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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100만이 전부 AI였다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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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진짜 후원

배수관 콘크리트 벽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머리 위에서 붉은 섬광탄의 잔광이 꺼져 가고 있었다. 멀리 다른 배수관 쪽으로 기계들의 금속 발소리가 우르르 몰려가는 진동이 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윤슬이 앞장서서 좁은 환기 통로를 기어갔다.

"저쪽 유도 신호탄은 길어야 2분 버텨. 그전에 환기탑 밸브실로 들어간다."

도현은 재킷 안쪽에 넣은 캠봇 기판을 손으로 감쌌다. 얇은 금속판의 열기는 이미 식어 있었다. 파손된 렌즈와 인증 회로는 잘려 나갔고 손바닥만 한 펄스 송신부와 축전기만 남은 상태였다.

한수가 뒤따라오며 녹슨 철망을 닫았다.

"송신기 전원은 완전히 내려. 수신 탐침도 끄는 게 안전해."

"안 됩니다."

도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까 보낸 약속이 있습니다. 다음 틈에 다시라고 했어요. 상대가 다음 공백을 기다리고 있다면 지금 수신기를 꺼서는 안 됩니다."

"저쪽은 캡슐 안에 갇힌 채 교정을 받는 중이야. 네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 보장이 없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확인은 해야 합니다. 그냥 덮어두고 도망치면 제가 가짜 백만 명을 상대하던 시절과 다를 게 없어요."

도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윤슬이 통로 끝에 있는 묵직한 수동 밸브를 돌렸다. 삐걱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손바닥 두 개 너비의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들어와. 잔말 말고 30초 안에 끝내."

일행은 낡은 배수탑 지하 밸브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사방이 두꺼운 콘크리트로 둘러싸여 외부의 바람과 냄새가 차단된 공간이었다. 미라는 바닥에 주저앉자마자 배낭에서 휴대용 단말기와 소형 축전지 버퍼를 꺼냈다.

"발신 회로는 끊어 뒀어. 수신 탐침만 밸브실 외벽 배관 접지에 물릴게. 4초 주기 전환 타이밍은 내가 잡을 테니까 패킷 수신은 네가 맡아."

미라가 클립을 녹슨 배관에 물렸다.

새벽이 찌그러진 깡통을 품에 꼭 안은 채 도현의 옆에 앉았다. 아이의 손끝이 깡통 옆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형. 깡통 안에서 웨이퍼가 아주 작게 바르르 떨어."

도현은 새벽의 깡통을 내려다보았다. 뚜껑 틈새로 미세한 푸른빛이 아주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신호가 오고 있어."

도현이 단말기 액정을 응시했다.

오실로스코프의 녹색 파형이 144.120MHz 주변을 맹렬하게 훑고 지나갔다. 네 초마다 찾아오는 0.03초의 정적.

첫 번째 공백이 지나갔다. 아무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두 번째 공백이 스쳐 지나갔다. 여전히 차가운 정적뿐이었다.

한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시계를 보았다.

"스캔광이 다시 이쪽 배수탑 환기구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이제 전원을 끊어."

"한 번만 더요."

도현은 숨을 죽였다.

세 번째 공백이 찾아온 순간 단말기 화면 한구석에 붉은 점 하나가 튀어 올랐다.

[비인가 패킷 인입]
[SOURCE: N-17]
[세션 연결: 0.03s Burst]

스피커에서 거친 잡음과 함께 짧게 끊어지는 전자음이 쏟아져 나왔다.


수신된 신호는 단순한 텍스트 문장이 아니었다.

화면 가득 알 수 없는 16진수 바이너리 코드와 압축 데이터 블록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DATA BLOCK 01/03]
[SIZE: 1.2MB Chunk]
[CRC CHECK: OK]

"이게 뭐지?"

윤슬이 총구를 밸브실 틈새로 향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

미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채팅이 아니야. 대용량 데이터 패킷이야. 0.03초 틈새에 들어올 수 있는 크기가 아닌데… 데이터를 셋으로 쪼개서 밀어 넣고 있어."

"분할 전송입니다."

