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

14화: 좌표 추적
비상 탈출구 밖의 공기는 젖은 콘크리트와 차가운 쇳내가 뒤섞인 냄새였다.
지하 수로에서 올라오는 유황 섞인 습기가 외벽의 차가운 빗물과 만나 미세한 안개처럼 바닥에 낮게 깔려 있었다. 도현은 새벽을 등에 업은 채 허리를 숙이고 방수로 암거 안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밀어 넣었다. 아이의 체온이 얇은 외투를 뚫고 등 뒤로 전해졌다. 새벽은 찌그러진 깡통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
윤슬이 앞쪽에서 낮은 목소리로 신호를 보냈다.
"저쪽 정찰 드론 서치라이트 주기가 7초. 다음 꺼질 때 다 같이 움직인다."
백색의 예리한 광선이 방수로 외벽의 금속 망을 날카롭게 훑고 지나가더니 일순간 뚝 꺼졌다.
"지금."
일행이 소리 없이 콘크리트 암거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등에 업힌 새벽이 도현의 목과 어깨를 두 팔로 힘껏 감싸 쥐었다. 거친 방수로 바닥을 박차고 나갈 때마다 낡은 운동화 밑창이 미끄러운 이끼를 짓이겼다. 도현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발걸음의 박자를 늦추지 않았다.
한수가 후미에서 뒤를 돌아보며 낮게 속삭였다.
"서치라이트 두 개. 배수탑 반경 500m 쪽으로 범위를 계속 넓히는 중이다. 본대 스위퍼들이 합류하기 전에 빠져나가야 해."
"아직 여기까지 시야가 닿진 않았어. 이대로 계속 간다."
윤슬이 턱짓으로 전방을 가리키며 속도를 올렸다.
암거는 쉰 미터쯤 이어지다 붕괴된 콘크리트 슬래브와 맞닥뜨렸다. 오랜 세월 침하와 폭격으로 무너져 내린 골조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나 바닥 쪽으로 손바닥 하나 들어갈 만한 틈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이쪽 수로가 옛 산업단지 하수 처리 계통이랑 바로 연결돼 있어. 겉은 막혀 보여도 잔해 뒤로 공간이 이어져. 미라, 파이프 안쪽 확인해 봐."
미라가 배낭에서 얇은 금속 탐침봉을 꺼내 틈 너머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탐침봉 끝이 걸림 없이 쑥 들어갔다 나왔다.
"뒤로 최소 2미터 이상 뚫려 있어요. 붕괴 파편이 입구에만 쏠려 쌓인 거라 걷어내면 통과할 수 있어요."
도현은 등에서 새벽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콘크리트 파편과 엉킨 철근을 두 손으로 걷어내기 시작했다. 거친 돌가루가 손바닥의 찢어진 상처에 닿아 뻐근하게 욱신거렸으나 멈추지 않고 잔해를 옆으로 치웠다. 새벽의 조그만 손이 도현의 찢어진 옷자락을 가만히 쥐어 주었다. 아이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맑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먼저 들어간다. 반대편으로 넘어가서 아이부터 받을게."
도현은 틈 안으로 어깨를 비틀어 몸을 밀어 넣었다.
암거 틈을 비집고 빠져나오자 코끝을 스치는 냄새가 확연히 달라졌다.
축축한 하수도 냄새 대신 녹슨 쇠와 묵은 공업용 기름 그리고 비에 젖은 거친 흙의 냄새가 훅 끼쳐왔다. 무너진 공장 외벽과 뒤틀린 고압선 철탑이 흉물스럽게 얽힌 거대한 폐허가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년 전 폐쇄된 옛 산업단지의 북서쪽 외곽 지대였다.
윤슬이 방수로 틈에서 날렵하게 빠져나오며 턱 끝에 맺힌 땀을 털어냈다.
"여기서부터는 지상 노출 구간이야. 직선으로 200m만 돌파하면 옛 방공호 입구가 있는 지하 진입로가 나와."
"중간에 깔린 감시망은?"
도현이 새벽을 다시 등에 고쳐 업으며 물었다.
"교차로 하나가 걸려. 지상 순찰용 정기 스파이더형 감시 기계가 배치돼 있을 거야."
도현은 무너진 담장 틈으로 폐도로를 내려다보았다.
