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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약사는 탑 보상으로 병원비를 갚는다4화

대공가 약사는 탑 보상으로 병원비를 갚는다

대공가 약사는 탑 보상으로 병원비를 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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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상계된 영수증

휴대폰 화면의 숫자가 완전히 멈췄다.

[보상 상계 완료] 도원종합병원 한미라 환자 1개월분 치료비 및 차기 발주 보증금 정산 완료.

잔여 미납금: 0원 / 차기 투약 정상 진행.

상계 출처: 탑 보상 특별정산 원장 Ledger-Gate-1F-Apothecary

서이린은 떨리는 손끝으로 화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매달 심장을 옥죄던 18,640,000원이라는 붉은 미납액이 거짓말처럼 검은색 영(0)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다음 달 투약 예정이던 고가 면역 조절제 SB-RX-417의 원내 발주가 정상 승인되었다는 파란색 표식이 선명했다.

손바닥 안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윤도겸이었다.

이린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선배."

— 이린아! 너 지금 어디야? 무사한 거지?

도겸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분함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서류가 거칠게 넘어가는 소리와 키보드 타건음이 어지럽게 섞여 들려왔다.

— 방금 도원종합병원 원무과 전산망을 확인했는데 어머니 미납 치료비 1,864만 원이 전액 처리 완료로 변경됐어. 결제 수단이 현금 입금도 아니고 신용카드도 아니야. Ledger-Gate-1F-Apothecary라는 특수 채권 원장으로 상계 처리됐다고 뜨는데 이게 대체 무슨 돈이야?

이린은 모니터 옆에 놓인 퇴직 물품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진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다른 세계의 탑 1층 약방에 다녀왔고 피가 얼어붙는 북부 대공의 발작을 차 한 잔으로 진정시켜 병원비를 깎아 냈다는 말을 믿어 줄 변호사는 세상에 없었다.

"선배, 당황하셨을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세린바이오 재직 중에 신청해 뒀던 희귀 질환 임상 보상 이의신청 건이 이번 퇴직 처리 과정에서 특례 상계권으로 승인된 거예요."

— 임상 보상 특례 상계권?

도겸이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 세린바이오에 그런 내부 보상 규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산에 찍힌 상계 기관 코드는 일반 제약사 형식이 아니야. 게다가 지금 세린바이오 인사팀과 인수합병 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너 퇴직 처리하면서 SB-RX-417 접근 로그를 비정상적으로 뒤지고 있어. 혹시라도 네가 회사 내부 채권이나 특허 관련 권리를 건드렸을까 봐 확인하려는 눈치야.

이린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제국에서 보았던 검은 양피지 계약서의 하단 번호와 세린바이오 서버의 임시 캐시 파일명이 똑같이 연결되어 있었다. 현실의 제약사 역시 탑의 원장 움직임에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있는 셈이었다.

"회사 자산에 손댄 건 전혀 없어요. 정상적인 노동과 합의된 계약 절차를 거친 보상이에요. 어머니 치료제 발주가 정상 승인된 것만으로도 일단 한숨 돌렸어요."

— …네가 그렇게 확신한다면 다행이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문서나 요구가 오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내가 원무과 전산에 등록된 상계 원장 코드의 법적 효력을 따로 추적해 볼게.

"고마워요 선배. 날 밝으면 제가 어머니 뵙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이린은 책상에 엎드려 짧은 숨을 내쉬었다.

손가락 끝에는 여전히 백은 약방 조제대에서 맡았던 서리쑥의 알싸한 향과 찻잔의 온기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환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진짜 방법을 손에 쥐었다.


새벽 다섯 시 반. 이린은 도원종합병원 6층 병동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의 복도는 정적에 잠겨 있었다. 간호사실 데스크에 들러 확인하자 당직 간호사가 전산 차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미라 님 보호자분이시죠? 오늘 아침 예정대로 SB-RX-417 투약 준비 들어갑니다. 원무과에서 승인 처리 완료 통보가 새벽에 바로 넘어왔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린은 조용히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가 침대에서 한미라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을 느끼고 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린이니? 이 새벽에 어쩐 일이야."

"엄마, 오늘 아침 투약 일정 정상적으로 들어간대. 다음 달 치료도 차질 없이 진행될 거야."

이린은 침대 곁 의자에 앉아 미라의 마른 손을 잡았다.

한미라의 눈에 놀라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스쳤다. 미라는 딸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았다. 피곤에 지쳐 있으면서도 눈빛만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해져 있었다.

"원무과에서 큰돈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너 혹시 무리해서 빚낸 거 아니지?"

"빚 아니야. 내가 일해서 정당하게 받아 낸 보상금으로 처리한 거야. 심사팀에서 일하면서 내가 챙겨야 할 몫을 찾아낸 거니까 엄마는 아무 걱정 말고 치료만 잘 받아."

"이린아…"

"이제 돈 때문에 약 쉬겠다는 말 하지 마. 내가 다 해결할 수 있어."

