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등대지기와 길 잃은 별

3화: 이름을 잊기 시작한 마을
아침에 등대 문을 열자 수선집 주인이 도하를 보고 웃었다.
“어제 바다에 나갔던 분이죠? 이름이 뭐였더라.”
미주가 대답하려다 멈췄다. 그녀는 자기 노트를 펴서 ‘정도하’라는 글씨를 보여 주었다. 수선집 주인은 한참 읽었다.
“도하 씨. 맞아요. 그런데 왜 이름을 물으면 낯선 사람 같지?”
“낯선 사람은 아니에요.” 미주가 말했다. “이 등대를 지키는 사람이에요.”
“그건 기억나는데, 이름은 또 잊었네.”
주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바느질 상자를 들고 내려갔다. 도하는 노트의 글씨를 빌려 쓰지 않았다. 종이 위의 이름은 그대로인데, 사람의 얼굴과 이름 사이에 가느다란 틈이 생긴 기분이었다.
“라라를 하늘에 올린 대가인가?” 도하가 물었다.
별은 렌즈 아래에서 희미하게 맥박쳤다. “내가 길을 찾을 때마다, 네 이름을 부르던 사람이 하나씩 놓쳐.”
“이제 멈추면?”
“나는 바다에 떨어져 꺼져.”
미주는 창밖의 북쪽을 가리켰다. “어젯밤 바다에서 빛이 번쩍였어요. 종이 가리킨 곳이랑 같은 방향이에요.”
도하의 손은 지도 위의 새벽호 좌표로 갔다. “그쪽에 아버지의 배가 있을 수 있어.”
“그럴 수도 있고, 얼음 밑에 낀 신호등일 수도 있어요.”
“확인해야지.”
“라라가 새벽까지 빛을 놓치면 돌아가지 못해요.”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등대 꼭대기의 렌즈를 동쪽으로 돌리면 라라는 하늘로 이어지는 빛을 얻는다. 북쪽으로 돌리면 얼음 아래의 신호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번만 돌려도 되는 일이 아니었다. 얼음이 밀려오는 속도는 빨라지고, 별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진태가 계단을 올라왔다. 손에는 오래된 해도 조각이 들려 있었다. “새벽호가 사라진 자리에서 종이 울렸어.”
“거길 다녀오셨어요?”
“안 갔어. 종이 울렸다고.”
“그러면 누군가 아래에서 건드린 거예요.”
“네 아버지가 등대에 있을 때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날 뒤로 배가 돌아오지 않았어.”
도하는 해도 조각을 받아 들었다. 가장자리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었고, 빨간 연필로 등대 좌표가 두 번 덧그려져 있었다. 진태는 그 자리에서 시선을 피했다.
“아버지가 여기서 라라 같은 별을 구조했나요?”
“그때는 별인지 배인지 구별하지 못했어. 물속에서 빛나는 걸 보면 누구든 구하려고 하지.”
“그러다가 별을 쫓아간 건가요?”
“그건 내가 본 게 아니다.”
미주가 방수 장갑을 끼며 말했다. “그럼 오늘 우리가 볼게요. 바다로 내려가는 건 제가 할게요.”
“넌 안 돼.” 도하가 말했다.
“어젯밤에도 제가 밧줄을 묶었어요. 파도 높이도 제가 더 잘 읽어요.”
“얼음 밑 신호는 위험해.”
“이름이 잊히는 건 위험하지 않아요?”
도하는 미주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미주는 노트를 접었다. 표지 안쪽에 그의 이름을 적어 둔 칸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이름 대신 ‘오늘 같이 얼음을 건넌 사람’이라고 새로 썼다.
“기억 못 하는 사람에게 이름만 보여 주는 건 해결이 아니에요. 오늘 같이 한 일을 알려 줄 거예요.”
진태는 구명줄을 풀었다. “둘 다 바다로 갈 거면 내가 등대를 맡지.”
“아저씨도 같이 가야 해요.” 미주가 말했다. “아버지 배의 흔적을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이잖아요.”
진태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 길을 알고도 안 갔어.”
“지금 가면 되죠.”
세 사람은 얼음 위에 썰매를 끌었다. 라라는 도하의 외투 안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별의 열기는 천을 뚫고 작은 온기를 전했다. 북쪽에서 간헐적으로 빛이 올라왔다. 얼음이 숨 쉬듯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도하는 밧줄을 얼음 고정쇠에 묶었다. 미주는 나무 막대를 들고 길을 두드렸다. 소리가 둔하면 안전한 얼음, 속이 빈 소리면 돌아가야 했다. 진태는 해도 조각의 등대 좌표를 맞춰 뱃길을 확인했다. 그는 한 번도 앞서 걷지 않았다.
“아저씨, 계속 뒤에 있으면 같이 간 게 아니에요.” 미주가 말했다.
“나는 이 길에 빚이 있어.”
“빚 갚으러 온 거면 앞에서 보여 주세요.”
진태는 해도 조각을 접고 앞쪽 얼음으로 나갔다. 그는 오른손으로 막대를 쥐지 못했지만, 팔꿈치로 얼음을 밀어 소리를 냈다. 곧 막대 끝이 허공을 찔렀다. 셋은 얼음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
금이 간 틈 아래로 푸른 불빛이 보였다. 배의 등불이라기에는 너무 작았다. 라라가 외투 안에서 움직였다.
“저 빛을 따라가면 길을 알아낼 수 있어.” 별이 말했다.
도하는 해도와 렌즈가 가리키는 방향을 다시 비교했다. 빛은 새벽호 좌표의 바로 아래에서 시작해 북동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따라가면 침몰한 배의 흔적을 볼 수 있지만, 라라가 하늘로 올라갈 시간은 사라질 터였다.