깨진 아스팔트와 앙상한 철골 프레임 사이로 난 직선 도로의 한가운데에 거미 다리 형태의 중형 감시 기계 한 기가 웅크리고 있었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장갑판 위로 붉은 표시등이 일정한 주기로 깜빡일 뿐 다른 기동음은 들리지 않았다.
"저게 충전 모드인지 아니면 소음 반응 매복인지 구별이 안 되는데."
한수가 소총 개머리판을 쥐며 미간을 찌푸렸다.
"섣불리 지나가다 활성화되면 이 일대 드론이 전부 몰려와."
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계 상단부의 광학 센서부를 응시했다.
가상 세계 넥서스에서 수천 시간 동안 분석했던 수색 몬스터들의 패턴 전환 알고리즘과 완벽히 일치하는 구조였다. 렌즈 중앙부가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며 4초마다 아주 미세하게 상하로 끄덕이고 있었다.
"충전 대기 모드입니다. 광학 렌즈가 주변을 스캔하는 게 아니라 내부 축전기 루프를 점검하는 저전력 대기 주기예요. 만약 활성 매복이었으면 진작 우리 쪽 열원을 감지하고 렌즈 축을 고정했을 겁니다."
윤슬이 도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확실해?"
"완벽한 확신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 주기는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 지연이 최소 2초 이상 생겨요. 소음을 반대쪽으로 던져 시선을 돌리면 교차로를 안전하게 우회할 수 있습니다."
미라가 폐차 잔해 더미를 가리키며 눈을 반짝였다.
"저쪽 녹슨 트럭 문짝을 무너뜨리면 소리가 꽤 크게 울릴 거예요."
윤슬이 잠시 기계의 주기를 확인하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봐."
미라가 잔해의 사각지대를 타고 민첩하게 이동해 기울어진 트럭의 철제 문짝을 힘껏 잡아당겼다. 삭아 있던 볼트가 뜯겨 나가며 거대한 철판이 아스팔트 바닥으로 요란하게 나뒹굴었다.
쾅- 콰직!
고요하던 폐허에 굉음이 울려 퍼지자 감시 기계의 상단 센서가 즉시 소음 방향으로 홱 돌아갔다. 웅크리고 있던 네 개의 유압 다리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뛰어!"
윤슬의 신호와 함께 일행이 일제히 교차로를 가로질렀다.
도현은 새벽을 업은 채 지그재그로 바닥의 깨진 유리를 피해 달렸다. 기계의 붉은 렌즈가 트럭 잔해 쪽을 집중 수색하는 사이, 일행은 10초도 채 되지 않아 감시 구역을 벗어나 반대편 건물 그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미라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재킷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손바닥에 묵직한 원통형 부품 하나가 들려 있었다.
"폐차 배터리 뱅크에서 고용량 셀 하나 빼 왔어요."
한수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그 짧은 틈에 언제."
"문짝 뜯을 때 옆에 굴러다니길래 주웠죠. 이런 건 나중에 전력 모듈 만들 때 귀하단 말이에요."
도현은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가상 세계에서 보스 방에 진입하기 직전 바닥에 떨어진 자원을 긁어모으던 베테랑 유저들의 습관 그대로였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생존을 위해 손을 움직이는 것은 현실이나 가상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일행은 무너진 공장 건물들 사이에 반쯤 매몰된 거대한 콘크리트 벙커 앞에 도착했다.
세월의 무게로 지반과 함께 가라앉아 이끼와 담쟁이덩굴이 두껍게 덮여 있었으나 두터운 방벽 구조 자체는 조금의 균열도 없이 온전했다.
윤슬이 빗물이 흘러내리는 계단을 먼저 밟으며 속삭였다.
"다 왔어. 여기가 제07 아카이브 지하 진입로야."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바깥의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며 서늘하고 무거운 공기가 피부를 감쌌다.
천장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 외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도현이 손전등을 켜서 전방을 비추자 통로 끝에 버티고 선 두꺼운 이중 방화 철문이 드러났다.
오래된 합금 도어는 붉은 녹이 슬어 있었으나 도어 핸들과 경첩 축에는 윤활유를 먹인 흔적이 뚜렷했다. 누군가 주기적으로 손을 대며 관리해 온 흔적이었다.
