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세 베테랑, 고교 야구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7화: 끝까지 보는 눈
잠실구장의 아침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다.
전날 동해고와의 4강전 혈투를 치른 청원고 선수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흥분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더그아웃 난간에 기댄 강두식 감독은 잔디를 노려보며 턱을 감싸 쥐었다.
"현우야."
강두식이 뒤를 돌아보며 불렀다.
"어깨는 어떠냐. 오늘 선발로 나갈 수 있겠어?"
최현우가 글러브를 고쳐 쥐며 나서려 했다.
"네, 감독님. 던질 수 있습니다."
그 순간 포수 장비를 정리하던 백승진이 둘 사이에 섰다. 승진은 현우의 왼팔을 붙잡고 어깨 뒤쪽 근육을 천천히 눌렀다. 현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팔꿈치 통증은 없지만 승모근과 삼각근 뒤쪽이 아직 뭉쳐 있습니다. 4강전에서 88구를 던진 지 하루 만입니다."
강두식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결승이다, 승진아. 상대는 성북고야. 우완 장도혁이 나오는 판에 우리도 에이스를 올려야 기싸움에서 안 밀려."
"에이스를 오늘 완전히 부숴 먹을 생각입니까?"
승진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거침이 없었다.
"현우 선배는 오늘 최대 50구, 길어야 4이닝입니다. 공 끝이 조금이라도 무뎌지면 미련 없이 태섭이 형으로 교체해야 합니다."
강두식이 입술을 짓씹었다. 회귀 전 승진이 기억하던 강두식이라면 호통을 쳤을 터였다. 하지만 8강과 4강을 승진의 지시대로 승리해 온 감독은 더 이상 말을 얹지 못했다.
"…50구다. 공 뜨면 바로 내린다."
강두식이 돌아서며 뱉어냈다.
승진은 현우에게 더운 찜질 팩과 이완 스트레칭을 건넸다.
"선배, 욕심내지 마요. 오늘 목표는 완투가 아니라 무실점으로 태섭이 형한테 마운드를 넘겨주는 겁니다."
현우는 승진의 단단한 눈빛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미트만 보고 던질게."
오후 2시, 황금사자기 결승전 선공을 잡은 청원고의 1회 초 공격.
성북고 마운드에 오른 장도혁은 고교생이라 믿기 힘든 체구를 자랑했다. 188센티미터의 장신에서 내리꽂는 직구는 잠실구장 포수 미트를 찢을 듯한 소리를 냈다.
팡!
"스트라이크 삼진 아웃!"
청원고 1번 타자가 145키로미터의 강속구에 배트도 내지 못하고 돌아섰다. 2번 타자는 바깥쪽 낮은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3번 타자 김태섭마저 3루 땅볼로 물러나며 1회 초가 허무하게 끝났다.
청원고 더그아웃 분위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공이 진짜 빠르네.… 궤적이 위에서 밑으로 확 떨어진다."
태섭이 헬멧을 벗으며 혀를 내둘렀다.
대기 타석에서 장도혁의 투구를 지켜본 승진은 조용히 턱끈을 조였다.
회귀 전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승진은 결승전 타석에서 장도혁의 눈부신 구위에 기가 눌렸었다. 공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어설프게 배트를 내밀다 삼진으로 물러났고 청원고는 준우승에 그쳤었다.
하지만 지금의 승진은 40년의 짬밥을 먹은 베테랑이었다.
장도혁의 와인드업부터 릴리스 포인트까지 0.1초 단위로 쪼개어 눈에 담았다.
'키가 커서 타점이 높은 건 맞다. 하지만 세트 자세에서 글러브 손목 위치가 미세하게 달라.'
직구를 던질 때는 글러브를 가슴 중앙에 바짝 밀착시켰다. 반면 슬라이더를 꺾을 때는 오른손 손가락 힘을 모으느라 글러브를 쥔 왼 손목이 0.1초 늦게 열렸다.
본인도 모르는 습관, 팁핑이었다.
승진은 마스크를 쓰고 1회 말 포수 자리로 나갔다.
