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이름이 바뀌는 기사와 약초상

1화: 다른 이름의 손님
약초상 문을 두드린 건 밤 열한 시가 넘어서였다. 베른은 문고리에 묶어 둔 붉은 리본을 풀고, 빗장을 반쯤 열었다. 문밖의 남자는 낡은 갑옷 조각을 걸친 채 눈밭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깨의 피가 검은 외투를 적셨다.
“의사요?” 그가 물었다.
“약초상입니다. 걷지 못하면 들것을 가져올게요.”
“이름표에 적혀 있어요.”
그의 목에는 천 조각이 걸려 있었다. 잉크로 ‘사일’이라고 적혔지만, 글씨는 젖어 번져 있었다. 베른은 그를 안으로 들이지 않고 먼저 눈밭 주변을 살폈다. 뒤따르는 발자국은 없었다. 멀리 언덕 위 풍차 날개가 천천히 돌았다.
“누가 이 이름을 적었죠?”
“모릅니다.”
“그럼 사일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게 제가 가진 이름입니다.”
베른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넓혔다. “들어오세요. 다만 갑옷은 문 옆에 두고요. 바닥에 약초가 널려 있어요.”
그는 칼집을 벗겨 놓았다. 칼집은 비어 있었다. 갑옷 아래엔 셔츠가 들러붙어 있었고, 상처는 칼끝에 찔린 듯 길었다. 베른은 물을 데우며 그의 손을 살폈다. 검지와 중지에 굳은살이 많았고, 왼손 약지는 반지 자국만 남아 있었다.
“칼을 잃었나요?”
“기억이 안 납니다.”
“어디서 다쳤는지도요?”
“기억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사일은 천장에 매달린 말린 잎을 올려다봤다. “바람이 멈췄습니다. 날개 소리가 끊기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어요.”
베른은 물을 내려놓았다. “풍차가 멈췄다고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상처를 씻을 천과 송진 연고를 가져왔다. “아플 겁니다. 원하면 직접 바를 수 있어요.”
“당신이 해 주세요.”
베른은 그의 눈을 확인하고 손을 움직였다. 상처를 씻을 때 그는 이를 악물었지만 몸을 빼지 않았다. 연고가 닿자 어깨 근육이 떨렸다. 그녀는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붕대를 감았다.
“이름이 매일 달라진다는 말이 맞습니까?”
사일은 목에 걸린 천을 내려다봤다. “오늘은 이 이름이 제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이름표는 누가 걸었죠?”
“모르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물어볼게요. 오늘은 사일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당신은 이름을 쉽게 믿지 않는군요.”
“약초는 잘못 불러도 몸에 쓰면 됩니다.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베른은 찻잔을 내밀었다. 사일은 향을 맡고 한 모금 마셨다. 눈꺼풀이 무거워지자 그는 잠들기 전에 칼집을 침상 곁으로 끌어당겼다. 베른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기억을 잃은 사람에게 소지품을 빼앗는 건 치료가 아니었다.
그날 밤 풍차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베른은 가게 뒤편 약초를 말리며 날개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돌 때마다 천장에 매달린 잎사귀들이 방향을 바꿨다. 새벽 세 시쯤, 바람이 뚝 끊겼다.
그녀는 문을 열고 언덕을 올려다봤다. 풍차의 날개가 비스듬히 멈춰 있었다. 계곡 전체가 숨을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약초상 안에서 침상이 삐걱였다. 베른이 돌아왔을 때 사일은 눈을 뜨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칼집을 찾았지만, 손이 떨려 놓쳤다.
“여기가 어디죠?”
“약초상입니다. 당신은 상처를 입었어요.”
“당신은 누구죠?”
베른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사일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베른이에요.”
“베른.” 그는 그 이름을 조심스럽게 따라 했다. “내가 당신을 아나요?”
“어젯밤 처음 만났어요.”
“이름표에는 뭐라고 적혔습니까?”
베른은 그의 목에 걸린 천을 확인했다. 번졌던 글자는 마른 채 선명해져 있었다. 이번에는 ‘에단’이라고 적혀 있었다.
“에단이라고 적혔어요.”
남자의 눈썹이 모였다. “그 이름은 내가 아닙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죠?”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풍차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자, 바람이 창문 틈으로 들어왔다. 침상 옆에 놓인 물잔이 떨리고,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갑자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제… 당신이 내 상처를 치료했어요. 그리고 약초차를 줬죠.”
“기억이 돌아왔나요?”
“아니요. 그 사실을 당신 입으로 들었습니다. 내 기억은 아닙니다.”
베른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한 척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원하는 이름을 선택하면 그 이름표를 써 드릴게요.”
그는 새 이름표의 매듭을 풀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럼 비워 두죠.”
그녀는 천을 뒤집어 아무 글자도 없는 면이 앞에 오게 했다. 남자는 그 천을 자기 손으로 목에 걸었다. 베른은 약초를 갈아 상처에 바를 연고를 만들었다. 그는 그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물었다.
“풍차가 멈추면 모두 기억을 잃습니까?”
“모두는 아니에요. 잠든 사람 중 일부가 전날 일을 잊어요. 요즘은 그 수가 늘고 있습니다.”
