뒤흔드는 금속 파열음과 함께 정비소 본관 양철 지붕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쿠구구궁!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하늘에서 수직으로 낙하했다. 빗물을 흩뿌리며 착지한 것은 지금까지의 드론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거대한 기체였다.
토벌 편대의 현장 지휘 기체, 스위퍼 커맨더였다.
육중한 육각형 동체 양옆으로 회전식 개틀링 포신 두 문이 장착되어 있었고 중앙 센서는 살아있는 맹수처럼 시뻘건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스위퍼 커맨더의 센서가 도현과 피난민들을 정조준했다.
위이이잉-!
개틀링의 여섯 개 총열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작은 청소 드론들도 일제히 멈추고 지휘 기체 뒤로 도열했다. 모든 기체가 지휘 기체의 명령망에 종속되어 있었다.
"다들 엎드려!"
윤슬이 소총을 겨누었으나 탄창 멈치가 헛돌았다. 잔여 탄환이 없었다.
도현의 비상 접근 키 전력은 여전히 17퍼센트였고 그들의 손에 쥔 것은 찌그러진 강철 파이프뿐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개틀링 총구가 불을 뿜기 직전 도현은 도망치는 대신 눈을 부릅뜨고 지휘 기체의 통신 안테나를 응시했다.
시야 속에서 시간의 흐름이 극도로 느려졌다.
광학 렌즈가 주변 유닛들에게 데이터를 송신할 때마다 미세한 비프음과 함께 푸른 데이터 패킷이 안테나 끝에서 점멸하고 있었다.
그 주기.
도현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너무나도 익숙한 박자였다.
가상 세계에서 수백 번 공략했던 최상위 레이드 보스들의 연산 버퍼 루프였다. 주변 유닛들에게 일괄 명령을 내리기 위해 지휘 기체는 공격 0.4초 전에 데이터 스트림을 멈춘다.
0.4초의 연산 지연.
완벽해 보이는 기계 군단의 지휘망 한가운데에 치명적인 틈이 존재하고 있었다.
"윤슬 씨! 탄환 아껴요!"
도현이 빗속에서 외쳤다.
"저것들의 컨트롤, 내가 깹니다."
회전하던 개틀링 총열에서 첫 번째 화염이 터져 나오는 순간 도현의 신체가 0.4초의 사각지대를 향해 번개처럼 쏘아져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