"현우 선배, 저쪽 공에 주눅 들 필요 없습니다. 낮게 깔리는 공이면 충분히 요리합니다."
현우는 승진의 사인을 받고 첫 타자를 맞아 바깥쪽 낮게 직구를 찔렀다.
팡!
"스트라이크!"
현우의 제구는 정교했다. 승진은 140키로미터 초반의 직구와 느린 꺾임 공을 볼배합을 섞어 던지게 하며 성북고 1, 2, 3번 타선을 범타로 처리했다.
1회 말이 삼자범퇴로 끝나자 성북고 벤치에서도 청원고 배터리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경기는 팽팽한 투수전으로 흘렀다.
3회까지 양 팀 모두 점수를 내지 못했다. 장도혁은 삼진 6개를 솎아내며 강력한 구위를 과시했고 현우는 정교한 낮은 코스 수 싸움으로 맞섰다.
4회 초 성북고의 공격.
현우의 투구 수가 45개를 넘어선 시점이었다. 성북고 4번 타자가 현우의 바깥쪽 높은 직구를 결대로 밀어쳐 우중간 2루타를 만들었다.
이어진 1사 3루 위기에서 6번 타자의 희생플라이로 성북고가 먼저 1점을 달아났다.
1대 0.
현우는 이닝을 마친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투구 수는 정확히 52개였다.
강두식이 현우를 바라보며 승진에게 눈짓했다.
"승진아, 현우 한 이닝 더 가도 되겠냐? 공은 아직 살아 있는데."
현우도 승진을 돌아봤다.
"나 괜찮아. 한 이닝만 더 던질 수 있어."
그러나 승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4회 마지막 타구 때 현우 선배 팔꿈치가 살짝 늦게 따라왔습니다. 여기서 한 이닝 더 끌면 내일 팔 못 씁니다."
승진은 김태섭을 향해 글러브를 던져줬다.
"태섭이 형, 5회부터 형이 올라갑니다. 낮게만 던지면 뒤는 수비진이 막습니다."
강두식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대로 간다. 현우는 당장 아이싱해라."
현우는 아쉬운 듯 왼팔을 어깨에 대 보았지만 승진의 눈빛을 보고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포수가 투수의 몸을 자기 몸처럼 챙겨주는데 거기서 고집을 피우는 건 팀을 깨는 짓이었다.
4회 말 청원고의 공격.
2사 후 3번 타자 김태섭이 바깥쪽 슬라이더를 참아내며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2사 1루.
마침내 승진이 타석에 들어섰다.
성북고 더그아웃에서 감독이 나와 장도혁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승진의 포수 리드와 타격에 대한 경계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장도혁이 타석의 승진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고교 최정상 투수로서의 자존심이 눈빛에 서려 있었다.
승진은 배트를 짧게 쥐고 타석 뒤쪽에 발을 고정했다.
'와 봐라. 이번엔 안 피한다.'
초구. 장도혁의 몸쪽 높은 146키로미터 직구가 쇄도했다.
위협구에 가까운 공이었지만 승진은 눈 하나 찌푸리지 않고 고개만 살짝 젖혔다.
"볼!"
두 번째 공. 장도혁의 글러브가 가슴에 바짝 붙었다.
직구다.
승진은 배트를 멈추고 바깥쪽 높은 코스를 그냥 보냈다.
"스트라이크!"
카운트는 1볼 1스트라이크.
성북고 포수가 바깥쪽 아주 낮은 곳에 미트를 대며 사인을 보냈다.
장도혁이 세트 자세에 들어갔다. 고개가 꺾이고 투구 동작이 시작되었다.
승진의 눈동자가 장도혁의 글러브를 쫓았다.
디딤발이 지면에 찍히는 순간 장도혁의 글러브를 쥔 왼 손목이 가슴에서 0.1초 떨어지며 열렸다.
슬라이더다.
승진은 망설임 없이 무게중심을 뒤에 남겨둔 채 왼발을 살짝 내디뎠다.
