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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전원을 꺼주시겠어요?2화

이 세계의 전원을 꺼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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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복수의 서막

연회장의 마지막 손님이 떠난 뒤에도 디에르 공작가에는 술과 꽃 냄새가 남아 있었다.

르네티아는 비어가는 잔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불쌍한 악녀로 만들려던 이엘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손님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엘라의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을 확인하기도 전에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 반응은 5년 뒤 광장에서도 똑같았다.

"르네티아."

연회장 안쪽에서 디에르 공작이 딸을 불렀다. 손님들을 모두 보낸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오늘은 네 생일이다. 이엘라의 수고를 조금 너그럽게 봐주면 안 되겠느냐?"

과거라면 그 말에 속이 뒤집혔을 것이다. 르네티아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너그럽게 보는 것과 가문의 일을 맡기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 연회 비용과 황실 구휼금 장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재정에 관심을 보이는구나."

"오늘 이엘라가 관리인의 승인 없이 연회 준비를 진행한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권한이 큰 문제로 이어지는지 확인하고 싶어졌을 뿐입니다."

르네티아는 이엘라를 직접 고발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문을 여는 명분이었다.

공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허리춤의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내일 아침에 집사와 함께 확인하거라. 오늘은 늦었다."

"오늘 밤 서재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생일 선물로 허락해주신다면요."

공작은 짧게 한숨을 쉬고 서재 열쇠를 건넸다.

"무리하지 말거라. 네가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서재 문 앞에는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르네티아에게 허리를 굽힌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서재의 예비 열쇠 하나가 보이지 않습니다."

르네티아의 손가락이 멈췄다.

기억 속에서 본 장면이 겹쳐졌다. 생일 다음 날 이엘라는 울먹이는 얼굴로 공작 앞에 서 있었다. 르네티아의 서랍에서 황실 구휼금 삼만 금화를 빼돌렸다는 영수증이 나왔고 공작 인장의 자국까지 찍혀 있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르네티아를 의심했다. 이엘라는 언니를 감싸는 척했고 체이스는 황실 조사단을 보냈다.

"그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오늘 밤 서재 근처에 사람을 보내지도 마시고요."

집사는 망설였지만 고개를 숙였다.

르네티아는 마리아를 데리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의 회계 장부와 공작 인장은 그대로였다. 다만 인장함 옆의 먼지가 가늘게 끊겨 있었다.

누군가 이미 손을 댔다.

"마리아. 오늘 밤 네가 내 옆에 있어야 해."

"무슨 일이 생기나요?"

"생길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할 거야."

르네티아는 서재의 촛불을 하나만 남겼다. 그리고 책상 뒤 병풍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가 들어오더라도 내가 말할 때까지 움직이지 마."

마리아는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티아는 그 작은 손을 한 번 꼭 잡아주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마리아를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복도 끝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얼굴을 가린 사람이 들어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문틈으로 먼저 나타난 것은 분홍빛 머리칼이었다.

이엘라였다.

그녀는 잠옷 위에 얇은 숄만 걸친 채 서재로 들어왔다. 뒤에는 하녀가 작은 등불과 가죽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정말 아무도 없어요?"

"집사에게 들키지 않았어요. 빨리 하세요 영애님."

이엘라는 책상으로 다가가 예비 열쇠를 꺼냈다. 열쇠 끝에는 붉은 밀랍이 굳어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언니는 끝날 거야. 이 영수증을 언니 책상에 넣고 공작 인장을 찍으면 돼. 황실 구휼금을 빼돌렸다는 증거가 되겠지."

하녀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영애님이 직접 인장을 찍으셔도 괜찮을까요?"

"인장은 다시 제자리에 놓으면 아무도 몰라. 체이스 전하께 보내면 아버지도 더는 언니 편을 들 수 없을 거야."

이엘라의 목소리에 차가운 기쁨이 번졌다.

르네티아는 병풍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 계획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구나."

이엘라가 비명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하녀는 들고 있던 등불을 떨어뜨릴 뻔했다.

"언니? 왜 여기에..."

"내 서재에서 내 인장을 훔치려는 사람에게 먼저 물어야 할 말을 네가 가르쳐주니 편하구나."

이엘라는 열쇠를 숨기려 했다. 르네티아는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건 훔치려던 게 아니에요. 문이 열려 있어서 도둑이 든 건 아닌지 확인하려고—"

"도둑이 구휼금 영수증을 들고 다니니?"

르네티아는 이엘라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았다. 황실 구휼금 삼만 금화를 남부 창고로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서명은 르네티아의 필체를 흉내 냈지만 획 끝이 조금씩 달랐다.

"언니가 저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준비한 거죠?"

이엘라가 눈물을 맺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언니를 모함하겠어요. 저는 이 종이를 발견해서—"

"그럼 왜 네가 내 책상에 넣는다고 말했지?"

이엘라의 입술이 굳었다. 뒤에 있던 하녀도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르네티아는 인장함을 열었다. 안쪽의 붉은 밀랍에는 가느다란 균열이 나 있었다. 누군가 억지로 뚜껑을 연 흔적이었다.

"이것을 들고 아버지께 가면 당장 네가 서재에 들어온 사실을 말할 수 있어. 하지만 그러면 이 집안의 수치가 모두 밖으로 새어나가겠지."

"언니가 저를 협박하는 건가요?"

"기회를 주는 거야. 내일 아침 네가 먼저 이 종이를 들고 아버지께 가. 네가 준비한 대사를 끝까지 연기해 봐."