“원인을 아십니까?”
“아니요. 풍차지기 호른이 장치를 살피고 있어요.”
“이름표를 바꾼 사람은요?”
“아직 모릅니다.”
남자는 자신이 떠나야 한다고 말하려다 상처 때문에 숨을 삼켰다. 베른은 침상을 가리켰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여기 있어도 됩니다. 다만 기억을 되찾는 치료를 원하면 먼저 위험을 설명하겠어요. 약초로 기억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기억을 찾으면 여기서 떠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당신이 결정할 일이죠.”
“당신은 내가 떠나길 바라나요?”
베른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당신이 안전한 곳에 있길 바랍니다. 그게 여기일지 다른 곳인지는 아직 몰라요.”
사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다시 끊기기 전에 그는 창문을 열었다. 언덕의 풍차 날개가 한쪽만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은 불었지만, 풍차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약초상 종이 세 번 급히 울렸다. 주민 니아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팔에 들린 아이는 숨을 몰아쉬었고, 입술이 푸르게 질려 있었다. 니아는 아이를 침상에 눕히다가 베른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실례합니다. 제가 누구에게 아이를 맡기고 있죠?”
“베른이에요. 어젯밤에도 여기서 만났어요.”
“어젯밤? 저는 어젯밤 집에서 잤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이의 목에 걸린 이름표를 살폈다. 아이의 천에는 ‘리오’라고 적혀 있었는데, 니아는 그 이름을 부르자 대답이 없다고 했다. 베른은 먼저 아이의 호흡을 살폈다. 감기약을 먹인 뒤 너무 일찍 눈밭에 나와 기도가 자극된 듯했다.
“이름표는 잠시 벗겨 둘게요. 지금은 숨 쉬는 게 먼저예요.”
니아는 자기 목의 이름표도 만졌다. 그 위에는 ‘니아’가 아니라 ‘에리’라고 쓰여 있었다. “이건 제 글씨가 아니에요.”
사일은 침상에서 일어나려 했다. 베른이 손으로 막았다. “당신도 아직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 아이는 제가 알아요.”
“어디서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름을 잃어버린 느낌이 듭니다.”
베른은 아이에게 따뜻한 물을 조금씩 먹였다. 약초 달인 물이 목을 적시자 기침이 잦아들었다. 사일은 침상 곁에서 손을 뻗었지만, 아이는 그의 손을 피했다. 그는 곧바로 손을 거뒀다.
“괜찮아요. 가까이 오지 않아도 됩니다.”
니아는 놀란 듯 그를 봤다. “당신이 아이를 아나요?”
“아니요. 그냥 무서운 얼굴일까 봐요.”
베른은 웃음이 나려는 걸 참았다. 기사의 얼굴에는 오래된 흉터와 피로가 가득했지만, 아이에게 괜찮다고 말할 때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묘한 친근감이 들었다. 사일 자신은 그 감정을 설명하지 못했다.
아이의 열이 내려가자 니아는 그를 데리고 가려 했다. 베른은 보온약을 건네며 잠든 동안 풍차가 멈추면 이름표보다 아이가 기억하는 사람의 얼굴을 먼저 불러 주라고 말했다. 니아는 듣고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저는 어젯밤 아이를 데리고 여기 왔어요. 그런데 아침에 제 집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났어요.”
“지금은 기억하잖아요.”
“당신이 말해 줘서요.”
베른은 그 말을 받아 적지 않았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오늘 아이를 돌본 건 당신이에요.”
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를 안았다. 사일은 그녀를 배웅하려 했지만 발이 휘청였다. 베른이 팔꿈치를 붙들었다. 그의 체중이 잠시 그녀에게 실렸다.
“괜찮아요?”
“네. 당신이 잡아 줬다는 건 기억할 것 같습니다.”
“그 기억은 오래 남았으면 좋겠네요.”
사일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물으려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베른은 계속 같은 사람이었지만, 자신은 매일 다른 이름을 받았다. 이름보다 오래 남는 것이 있는지, 그는 처음 궁금해졌다.
문밖에서 지팡이 짚는 소리가 났다. 풍차지기 호른이 약초상에 들어와 이름표를 보더니 얼굴을 굳혔다.
“그 천은 어디서 났소?”
“목에 걸려 있었습니다.” 사일이 말했다.
호른은 안쪽 면을 뒤집었다. 천 밑에는 희미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실종자 명부 17번.’
베른은 호른을 바라봤다. “이 이름표를 누가 만들었어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풍차 날개가 또 멎었다. 이번에는 마을 종탑까지 동시에 조용해졌다.
호른은 이름표를 접어 주머니에 넣지 않고, 탁자 위에 그대로 두었다. “내일 아침엔 그가 이 천을 기억하지 못할 거요. 그때도 베른, 당신은 이 이름을 지켜 줄 수 있겠소?”
“이름을 대신 정해 주진 않겠습니다.” 그녀는 빈 천을 사일 쪽으로 밀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할 때까지 기다릴게요.”
사일은 천을 손에 쥐었다. “그럼 오늘 밤만큼은, 사일이라고 불러 주세요.”
풍차가 다시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베른은 그의 이름을 또 한 번 불렀고, 그는 눈을 감기 전에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