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고교 야구선수는 투수 겸 타자

1화: 공을 던지고 배트를 쥔다
봄바람이 서울 강북 하늘고등학교 야구장의 붉은 흙먼지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전광판의 붉은 전광 숫자가 선명하게 번쩍였다.
[8회초 성덕고 3 : 3 하늘고]
[2사 2, 3루]
서울권 강호 성덕고와의 연습경기. 팽팽하던 승부는 8회초 2사 2, 3루의 절체절명 위기로 치달아 있었다.
마운드 위에 선 하늘고 2학년 에이스 윤태오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야구공의 붉은 솔기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끝에 닿는 실밥의 미세한 돌기, 가죽의 서늘한 마찰감이 신경망을 타고 뇌리에 정확히 입력되었다.
0.1밀리미터 단위까지 느껴지는 그립의 감각. 태오는 자신의 신체가 기억하는 최적의 궤적을 머릿속에 그렸다.
포수석에 앉은 민도현이 굵직한 손가락으로 허벅지 사이를 찔렀다.
'몸쪽 깊은 패스트볼.'
타석에는 성덕고의 4번 타자가 배트를 웅크려 쥔 채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있었다. 몸쪽 공을 대비해 팔꿈치를 조이고 시선을 낮춘 자세였다.
태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와인드업과 함께 중심축인 오른발이 투수판을 단단하게 지탱했다. 유연하게 솟구친 왼쪽 무릎이 가슴 높이까지 차오르고 고관절이 접히며 체중이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젖혀졌던 오른팔이 완벽한 가속도를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파앙-!
미트가 찢어질 듯한 둔탁한 파열음이 백넷 전체를 뒤흔들었다.
"스트라이크!"
타자는 배트를 들어 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포수 미트에 박힌 공은 여전히 흰 연기를 뿜어낼 것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백넷 뒤에 서 있던 프로 스카우트 두어 명이 일제히 스피드건을 확인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151km/h]
"저게 고2 볼끝이야?"
"몸쪽 보더라인에 정확히 걸쳤어."
덕아웃이 웅성거렸지만 마운드 위의 태오는 차분했다. 손끝을 떠난 순간의 압력과 공기의 저항, 어깨 회전각이 머릿속 기록과 완벽히 일치했다.
도현이 다시 사인을 냈다. 이번엔 바깥쪽 낮은 스플리터였다.
태오는 검지와 중지를 실밥 바깥으로 넓게 벌려 잡았다. 직구와 완전히 똑같은 팔 스윙, 같은 높이의 릴리스 포인트에서 공이 뿜어져 나왔다.
타자의 배트가 직구를 확신하고 거칠게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홈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공이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타격존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날카로운 궤적.
퍽!
"헛스윙!"
볼카운트 2스트라이크.
마지막 승부구였다. 도현이 미트를 높게 치켜세웠다.
'하이 패스트볼로 숨통을 끊는다.'
태오는 손가락 끝에 회전축의 중심을 싣고 온몸의 탄성을 손끝으로 폭발시켰다. 실밥을 강하게 뜯어내며 뿜어져 나온 백스핀이 공기를 찢었다. 타자의 눈앞에서 솟구쳐 오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강속구였다.
휘익- 쾅!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공수 교대!"
타자는 허공을 가른 배트의 반동에 주저앉았고 전광판 스피드건에는 선명한 숫자가 박혔다.
[153km/h]
하늘고 덕아웃에서 터져 나온 환호성이 그라운드를 뒤덮었다.
8회말 하늘고의 공격.
2사 1루 상황에서 태오는 숨을 고르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땀을 닦아낸 태오는 주저 없이 검은색 타격 헬멧을 머리에 눌러쓰고 33인치 28온스의 배트를 쥐었다.
덕아웃에 있던 코치가 깜짝 놀라 수건을 내밀며 태오를 붙잡았다.
"태오야, 방금 전력투구했잖아. 어깨 굳는다. 대타 낼 테니까 다음 이닝 준비해."
"아닙니다. 제가 칩니다."
태오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지금 점수 안 뽑으면 9회에 승부 못 끝냅니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코치가 감독을 쳐다보았지만 강주혁 감독은 팔짱을 낀 채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타석에 들어선 태오는 타격 박스의 흙을 고르고 배트를 가볍게 돌렸다.
보통의 투수라면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진 직후 어깨와 등 근육이 경직되어 스윙 궤도가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태오는 달랐다.
투구할 때 사용했던 어깨의 팽창 감각을 빠르게 이완시키고 하체와 골반의 회전축으로 신체의 긴장을 분산했다. 호흡을 아랫배로 가라앉히자 배트 끝의 무게가 손바닥 안에서 부드럽게 감겼다.
성덕고의 에이스 투수가 마운드 위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태오를 노려보았다.