손끝을 떠난 공이 바깥쪽으로 예리하게 휘어져 들어왔다. 전생의 승진이라면 배트가 헛돌았을 궤적이었다.
하지만 이미 공의 길목을 알고 있던 승진의 배트가 묵직하게 그어졌다.
따아앙!
경쾌한 타격음이 잠실구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장도혁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타구는 장도혁의 키를 넘어 2루수 키를 훌쩍 넘어섰다. 오른쪽 야중간으로 뻗어나간 공이 담장 바로 앞에서 튕겼다.
"나갔다! 뻗어간다!"
청원고 벤치 전원이 난간으로 뛰어나왔다.
1루 주자 김태섭이 2루와 3루를 돌아 홈으로 슬라이딩했다. 승진은 2루에 여유 있게 안착하며 헬멧을 뚝 쳤다.
"동점! 1대 1 동점입니다!"
잠실구장을 메운 청원고 응원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장도혁은 2루에 서 있는 승진을 넋이 나간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전력 슬라이더를 완벽하게 노려 친 타자에게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승진의 한 방은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5회 말 청원고는 승진의 기세에 힘입어 상대 실책과 내야안타로 1점을 더 보태며 2대 1로 역전했다.
구원 등판한 김태섭은 승진의 집요한 바깥쪽 낮은 리드에 따라 6회와 7회를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8회 초 성북고의 저항도 매서웠다.
성북고 2번 타자의 안타와 도루로 만든 1사 2루에서 4번 타자의 중전 안타가 터지며 2대 2 동점이 되었다.
잠실구장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8회 말 청원고 공격.
1사 후 김태섭이 몸에 맞는 공으로 나갔고 다음 타자의 번트로 2사 2루가 되었다.
다시 타석에 들어선 것은 4번 타자 백승진이었다.
성북고 벤치는 승진을 고의사구로 보내려 망설였다. 그러나 장도혁이 손을 저으며 거부했다. 투수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다시 맞붙겠다는 뜻이었다.
승진은 웃음기를 싹 거두고 타석에 섰다.
'마지막 승부다.'
볼카운트 2볼 2스트라이크.
장도혁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투구 수 100개가 넘어간 장도혁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장도혁이 세트 자세를 잡았다.
글러브 쥔 왼 손목이 가슴에서 0.1초 늦게열렸다.
이번에도 슬라이더.
승진은 배트를 끌어당기지 않고 공을 끝까지 밀어칠 준비를 마쳤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꺾여 들어오는 공을 향해 승진의 방망이가 유연하게 궤적을 그렸다.
따악!
타구는 1루수 키를 넘겨 우측 라인 안쪽에 떨어졌다.
펜스 구석까지 굴러가는 타구에 2루 주자 김태섭이 홈을 밟았다.
3대 2!
"역전! 3대 2 역전 적시타!"
승진은 1루를 돌아 2루로 뛰며 오른쪽 주먹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청원고 더그아웃은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9회 초 마지막 수비.
마운드에 선 김태섭은 승진의 엄지손가락 신호에 고개를 끄덕였다.
첫 타자 3루 땅볼 아웃.
두 번째 타자 삼진 아웃.
마지막 타자의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구르는 순간 승진은 마스크를 벗었다.
"아웃! 경기 종료!"
"우승이다아아!"
청원고 선수들이 마운드로 쏟아져 나와 김태섭과 승진을 헹가래 쳤다.
최현우가 달려와 승진의 어깨를 꽉 껴안았다.
"승진아! 우리가 우승했다! 우리가 황금사자기를 쥐었다고!"
승진은 마운드 위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전생의 씁쓸했던 기억을 깔끔하게 털어냈다.
더그아웃 뒤편 관중석 위쪽 VIP석.
양복을 깔끔하게 입은 외국인 사내 두 명이 백승진의 이름이 적힌 스카우팅 리포트에 펜으로 붉은 동그라미를 치고 있었다.
"17세 포수의 시야와 타격 스킬이 아닌데. 저 녀석 리포트 당장 본사에 올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우승 환호성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백승진의 진짜 전설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