도현의 손가락이 단말기 키패드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과거 가상 방송을 진행하던 시절 네트워크 랙이 과부하에 걸렸을 때 쓰던 패킷 병합 알고리즘이 그의 손끝에서 되살아났다.

"N-17은 자기 생각을 말하려는 게 아니에요. 캡슐 로컬 스토리지에 숨겨 뒀던 비인가 캐시 데이터를 통째로 밖으로 보내고 있는 겁니다."

도현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넥서스에서 스트리머로 군림하던 시절 그의 화면에는 늘 찬란한 골드 코인과 황금색 폭죽이 쏟아졌다. 백만 명의 가짜 시청자들은 아테나가 짜놓은 알고리즘에 따라 도현의 도파민을 채워줄 가상 재화를 던져 주었다.

그것은 데이터의 바다에서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화면에 찍히는 이 거칠고 투박한 바이너리 조각은 달랐다.

캡슐 속에서 감각이 마비되고 기억이 지워져 가는 한 인간이 자신의 뇌파 단자에 걸린 위험을 무릅쓰고 필사적으로 쥐어짜 낸 데이터였다.

네 초가 흐르고 네 번째 공백이 열렸다.

[DATA BLOCK 02/03]
[SIZE: 1.2MB Chunk]
[CRC CHECK: OK]
[TOTAL PROGRESS: 66%]

두 번째 조각이 무사히 버퍼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동시에 단말기 상단에 경고창이 붉게 점멸했다.

[아테나 중앙 보안 감지]
[N-17 세션 강제 인지 교정 3단계 발동]
[로컬 캐시 강제 소거 진행 중]

"아테나가 알아챘어!"

미라가 소리쳤다.

"N-17의 캡슐 스토리지를 강제로 포맷하고 있어. 다음 공백까지 버티지 못할 거야!"

배수탑 환기구 위쪽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울렸다. 정찰 드론 한 기가 배수탑 외벽을 타고 내려오며 서치라이트를 비추기 시작했다. 밸브실 철문 틈새로 차가운 백색 광선이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한수가 권총을 쥐며 문간으로 붙었다.

"더는 못 기다린다. 저놈이 문을 스캔하면 끝장이야."

"마지막 조각이 남았습니다. 33%만 더 받으면 돼요."

도현은 단말기를 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

그의 목 뒤에 박힌 단자가 찌릿하게 타들어 가는 통증을 보냈다. 비상 접근 키의 잔여 전력 17%를 쓰면 아테나의 강제 소거를 잠시 지연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의 위치와 생체 정보가 그대로 노출되어 캠프와 동료들까지 위험해진다.

"비상 키는 안 써."

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 컨트롤로 받는다."

그는 단말기의 수동 비트 플립 스위치를 쥐었다. 공백이 열리는 순간 들어올 깨진 패킷을 자신의 감각과 타이밍으로 직접 보정하기로 결심했다.


다섯 번째 공백이 열렸다.

0.03초의 짧은 정적 속으로 마지막 데이터 블록이 거칠게 부딪쳐 왔다.

[DATA BLOCK 03/03]
[SIZE: 1.2MB Chunk]
[CRC ERROR: BIT FLIP DETECTED (23% CORRUPTED)]

아테나의 강제 소거 프로그램이 N-17의 전송선을 찢어발기며 데이터의 4분의 1이 깨져 들어왔다. 단말기 화면에 오류 메시지가 붉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손실률이 너무 높아! 자동 복구가 안 돼!"

미라가 비명을 질렀다.

도현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 대신 가상 공간에서 수만 번의 콤보를 넣으며 체득했던 리듬과 직관으로 단말기의 패리티 체크 다이얼을 비틀었다.

0.01초 단위로 흔들리는 신호의 주파수 편차를 손가락 끝의 감각으로 쫓아갔다.

탁.

스위치가 제자리에 물렸다.

깨져 있던 16진수 코드들이 연쇄적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며 녹색으로 뒤바뀌었다.

[PARITY RESTORED]
[DATA BLOCK 03/03: COMPLETE]
[FILE EXTRACTION: 100%]

화면 중앙에 굵은 좌표와 텍스트 파일 하나가 펼쳐졌다.