'방금 전력투구로 삼진을 잡고 내려왔어. 어깨에 피로가 쌓여서 빠른 공에 배트가 밀릴 수밖에 없다.'
초구. 몸쪽 높게 찔러 들어오는 140km 직구.
태오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공을 골라냈다.
"볼!"
2구째. 이번엔 몸쪽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고속 커터였다. 태오가 배트를 내밀었지만 타이밍이 반 박자 빨라 3루 쪽 그물망을 때리는 파울이 되었다.
볼카운트 1볼 1스트라이크.
성덕고 배터리는 태오의 몸쪽 반응을 확인하고 결정구를 선택했다. 바깥쪽 꽉 찬 코스로 승부수를 던졌다.
슈우욱-
142km의 직구가 바깥쪽 보더라인을 향해 빠르게 파고들었다.
태오의 시야 속에서 공의 궤적이 선명하게 펼쳐졌다.
'바깥쪽 낮게 걸치는 궤적. 당겨치면 빗맞은 땅볼이다. 결대로 밀어낸다.'
태오의 왼발이 부드럽게 디딤발을 형성했다. 골반이 회전하며 배트의 스윗스팟이 완벽한 수평면을 이루며 공의 중심을 짓이겼다.
딱-!
맑고 묵직한 타격음이 운동장 상공을 뒤흔들었다.
타구는 낮은 탄도로 솟구쳐 우중간을 향해 총알처럼 뻗어나갔다. 중견수와 우익수가 다급하게 뒤로 달렸지만 타구는 이미 그들의 머리 위를 훌쩍 넘어가 외야 펜스 하단을 직격했다.
쾅!
"돌아라! 뛰어, 뛰어!"
하늘고 3루 주루 코치가 미친 듯이 팔을 돌렸다. 1루 주자가 2루와 3루를 돌아 번개처럼 홈으로 쇄도했다.
세이프!
그사이 긴 다리로 1루와 2루를 폭발적인 스피드로 통과한 태오는 3루 베이스에 여유 있게 안착했다.
3루타. 스코어는 4대 3 역전이었다.
3루에 선 태오는 숨을 고르며 오른손 손목을 가볍게 털었다. 배트 중심에 공이 얹히는 순간 전해진 찰나의 반발력과 어깨의 잔여 피로를 머릿속 장부에 기록했다.
투수로서의 삼진, 타자로서의 결승 3루타.
백넷 뒤에 앉아 있던 스카우트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153km를 던진 놈이 저 코스를 밀어쳐서 펜스를 맞춘다고?"
"말도 안 돼. 저건 그냥 천재잖아."
9회초 수비에서도 마운드에 오른 태오는 최고 149km 직구와 스플리터로 상대 세 타자를 깔끔하게 삼자범퇴 처리했다.
경기 종료. 하늘고의 4대 3 승리였다.
선수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라커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강호 성덕고를 꺾었다는 흥분이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라커룸 한쪽 구석. 태오는 땀에 젖은 유니폼 상의를 벗어 걸어두고 가방에서 손때 묻은 낡은 가죽 커버 노트를 꺼냈다.
볼펜을 쥔 태오의 손가락이 거침없이 종이 위를 채워 나갔다.
[감각 기록 - 성덕고 연습경기]
- 등판 이닝: 1.1이닝 (투구 수 24구)
- 직구 16구 (최고 153km/h, 평균 149.8km/h)
- 스플리터 8구 (최고 139km/h)
- 8회 삼진 상황: 검지 끝 압력 정상. 3구째 하이 패스트볼 때 오른쪽 견갑골 회전 궤적 오차 없음.
- 8회말 3루타 타석: 바깥쪽 142km 직구 대응. 배트 중심 안쪽 3mm 타격. 허리 코어 반동 양호.
- 피로도: 오른쪽 팔꿈치 2.1 / 어깨 2.5 (10점 만점 기준). 통증 없음.
툭.
얼음이 가득 든 비닐 팩이 태오의 오른쪽 어깨에 얹혔다.
주전 포수 민도현이었다. 도현은 땀투성이가 된 얼굴로 태오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
"야, 윤태오. 너 진짜 제정신이냐? 마운드에서 153km를 꽂아 넣더니 타석에서 담장 직격 3루타를 쳐? 사람이 적당히 괴물이어야지."
도현이 투덜거리면서도 슬그머니 왼쪽 손목을 주물렀다. 태오의 묵직한 공을 연달아 받아내느라 손목 관절에 뻐근한 충격이 남은 탓이었다.
태오가 도현의 손목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손목 아파?"
도현이 흠칫 놀라며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아프긴 뭐가 아파! 네 공이 워낙 돌덩이 같아서 잠깐 털어본 거다. 그나저나 너는 그 낡아빠진 공책에 뭘 그렇게 열심히 쓰냐? 설마 야구 일기냐?"