미라는 딸의 손등을 말없이 쓸어내렸다. 미라의 깊은 눈동자 속에 과거 7년 전의 어두운 기억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으나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린은 어머니가 잠드는 것을 지켜본 뒤 신림동 원룸으로 돌아왔다.

시계는 오전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원룸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 이린은 책상 앞에 앉아 방수 메모지와 굵은 심의 수성 펜, 세밀한 계량 스푼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현실의 기본 상비약을 가방에 챙겼다.

손목 위 허공에 반투명한 정산 창이 떠 있었다.

현실 체류 쿨타임 충전 중: [05:14:22] 남음.

체류 한도 복구 시 백은 약방으로 재입장 가능.

하루 최대 12시간의 체류 제한.

제국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만큼 현실에서의 시간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이린은 알람을 맞추고 침대에 누워 깊은 잠을 청했다.

오후 한 시가 되자 정산 창의 푸른 글씨가 밝게 빛났다.

현실 체류 12시간 경과. 탑 연결 구역 백은 약방으로 재입장 가능.

임시 점주 서이린, 입장을 승인하시겠습니까?

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단단히 메고 숨을 가다듬었다.

"승인."

공간이 다시 한번 뒤틀리며 원룸의 풍경이 흐릿하게 녹아내렸다.


눈을 떴을 때 코끝을 스친 것은 장작 타는 냄새와 차가운 눈바람이었다.

백은 약방의 조제대 뒤편이었다.

창밖은 여전히 눈이 흩날리는 북부 대공령의 오후 풍경이었다. 벽난로에는 불이 지펴져 있었고 찻집 테이블 위에는 두꺼운 장부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약사님!"

장부를 정리하던 리비아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에 쥐고 있던 깃펜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정말… 정말 다시 오셨군요! 어젯밤에 몸이 투명해지면서 사라지셔서 영영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리비아의 눈가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표정은 벅찬 안도감으로 가득했다.

"약속했잖아요. 찻집 상담 대장은 정리했나요?"

"네! 말씀하신 대로 지난 1년간 약방을 찾아온 대공령 귀족들과 상인들의 상담 일지를 날짜별로 전부 분류해 뒀어요."

리비아는 가죽 표지로 묶인 두꺼운 대장 세 권을 조제대 위로 올렸다.

이린은 외투를 벗어 걸어 두고 조제대 서랍에서 자신이 챙겨 온 펜과 메모지를 꺼냈다.

"대공 전하의 상태는요?"

"어젯밤 약사님이 주고 가신 2차 차 덕분에 발작이 완전히 멈췄어요. 맥박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손끝의 서리도 더 이상 번지지 않는대요. 시종장이 아침에 다녀가면서 전하께서 48시간 동안 대공저 집무실에서 안정을 취하실 거라고 전해 왔어요."

"다행이네요. 하지만 안심하긴 일러요. 48시간이 지나면 몸 안에 잠들어 있던 차가운 마력이 다시 뭉칠 테니까 내일 밤이 되기 전에 유지 처방용 차를 미리 조제해 둬야 합니다."

이린은 조제대 뒤편 약재장을 살폈다.

그러나 서리쑥이 담겨 있던 유리병은 완전히 비어 있었고 은실 뿌리 보관함에도 부스러기 몇 조각만 뒹굴고 있었다.

"약재 재고가 없네요."

리비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게… 문제가 생겼어요. 약방 폐업이 보류되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황실 공인 약재상인 에르네스트 상단에서 사람을 보냈어요. 전 점주님이 남긴 외상 채무를 핑계로 서리쑥과 은실 뿌리 납품 단가를 기존의 세 배로 올려 부르고 있어요. 그 가격을 내지 않으면 북부 시장 전체에서 약재 공급을 틀어막겠다고 협박했어요."

"외상 채권에 독점 공급망을 악용한 폭리군요."

이린은 리비아가 정리한 상담 대장을 넘겼다.

손가락이 종이 위를 빠르게 훑었다. 귀족 환자들의 증상, 처방된 약차의 종류 그리고 지불된 청구 금액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루벤 백작가: 황실 안정차 30일분 복용 후 사지 냉증 호소 -> 추가 온열 시럽 청구 (금화 40닢)

헤이즈 남작가: 수면 불안 처방 -> 황실 인증 백은차 60일분 복용 후 마력 역류 증상 발생

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처방들을 봐요. 대공령 귀족들에게 처방된 황실 약차는 진정이 아니라 중독성과 미세한 냉기를 몸속에 누적시키는 조합이에요. 증상이 악화되면 더 비싼 온열 시럽과 정화수를 사게 만들어서 결국 가문의 의료채권을 황실 조합에 넘기도록 유도한 겁니다."

리비아가 경악하며 입을 가렸다.

"그럼… 황실 의료조합이 일부러 환자들을 병들게 만들었다는 뜻인가요?"

"치료가 아니라 채무를 늘리기 위한 구조적 사기예요. 에르네스트가 약재 값을 세 배로 올린 것도 우리가 독자적인 정산 처방을 내리지 못하게 약방을 말려 죽이려는 수작입니다."