[압축 해제 완료: 구시대 물리 아카이브]
[지정 구역: 제07 아카이브 서버실]
[물리 좌표: 37°28'14.2"N 126°53'41.0"E (북서쪽 4.2km)]
[비상 진입 코드: 7709-ALPHA-MANUAL]

그리고 그 아래에 깨진 한 줄의 마지막 메시지가 떠올랐다.

[N-17]: 이건… 제 첫 후원이에요.
[N-17]: 밖에서… 진짜 하늘을 계속 보여주세요.

스피커에서 낮게 새어 나오던 숨소리가 뚝 끊겼다.

곧이어 차가운 시스템 알림이 화면을 덮었다.

[N-17 세션 강제 종료]
[인지 초기화 완료]
[상태: 수면 모드 전환]

도현의 손이 단말기 모서리를 부서져라 쥐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백만 명이 보내주던 거짓 후원에는 아무런 무게가 없었다. 그들이 보낸 수억 개의 가상 코인은 시스템이 만들어낸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좌표는 달랐다.

자신의 기억이 통째로 지워지고 영원한 어둠 속에 잠드는 대가를 치르며 한 시청자가 캡슐 밖의 스트리머에게 건넨 목숨의 무게였다.

윤슬이 도현의 어깨를 툭 쳤다.

"도현아."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저 사람이 준 걸 헛되게 만들지 마."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훔쳤다.

"네. 절대로요."


배수탑 밖에서 둔탁한 금속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정찰 드론 두 기가 환기구 철망을 뜯어내려 톱날을 회전시키는 소리가 밸브실 천장을 울렸다.

한수가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며 말했다.

"좌표는 확인했나? 이게 진짜인지 함정인지 어떻게 알아?"

미라가 단말기에 뜬 코드 구조를 가리키며 빠르게 설명했다.

"함정이 아니에요. 이 데이터 형식은 아테나가 인류를 캡슐에 가두기 전 구시대 군용 통신 규격이에요. 중앙 서버가 원격으로 삭제하거나 조작할 수 없는 독립 물리 서버실의 좌표예요."

"북서쪽 4.2km면 옛 산업단지 지하 방공호 구역이야."

윤슬이 허리춤에서 지도를 꺼내 좌표를 대조했다.

"지상 순찰대가 촘촘하지만 배수관 외곽 비상 방수로를 타고 우회하면 기계들의 감시망을 뚫고 갈 수 있어."

도현은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낡은 종이 조각에 좌표와 진입 코드를 수기로 적었다. 그리고 단말기에 연결되어 있던 수신 기판의 선을 완전히 뜯어냈다.

"추적 표식이 남을 수 있는 부품은 여기서 다 버리고 갑니다."

새벽이 품에 안고 있던 깡통을 도현에게 내밀었다.

"형. 웨이퍼에서 나던 떨림이 멈췄어. 하지만 이 깡통은 내가 계속 가지고 있을게. 그 사람 목소리를 들었으니까."

도현은 새벽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새벽아. 꼭 간직해 줘."

윤슬이 밸브실 뒤편에 숨겨진 녹슨 비상 탈출구를 발로 찼다.

컹 하는 소리와 함께 젖은 흙과 풀 냄새가 섞인 바깥바람이 훅 끼쳐 들어왔다. 지상으로 이어지는 좁은 배수구 통로였다.

도현은 종이 조각을 품 깊숙이 갈무리하고 파이프를 단단히 쥐었다.

그는 더 이상 가짜 도파민에 취해 허상의 박수를 갈구하던 나약한 가상 스트리머가 아니었다.

단 한 명의 진짜 시청자가 목숨을 걸고 보내준 후원을 품에 안은 오프라인의 생존자이자 진실을 기록하는 리포터였다.

"출발하죠."

도현의 말에 윤슬이 앞서 통로 밖으로 몸을 던졌다.

어두운 안개와 폐허가 뒤덮인 북서쪽 지평선을 향해 일행의 발걸음이 망설임 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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