"일기 아니야. 내 몸의 신호를 적는 거야. 수치로 기록해 둬야 한계를 넘기 전에 멈출 수 있으니까."
그때 라커룸 문가에서 학생 매니저 한세린이 캠코더와 노트북을 든 채 다가왔다.
"윤태오, 오늘 8회 3루타 타구 속도 시속 164.2km 나왔어."
세린의 차분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투구 후 타석에 들어섰을 때의 스윙 스피드 감소율은 1.2% 미만이었고. 이 정도면 투구 피로가 타격 메커니즘에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선천적인 회복력과 코어 밸런스가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수치지."
"거봐, 세린이도 인정하잖아."
도현이 혀를 내둘렀지만 세린은 노트북 화면을 덮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안 하지만 어른들의 상식도 쉽게 안 바뀌어. 감독님 표정 봤지? 저 표정이면 오늘 그냥 안 넘어가."
세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커룸 문이 덜컥 열렸다.
문 앞에 강주혁 감독이 서 있었다. 낡은 윈드브레이커를 걸친 감독의 얼굴은 승리의 기쁨 대신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윤태오. 감독실로 와라."
감독실 문이 닫히자 밖의 소음이 일순간 차단되었다.
벽면에는 오래된 대회 포스터와 바랜 훈련 일정표가 붙어 있었다. 강주혁 감독은 책상 서랍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꺼내 태오 앞에 내려놓았다.
"팔 상태는 어떠냐."
"괜찮습니다. 통증 전혀 없습니다."
"오늘 공도 좋았고 결승타도 완벽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성덕고를 못 잡았겠지."
강주혁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칭찬 뒤에 따라오는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짓눌렀다.
"하지만 태오야. 이게 공식 대회에서도 통할 것 같으냐?"
강주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연습경기 한두 번이야 네 타고난 체력으로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청룡기 예선이 시작되면 상대 팀들은 너 하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쓸 거다. 타석에선 파울로 끈질기게 공을 커트해서 투구 수를 늘리고 번트와 도루로 네 체력을 갉아먹을 거다. 마운드에서 100구를 던지고 4번 타자로 나가서 전력 질주를 한다? 그게 사람 몸으로 버텨질 것 같냐?"
강주혁의 머릿속에 과거 자신이 지도했던 촉망받던 에이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혹사 끝에 어깨 연골이 닳아 야구를 그만둬야 했던 소년의 눈물. 그 죄책감은 지금도 강주혁의 가슴을 짓누르는 흉터였다.
"오늘 백넷 뒤에 프로 구단 스카우트들이 와 있었다. 그 사람들이 날더러 뭐라고 했는지 아냐?"
강주혁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윤태오는 투수로만 키워야 1차 지명 1라운드감이다. 고교 무대에서 타격까지 시키면 부상 위험 때문에 몸값이 깎이고 지명 순위도 뒤로 밀릴 거다. 하나만 집중시키라고 하더군."
강주혁의 시선이 태오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하나만 골라라. 투수로 갈 거냐, 타자로 갈 거냐. 하나에만 집중하면 넌 프로를 넘어 메이저리그까지 갈 수 있는 재목이다. 하지만 둘 다 쥐고 가려다간 둘 다 망가진다."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
야구를 시작한 이래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었다. 감독도, 코치도, 세상의 모든 야구인도 한결같이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둘 다 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하나를 버려야만 살아남는다고.
하지만 태오는 주머니 속의 가죽 노트를 쥐어 잡았다.
남들은 재능이라 부르는 것을 태오는 매일 숫자로 증명해 왔다. 손끝의 마찰, 근육의 피로도, 릴리스의 각도, 스윙의 궤적. 자신의 몸을 누구보다 정밀하게 측정하고 관리해 온 수천 시간의 기록이 그의 손안에 있었다.
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흔들림 없는 그의 두 눈동자가 감독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감독님. 저는 둘 중 하나를 고르려고 야구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태오의 목소리에는 티끌만 한 망설임도 없었다.
"던질 수 있고 칠 수 있습니다. 제 몸의 한계는 제가 매일 기록하고 관리합니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게 안전한 길이 아니라 둘 다 증명해 내는 것이 제가 야구를 하는 이유입니다."
"태오 너……!"
강주혁의 얼굴에 당혹감과 분노가 스쳤지만 태오는 물러서지 않고 말을 맺었다.
"이번 청룡기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둘 다 해낼 수 있다는 걸."
서로를 응시하는 스승과 제자의 시선 사이로 팽팽한 불꽃이 튀었다.
야구계의 견고한 상식에 균열을 낼 두 개의 무기. 천재의 도전이 마침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