이린은 단호하게 대장을 덮었다.

"에르네스트에게 돈을 주고 약재를 살 이유는 없습니다. 백은 약방 자체의 비축 창고는 어디 있죠?"

리비아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약방 구석 의상실 코너를 바라보았다. 두껍게 쌓인 모직 원단 롤 뒤편,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던 구석 바닥이었다.

"점주님이 실종되기 직전에… 제게 신신당부하셨어요. 황실 감사관이나 약재상 앞에서는 절대 이 문을 열지 말라고요. 이 아래는 평범한 지하실이 아니에요."

리비아가 원단 더미를 치우자 묵직한 참나무로 짜인 바닥문이 드러났다. 문 위에는 청동으로 주조된 정교한 마력 문양과 육중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이 아래가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데요?"

"점주님 말씀으로는… 탑의 1층 보상 보관실과 직접 닿아 있다고 하셨어요."

이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제대 앞으로 다가서자 손등 위의 정산 창이 푸른빛을 강하게 뿜어내며 반응했다.

구역 인식: 백은 약방 지하 연결 통로.

탑 1층 약재 보상 보관소 연동 구역 감지.

미정산 약재 및 원본 장부 파편 잔류 확인.

임시 점주 권한으로 봉인 해제 가능.

"열 수 있어요."

이린은 망설이지 않고 바닥문 앞으로 걸어갔다.

조제대에서 가져온 감정용 보라색 램프의 시약을 자물쇠 틈으로 떨어뜨리자 푸른 마력 선이 양 갈래로 갈라지며 철컥 소리와 함께 거대한 빗장이 풀렸다.

바닥문을 들어 올리자 지하로 이어지는 서늘한 돌계단이 나타났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공기는 퀴퀴한 먼지 냄새가 아니라 새벽 숲속처럼 청량하고 차가운 약초 향을 머금고 있었다.

이린은 램프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리비아가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계단 끝에 다다르자 약방 1층보다 훨씬 넓은 거대한 지하 석실이 펼쳐졌다.

자연석 벽면을 따라 수백 개의 마법 보관함이 은은한 은빛을 내뿜으며 늘어서 있었다. 공기 중의 습도와 온도가 완벽하게 제어된 특수 저장 공간이었다.

각 보관함 위에는 반투명한 시스템 텍스트가 겹쳐 떠올랐다.

최상급 서리쑥: 50단 보관 중 (순도 98%)

야생 은실 뿌리: 30근 보관 중 (마력 전도율 최상)

무향 홍차 원엽: 10상자 보관 중

리비아가 넋을 잃고 보관함을 바라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세상에… 북부 최고의 약초 축제에서도 보기 힘든 순수한 약재들이 이렇게나 많이 쌓여 있어요! 에르네스트가 시장에서 파는 약재들보다 품질이 열 배는 더 좋아요!"

"품질만 좋은 게 아니에요. 황실의 독소 문양이나 오염 시약이 전혀 묻지 않은 순정품이에요."

이린은 보관함에서 필요한 만큼의 서리쑥과 은실 뿌리를 정갈하게 꺼내 바구니에 담았다.

그때 지하 석실 중앙에 놓인 석조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가죽 바인더 하나가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에 거칠게 찢긴 양피지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이린은 램프를 비추며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전 점주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다급한 필적이었다.

황실 의료조합이 대공가의 저주 담보 계약을 조작하여 북부 병원의 소유권을 불법 이전했다. 원본 장부의 사본을 탑 1층 보관소에 분산 은닉함. 백은 약방의 정식 점주만이 원장을 열람할 자격을 얻는다.

글귀 아래에는 세린바이오의 파일명과 동일한 문양이 찍혀 있었다.

Ledger-Gate-1F-Apothecary

이린의 손끝에 찌릿한 전율이 흘렀다.

카이엘의 저주, 대공가의 몰수된 병원, 어머니의 미납 치료비 그리고 현실 제약사의 비밀이 모두 하나의 장부에서 뻗어 나온 줄기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약사님, 약재는 다 챙기셨나요?"

리비아의 부름에 이린은 양피지를 가슴 포켓에 소중히 갈무리했다.

"네. 이제 위로 올라가서 전하의 2차 유지 차를 준비하죠. 이 정도 품질의 약재라면 내일 밤 발작도 문제없이 안착시킬 수 있어요."

두 사람이 약재 바구니를 들고 지하실 계단을 올라와 바닥문을 닫는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약방 앞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육중한 쇠붙이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문밖에서 기름지고 오만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은 약방 안에 새 점주가 들어앉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황실 인증 약재상 에르네스트 베일입니다. 밀린 외상값 정산과 약재 독점 공급 계약 건으로 왔으니 문을 여시지요!"

리비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린은 차분하게 앞치마를 고쳐 매고 조제대 위의 펜을 집어 들었다.

"마침 잘 왔네요."

이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안 그래도 청구서 항목을 따져 볼 참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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