르네티아는 이엘라의 손에서 예비 열쇠와 영수증을 거두었다. 공작 인장은 다시 금고에 넣었다.

이엘라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고발하게 해야 했다. 눈물과 거짓말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려면 그녀가 가장 자신 있는 무대가 필요했다.

"방으로 돌아가. 내일 아침 네가 어떤 얼굴로 울든 나는 더 이상 속지 않을 테니까."


다음 날 아침 이엘라는 예상한 그대로 움직였다.

공작이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이엘라가 응접실로 뛰어 들어왔다.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고 손에는 어젯밤의 영수증이 들려 있었다.

"아버지! 큰일이에요. 언니의 방에서 이걸 찾았어요."

디에르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와 마리아도 응접실에 들어왔다.

"무엇이냐?"

"황실 구휼금 삼만 금화를 언니가 빼돌렸다는 영수증이에요. 언니가 이런 일을 했을 리 없다고 믿고 싶지만 공작 인장까지 찍혀 있었어요."

이엘라는 종이를 공작에게 내밀며 르네티아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어젯밤의 당황 대신 확신이 서려 있었다.

르네티아는 천천히 응접실로 들어갔다.

"내 방의 어느 서랍에서 찾았지?"

이엘라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두 번째 서랍이었어요. 잠겨 있지 않아서—"

"내 방의 두 번째 서랍은 어제 아침부터 잠겨 있었어."

"그건 제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종이는 진짜예요."

이엘라는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 있던 하녀가 안타까운 얼굴로 이엘라를 바라보았다.

르네티아는 공작에게서 영수증을 받아 들었다.

"이 문서는 어젯밤 서재에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이엘라는 예비 열쇠로 서재에 들어와 인장함을 열었습니다."

"거짓말이에요!"

이엘라가 소리쳤다. 곧 입을 가리고 흐느끼는 표정으로 바꾸었다.

"제가 언니를 얼마나 따르는지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언니는 연회장에서 저를 모욕한 것도 모자라 이제 제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해요."

몇몇 하인들의 표정이 다시 이엘라 쪽으로 기울었다. 증거보다 눈물이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저도 보았습니다. 이엘라 영애께서 하녀분과 함께 서재에 들어오셨습니다. 아가씨와 제가 병풍 뒤에 숨어 있었어요."

"마리아는 언니의 시녀잖아요. 당연히 언니 편을 들겠죠."

"그래서 물증을 보여주려고 했어."

르네티아는 손수건 안에 감춰둔 예비 열쇠를 탁자 위에 놓았다.

"이 열쇠는 어젯밤 네 손에서 빼앗은 것이다. 네가 가져온 영수증도 내가 보관하고 있었지."

이엘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르네티아는 공작 인장도 꺼내놓았다. 인장 바닥을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흠집이 보였다.

"우리 집안의 인장은 오래 사용해서 사자 문양의 왼쪽 발톱에 금이 가 있다. 어젯밤 네가 찍은 밀랍에는 그 흠집이 없지. 진짜 인장을 찍은 뒤 문서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인장을 흉내 낸 틀을 사용했다는 뜻이야."

공작이 영수증을 다시 살폈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엘라. 네가 서재에 들어갔다는 말이 사실이냐?"

"아버지 저는..."

이엘라는 울먹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이번에는 공작의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다.

"대답하거라."

침묵이 응접실을 눌렀다.

공작은 집사에게서 예비 열쇠 장부를 받아 확인했다. 이엘라가 가져간 열쇠의 번호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

"오늘부터 이엘라에게 서재와 회계 장부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 예비 열쇠도 전부 회수해라."

"아버지!"

"르네티아가 거짓말을 했다면 그 증거를 가져오너라. 눈물만으로는 가문의 인장을 다룰 수 없다."

이엘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홍빛 눈동자에 처음으로 순수한 공포가 떠올랐다.

르네티아는 통쾌함보다 서늘한 확신을 느꼈다. 이엘라의 가면은 깨졌지만 주변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그녀에게 기울어 있었다.

복수는 이제 막 문턱을 넘었을 뿐이었다.


공작은 그날 오후 르네티아에게 장부 보관실의 열쇠를 넘겼다.

"네가 직접 관리하거라. 당분간은 집사와 모든 지출을 함께 확인하도록 해라."

르네티아는 묵직한 열쇠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미안하구나. 그동안 네가 혼자 감당하게 두었다."

아버지의 사과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르네티아는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췄다. 미래의 아버지는 끝까지 자신을 믿지 못한 채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이번에는 달라질 것이다.

그날 저녁 공작가의 정문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황실 문장이 찍힌 마차가 멈춰 섰고 검은 제복의 시종이 봉인된 서신을 내밀었다.

르네티아는 봉투를 뜯어 첫 문장을 읽었다.

〈내일 정오 황실 별궁의 차회에 참석하라. 이엘라 디에르 영애에 대한 부당한 모함을 해명하고 즉시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서명은 체이스 에테르니아였다.

르네티아는 서신을 접으며 웃었다. 이엘라는 공작가에서 실패하자 황실의 이름을 방패로 내세웠다. 체이스는 이미 이엘라의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마리아. 내일 입을 드레스를 준비해. 가장 얌전하고 단정한 것으로."

"황실 차회에 가시려고요?"

"가야지."

르네티아는 창밖의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복수의 첫 번째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는 체이스와 이엘라가 함께 만든 화려한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 무대 위에서 누가 웃을지 르네티아가 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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