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의 전원을 꺼주시겠어요?

1화: 단두대의 이슬
서늘한 빗줄기가 제국 수도의 중앙 광장을 검게 적시고 있었다.
진흙탕으로 얼룩진 처형대 위에서 르네티아 디에르의 은빛 머리칼은 피와 오물로 엉켜 붙어 있었다. 손목을 파고드는 육중한 쇠사슬보다 더 아픈 것은 목덜미를 누르는 차가운 목재 틀의 감촉이었다.
"디에르 공작가의 죄인, 르네티아 디에르. 황실 모독 및 대역죄의 혐의로 참수형에 처한다!"
집행관의 칼칼한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지자 군중은 야유를 퍼부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제국 사교계의 꽃이자 디에르 공작가의 수석 영애로 숭앙받던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쏟아지는 것은 냉소와 침 뱉음뿐이었다.
르네티아는 피투성이가 된 고개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처형대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단상 위 화려한 귀빈석에 앉아 있는 두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제국 1황태자 체이스 에테르니아. 그리고 르네티아의 동생이자 공작가의 양녀 이엘라 디에르.
체이스는 오만한 표정으로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이엘라는 레이스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린 채 가련하게 눈물을 짓는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수건 너머로 살짝 드러난 이엘라의 분홍빛 입술은 분명 잔혹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가련한 척, 피해자인 척하며 나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여우 같은 년.'
공작가의 비밀 장부를 조작해 황태자에게 바친 것도 이엘라였다. 아버지와 가문의 기사들을 억울한 모함에 빠뜨려 단사하게 만든 것도 모두 저 여자의 짓이었다. 그리고 르네티아를 짝사랑하는 척하며 뒤로는 이엘라와 음모를 꾸민 자가 바로 황태자 체이스였다.
"도끼를 올려라!"
집행관의 신형이 움직였다. 르네티아는 쇠사슬에 묶인 주먹을 쥐어틀었다. 붉은 눈동자 속에서 뼈에 사무친 증오가 이글거렸다.
저들을 죽일 수만 있다면. 내 손으로 저 가식적인 목을 비틀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집행!"
묵직한 쇠날이 밧줄을 떠나 아래로 둔탁하게 낙하했다.
스륵, 서늘한 바람을 가르는 소리.
이어 목덜미의 피부가 찢어지고 뼈가 잘려 나가는 생생한 고통이 뇌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시야가 360도로 뒤집히며 자신의 핏물 젖은 몸뚱이가 털썩 무너지는 모습이 보였다. 단상 위에서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이엘라의 미소가 마지막으로 눈에 새겨졌다.
그것이 르네티아 디에르의 첫 번째 삶의 끝이었다.
"컥! 헉...!"
르네티아는 숨을 내지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허파가 찢어질 듯한 호흡과 함께 손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목덜미였다. 칼날에 베여 나가던 그 끔찍한 감촉이 아직도 피부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손가락이 미친 듯이 목을 문질렀다.
하지만 손끝에 닿은 것은 잘려 나간 핏덩이가 아니었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살결 그리고 얇은 비단 잠옷의 감촉이었다.
"하아, 하아...."
르네티아는 거친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흙탕 냄새와 피비린내로 진동하던 처형장이 아니었다.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감도는 방.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따스한 아침 햇살과 벽면에 걸린 화려한 태피스트리.
디에르 공작 저택에 위치한 그녀의 침실이었다.
"내가... 살아있다고?"
르네티아는 떨리는 손으로 침대 옆에 놓인 은거울을 집어 들었다.
거울 속에는 피범벅이 되었던 죄수복 대신 깨끗한 은발을 늘어뜨린 소녀가 서 있었다. 붉은 눈동자에는 피로와 절망 대신 새하얀 충격이 감돌고 있었다. 흉터 하나 없이 매끄러운 목덜미.
르네티아의 시선이 탁자 위 탁상달력으로 향했다.
[에테르니아 제국력 521년 4월 15일]
4월 15일.
르네티아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오늘은 바로 그녀의 열여덟 번째 생일날이었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기 정확히 5년 전의 날짜였다.
"아가씨! 깨어나셨습니까?"
시녀 마리아가 하얀 쟁반에 차를 받쳐 들고 문을 열며 들어왔다. 마리아의 얼굴을 본 르네티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리아 역시 3년 뒤 이엘라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매질을 당해 죽은 시녀였다.
"마리아...?"
"예, 아가씨. 어머, 어디 불편하신가요? 얼굴이 너무 파리하십니다."
마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쟁반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르네티아는 자신의 손을 감싸 쥐는 마리아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꿈이 아니었다. 환각도 아니었다.
그 끔찍했던 5년의 세월, 가문의 몰락,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단두대의 칼날까지. 모든 비극이 시작되기 전인 열여덟 살의 아침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아가씨, 오늘 생일 연회를 위해 이엘라 영애께서 아침 일찍부터 연회장 장식을 직접 챙기고 계십니다. 역시 자매의 우애가 깊으십니다."
마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전한 말에 르네티아의 붉은 눈동자가 순간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우애? 이엘라가?
르네티아는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18세 생일날 연회는 이엘라가 사교계 귀족들 앞에서 르네티아를 '동생을 구박하는 오만한 공작 영애'로 만들기 위해 첫 덫을 놓았던 날이었다. 당시 르네티아는 이엘라의 가식적인 행동에 짜증을 내다가 귀족들의 비난을 샀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르네티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기억이 있었다. 원수들이 어떤 가면을 쓰고 접근하는지 그들이 어디서 어떤 모략을 꾸미는지 5년간의 모든 기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마리아."