문 오른편 벽체에는 매립형 비상 키패드가 장착되어 있었다. 두꺼운 방수 유리 너머로 낡은 숫자와 알파벳 버튼이 배열된 구시대 군용 인터페이스였다.
한수가 손전등 불빛을 철문 주변 콘크리트 벽으로 꺾어 비추었다.
"잠깐."
한수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것 봐. 벽에 표식이 있어."
손전등 빛이 닿은 벽 모서리에 선명한 마름모꼴 기호가 음각되어 있었다. 아테나의 통합 통제망이 위험 구역이나 격리 대상 시설에 부여하는 적외선 식별 마킹이었다.
윤슬의 손이 반사적으로 소총 손잡이를 꽉 쥐었다.
"아테나 마킹이야. 이미 이곳의 존재를 알고 표시해 뒀어. 함정일 가능성이 높아."
"지금이라도 후퇴해야 해. 저 문을 여는 순간 내부 격리 트랩이 터질 수 있어."
한수가 새벽을 감싸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도현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손전등을 키패드와 벽면 마킹에 바짝 들이대며 손가락으로 기호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아닙니다. 함정이 아니에요."
도현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테나의 표식이 맞지만 마킹 위로 쌓인 미세 먼지의 두께가 상당해요. 표식 테두리 안쪽을 보면 콘크리트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면서 생긴 미세 균열이 가득합니다. 아테나가 최근에 심은 추적 마킹이 아니라 수년 전 이 일대를 전수 조사할 때 형식적으로 찍어둔 폐기 시설 코드예요."
윤슬이 도현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것만으로 안전하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진동과 소리 때문입니다."
도현이 철문 하단부 틈새에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밀착시켰다.
우웅- 웅-
낮고 묵직한 규칙적인 진동이 도현의 손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것은 중앙 네트워크의 인공 전력망에서 나오는 매끄러운 고주파 소음이 아니었다.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어요. 아테나가 내부를 점령하고 청소했다면 독립 발전기를 이렇게 돌려둘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N-17이 말한 대로 외부 통신망과 완전히 단절된 독립 물리 서버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미라가 문틈에 귀를 대더니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 진동 패턴은 구시대 디젤 발전기의 묵직한 피스톤 박자예요. 넥서스 중앙 백본망과 물리적으로 분리된 에어갭(Air-Gap) 구조예요. 아테나가 원격 해킹으로 건드릴 수 없는 청정 구역이에요."
새벽이 품에 안은 찌그러진 깡통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N-17 오빠가 알려준 곳이야. 진짜 여기에 있어."
윤슬이 잠시 입술을 깨물다 소총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좋아. 진입한다. 하지만 문이 열리면 내가 먼저 확인해."
도현은 주머니에서 소중히 보관해 둔 종이쪽지를 꺼냈다. 빗물에 젖지 않도록 비닐에 감싸 두었던 종이 위에는 밸브실에서 N-17의 마지막 패킷을 복원해 적었던 수기 좌표와 비상 진입 코드가 적혀 있었다.
7709-ALPHA-MANUAL.
도현은 손전등을 미라에게 넘기고 키패드 앞에 섰다. 차가운 금속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손끝으로 버튼을 꾹 누를 때마다 부식된 접점 사이로 둔탁한 피드백이 전해졌다.
A. L. P. H. A.
M. A. N. U. A. L.
마지막 알파벳을 누르자 낡은 키패드 상단에서 딸깍하는 기계식 릴레이 소리와 함께 낮고 청명한 전자 비프음이 울렸다.
삐-익.
녹색 인디케이터에 불이 들어왔다.
지하 통로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일행 모두가 숨을 삼킨 채 육중한 철문을 응시했다.
자신의 모든 기억과 목소리를 지워가며 마지막으로 '진짜 후원'이라 부르며 넘겨준 시청자의 약속. 그 진실이 담긴 문이 눈앞에 서 있었다.
도현은 철문 손잡이에 굳은살 박인 손을 올렸다.
발전기의 묵직한 맥동이 손잡이를 타고 심장까지 울려 퍼졌다.
철문 내부에서 수십 년간 잠들어 있던 유압 실린더와 굵은 금속 잠금장치가 천천히 풀려나가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철컥. 스으윽-
무거운 합금 문이 어둠 속으로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