“별을 먼저 보내야 해.” 미주가 말했다. “배는 얼음이 더 녹으면 다시 살펴볼 수 있어.”
“선박종은 새벽호를 가리켰어.”
“그 종이 아버지를 찾게 해 줄 수도 있지만,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을 구해 주진 않아요.”
그 말에 도하는 고개를 들었다. 수평선에 작은 구조정이 걸려 있었다. 아침에 출항한 승호의 배였다. 선체가 얼음에 눌려 기울고, 돛대에 묶인 깃발이 반쯤 떨어져 있었다. 배 안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도하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미주, 등대로 돌아가 렌즈를 동쪽으로 돌려. 진태 아저씨는 구조정을 끌어낼 줄을 준비해 주세요.”
“아버지 배 흔적은요?” 미주가 물었다.
“오늘은 살아 있는 배를 먼저 데려오자.”
도하는 라라를 꺼내 바다 쪽으로 들었다. 별의 빛이 얼음 표면에 부딪히며 길을 만들었다. “네가 하늘로 가는 방향은 내가 나중에 다시 찾을게. 지금은 저 배에 길을 비춰 줘.”
“나는 떠오를 힘이 부족해.”
“내가 들고 있을게. 미주가 빛을 돌리고, 진태 아저씨가 줄을 걸 거야.”
“이름을 잃을 텐데.”
“이름 대신 오늘의 일을 기억해 주면 돼.”
라라는 그의 손에서 떠올랐다. 몸집은 작았지만, 빛은 얼음 위로 넓게 퍼졌다. 북쪽으로 향하던 빛이 구조정의 돛대에 닿자 선원들이 밧줄을 던졌다. 진태는 밧줄을 바위에 감고, 미주는 등대 쪽에서 신호를 보냈다. 도하가 얼음 위에서 줄을 잡아당겼다.
구조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얼음이 배를 더 깊이 끌어당겼다. 승호가 선실 밖으로 나오려다 미끄러졌다. 도하는 줄을 허리에 걸고 얼음의 얕은 쪽으로 몸을 낮췄다. 라라의 빛이 그의 발 앞을 비췄고, 미주의 손목 매듭이 두 번 당겨졌다. 얼음이 갈라진다는 신호였다.
“돌아와!” 미주의 목소리가 바람을 뚫었다.
도하는 줄을 놓지 않았다. “진태 아저씨, 지금 당겨요!”
진태가 온몸을 기울였다. 구조정의 선수는 얼음 틈에서 빠져나왔지만, 줄이 팽팽해지며 진태의 손에서 피가 났다. 도하는 칼을 꺼내 얼음에 걸린 밧줄을 끊을 준비를 했다. 그때 승호가 선실에서 도끼를 가져와 얼음판을 쪼갰다. 작은 조각들이 갈라져 물로 떨어졌다. 배가 해안 쪽으로 한 뼘 움직였다.
“한 번 더!” 미주가 외쳤다.
세 사람은 숨을 맞춰 줄을 당겼다. 구조정이 안전한 얼음 가장자리로 미끄러져 나왔다. 승호는 갑판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도하를 알아보지 못하고 “등대지기님,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승호 씨입니다. 아까 미끼통을 두고 가신 분.”
“그랬습니까?”
“아내가 바늘에 끼워 준 미끼였죠.”
승호는 주머니에서 빈 통을 꺼내 들었다. “그 얘기는 기억이 안 나네요. 그래도 이걸 두고 가려던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도하는 통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제가 기억해 둘게요.”
등대로 돌아왔을 때 라라의 빛은 거의 꺼져 있었다. 미주는 렌즈를 동쪽으로 돌려 놓고 기다렸다. 도하는 별을 렌즈 중심에 올려두지 않았다. 손바닥에 얹은 채 열린 유리창으로 바람을 느꼈다.
“지금 보내면 네가 길을 찾을 수 있어?” 그가 물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별자리 하나는 보여.”
“그러면 그쪽으로 가.”
라라는 손바닥 위에서 한 번 반짝였다. 그 빛에 도하의 이름이 잠시 떠올랐다. 그는 이름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별이 유리를 통과해 오르자 등대 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진태가 묻지 않았다. 종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별 하나가 하늘에 합류했다.
미주는 노트를 펼쳤다. ‘정도하’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 ‘오늘 구조정의 줄을 놓지 않은 사람.’ 그 순간 미주는 도하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름은 잘 기억 안 나는데, 같이 바다에 다녀온 건 기억해요.”
“그걸로 충분해.”
“아니요. 이름도 알아낼 거예요. 계속 적어 둘게요.”
도하는 그 말을 막지 않았다. 하지만 라라가 떠나며 남긴 별빛은 북쪽 지도에 작은 점을 찍고 있었다. 그 점은 새벽호의 마지막 좌표에서 아주 조금 벗어나 있었다. 별의 귀환이 아버지의 배를 밝혀 준 것인지, 오래된 항로가 별을 불러들인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진태가 창밖을 보았다. “방금 종은 구조 신호에 대답한 거야.”
“누가 울렸죠?” 미주가 물었다.
“아무도.”
종 안쪽에 새로운 글씨가 나타났다. 오래된 청동에 녹이 걷히며 한 줄이 떠올랐다.
‘이번 겨울에는 등대지기가 먼저 돌아와야 한다.’
도하는 글씨 위에 손을 얹었다. 그 문장은 아버지의 글씨였다. 미주는 해도의 점을 오늘 날짜로 옮겨 적었다. 진태는 종을 다시 묻지 않았다. 셋은 등대 불빛이 북쪽과 동쪽 사이를 가리키는 것을 함께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