"예, 아가씨."
"가장 화려하고 우아한 드레스를 준비해."
르네티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목덜미를 가지런히 덮는 은발을 쓸어 넘기는 그녀의 눈빛은 이미 18세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오늘 연회는... 아주 재미있어질 테니까."
공작 저택의 메인 연회장은 이미 황실과 고위 귀족들이 보내온 꽃바구니와 화려한 샹들리에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르네티아 언니!"
연회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나비처럼 달려왔다. 이엘라 디에르였다.
17세의 이엘라는 사랑스러운 핑크빛 머리칼과 강아지처럼 젖은 눈망울을 굴리며 르네티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겉보기엔 그저 언니를 경애하는 순진무구한 동생의 모습이었다.
"언니, 생일 축하해요! 오늘을 위해 제가 밤을 새워가며 연회장 장식을 준비했어요. 언니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 혹시 부족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이엘라의 목소리는 은연중에 주변 귀족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언니를 위해 밤을 새운 가련하고 착한 동생.' 주위의 몇몇 부인들이 이엘라를 향해 아낌없는 찬사의 눈빛을 보냈다. 동시에 르네티아가 또 다시 이엘라에게 차갑게 굴지 않을까 감시하는 눈초리도 섞여 있었다.
르네티아는 자신을 움켜쥔 이엘라의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단두대 위에서 레이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비웃던 그 손이었다. 르네티아의 가슴속에서 밑바닥부터 끓어오르는 증오가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저 목을 틀어쥐고 비틀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하지만 르네티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대신 은은하고 완벽한 귀족적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밤을 새웠다고 이엘라?"
"네, 언니. 언니의 기분을 맞춰드리고 싶어서..."
"안타깝구나. 공작가의 수석 영애인 나의 생일 연회를 입양된 지 1년밖에 안 된 네가 밤을 새우며 직권으로 챙기다니. 저택의 수석 시녀장과 관리인들이 제 할 일을 잃어 당황했겠어."
"네...?"
이엘라의 동그란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경악으로 물들었다.
르네티아는 이엘라의 손을 부드럽게 떨쳐내며 주위에 서 있던 귀족들을 향해 우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더구나 체통을 아는 영애라면 가문의 체면이 걸린 큰 행사를 독단으로 처리하기보다 시녀장의 보좌를 받는 법이란다. 마음은 고맙지만 네 미숙함 때문에 연회 준비에 차질이 생겼다면 아버님께서도 속상해하셨을 거야."
순간 주변 귀족들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르네티아의 말은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공작가의 정통 후계자인 르네티아를 두고 입양아인 이엘라가 저택의 관리 권한을 넘어 독단으로 굴었다는 점을 아주 품격 있게 꼬집은 것이었다.
"어... 언니, 저는 단지 언니를 위해서..."
이엘라의 얼굴이 희게 질려가며 눈물이 핑 돌았다. 평소 같으면 르네티아가 "네까짓 게 뭔데 나서냐"라며 화를 내야 정상이었다. 그러면 이엘라는 피해자인 척 눈물을 흘려 르네티아를 악녀로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르네티아는 철저한 품위와 명분으로 이엘라의 가식을 한순간에 '주제넘은 독단'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무슨 일이지?"
그때 연회장 입구에서 당당하고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 제국의 1황태자 체이스 에테르니아였다. 체이스는 화려한 제복 차림으로 걸어와 자연스럽게 이엘라의 곁에 섰다. 그리고는 르네티아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르네티아, 18세 생일날부터 동생에게 핀잔을 주는 건가? 이엘라가 그대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곁에서 보았거늘."
체이스의 등장에 이엘라는 기다렸다는 듯 황태자의 소매를 잡으며 가련하게 고개를 숙였다.
체이스는 자신이 르네티아의 짝사랑 상대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과거의 르네티아는 체이스의 미움을 받을까 봐 황태자 앞에서는 늘 쩔쩔매며 이엘라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곤 했다. 체이스는 이번에도 르네티아가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저자세를 취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르네티아는 체이스를 바라보며 서늘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처형대 위에서 와인 잔을 들고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오만한 남자. 르네티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전하, 오해하셨습니다."
"오해?"
"황실의 법도와 공작가의 체통을 가르치는 것은 핀잔이 아니라 언니로서의 의무입니다. 전하께서도 차기 황제로서 제국의 법도를 중시하시니 제 뜻을 이해하시겠지요. 설마 황태자 전하께서 가문의 규율을 무시하는 몰상식한 행동을 옹호하시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체이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르네티아는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태도로 체이스의 청혼자다운 환상을 산산조각 냈다. 체이스가 여기서 이엘라를 편들면 스스로 '제국의 법도와 가문의 규율을 무시하는 황태자'가 되는 꼴이었다.
"그... 그건 아니다만."
체이스는 헛기침을 하며 이엘라에게서 슬그머니 떨어졌다. 이엘라는 눈동자를 커다랗게 굴리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르네티아는 두 사람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살짝 기울였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5년 뒤 자신을 단두대로 보낸 원수들. 르네티아는 그들의 가식을 하나씩 벗겨내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가장 처참한 바닥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목덜미에 남아있는 서늘한 참수의 감촉이 르네티아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피의 복수가 이제 막 시작되었고 이 연회장이 그 첫 무대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