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 영애의 새벽 찻집

1화: 파혼 뒤 첫 손님
이벨라는 약혼 반지를 상자에 넣지 않았다. 반지는 아직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황태자는 그 반지를 돌려 달라고 하지 않았고, 그녀는 먼저 벗을 생각이 없었다. 파혼을 통보받은 사람이 서둘러 예의를 지키는 장면은 보기 좋을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영애, 전하께서는 더는 혼인을 진행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왕실 사절이 편지를 내려놓았다. 왕세자 레온의 도장은 선명했다. 이유는 세 문장뿐이었다. ‘상호 이해가 부족함. 혼인 계약의 목적이 달성되기 어려움. 양가 합의에 따라 파혼함.’ 마지막 문장은 거짓이었다. 벨로르 공작은 합의한 적이 없었다.
이벨라는 사절에게 차를 권했다. 그는 거절했다. 그녀는 잔을 치우지 않고 기다렸다. 사절은 빈손으로 왔으면서도 자신이 불쾌한 손님이 아니라는 듯 목을 가다듬었다.
“답신은 오늘 중으로 받겠습니다.”
“전하께 전해 주세요. 제 쪽에서는 파혼에 동의합니다. 다만 합의가 있었다는 문구는 고쳐야 합니다.”
“이미 공문에 반영됐습니다.”
“그럼 제 서명 없이 반영된 문구라는 사실도 기록해 주세요.”
사절은 편지를 거둬 갔다. 그가 떠난 뒤, 이벨라는 반지를 벗었다. 손가락에는 얇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원작 소설 속 이벨라는 파혼을 받아들이지 않고 왕세자비 후보를 모함하다가 몰락했다. 그녀는 그 결말을 기억했다. 하지만 원작의 세부는 흐릿했다. 이벨라가 어떤 말을 했는지, 무엇을 숨겼는지, 누구에게 누명을 씌웠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제 악역이 시작되는 건가.”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소설의 악역이라면 왕세자를 붙잡고, 새로운 약혼 상대를 괴롭힐 차례였다. 하지만 이벨라는 그런 이야기가 자신에게 일어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파혼은 끝이었다. 다음 장면을 누가 쓰는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날 오후 그녀는 공작저의 별채를 정리했다. 오래전 어머니가 작은 찻방으로 쓰던 공간이었다. 창문은 좁고, 거리 쪽 문은 낡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떼어 내고, 낮은 탁자 세 개를 닦았다. 하녀들이 먼지를 쓸어 내는 동안 이벨라는 차 통을 분류했다. 말린 장미, 훈연한 보리, 감귤 껍질, 산사 열매. 찻잎마다 향이 달랐다. 그녀는 각각 작은 종이에 이름과 우림 시간을 적었다.
“정말 여기서 장사를 하실 거예요?” 미라가 물었다.
미라는 전직 궁정 하녀였다. 손님 앞에서는 밝은 얼굴을 했지만, 왕실 사람의 발소리를 들으면 어깨가 먼저 굳었다. 이벨라는 그녀를 고용할 때 일주일 동안의 시험 기간을 두었다. 이제 그 기간은 끝나고 있었다.
“응. 새벽에만 열 거야. 손님이 차값 대신 고민 하나를 말하는 방식으로.”
“고민을 말하지 않으면요?”
“그냥 차를 마시고 가면 돼.”
“비밀을 캐내서 팔면 돈이 될 텐데요.”
“그럼 찻집이 아니라 정보상이 되겠지.”
미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보상은 오래 살기 어려워요. 찻집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그래서 낮에는 문을 닫을 거야.”
이벨라는 문 앞에 나무판을 달았다. 판에는 ‘새벽에만 엽니다. 한 잔은 차, 한 가지는 고민.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고 적었다. 비밀을 꺼내지 않는 손님을 위해 일반 가격도 작게 썼다. 미라가 글씨를 읽고 웃었다.
“귀족 손님이 이런 간판을 볼까요?”
“보길 바라는 사람도 있고, 들키지 않고 들어오길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
해가 진 뒤 이벨라는 찻집 문을 닫았다. 손님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새벽까지 탁자에 앉아 차를 우렸다. 냄비에 물을 끓이고, 찻잎을 재고, 다 식은 잔을 다시 씻었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미라가 먼저 창가로 갔다.
첫 손님은 새벽 세 시가 조금 지나서 왔다. 검은 망토를 입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 문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영업 중인가요?”
“네. 들어오세요.”
“차값은 고민을 말하는 거라고 적혀 있던데요.”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도 적혀 있습니다.”
여성은 한쪽 구석 자리에 앉았다. 이벨라는 훈연한 보리차를 내놓았다. 목이 잠긴 사람에게 부담이 적은 차였다. 여성은 잔을 들고 향을 맡다가 손을 멈췄다.
“궁정에서 일해요?” 이벨라가 물었다.
여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찻잔을 내려놓고, 검은 장갑을 벗었다. 손바닥에 잉크가 묻어 있었다. 손가락 끝에는 종이를 오래 넘긴 흔적이 있었다.
“아침이 되면 내가 쓴 문서가 누군가를 반역자로 만들 거예요.”
“그 문서는 이미 제출됐나요?”
“아직요. 제출하면 승진할 수 있어요. 거절하면 집으로 돌아갈 돈도 없습니다.”
“그 문서가 거짓인가요?”
“전부 거짓은 아니에요. 북부로 보내야 할 군량이 중앙 창고에 남았다는 숫자는 맞아요. 다만 그 숫자를 바꾼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이벨라는 손님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허락한 만큼만 들었다. “그럼 당신이 작성한 문서에는 무엇이 적혀 있나요?”
“숫자와 서명뿐이에요. 제가 본 것은 회색 장부의 표지와, 누군가 장부를 서쪽 기록실로 옮기는 모습뿐입니다.”
여성은 그 뒤로 말을 멈췄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조언이 아니라, 자신이 본 일을 누군가가 기억해 주는 것 같았다. 이벨라는 작은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말한 내용을 기록해도 될까요? 이름과 소속은 적지 않겠습니다. 이 기록을 어떻게 쓸지는 나중에 다시 허락을 받겠습니다.”
“지금 말한 것만 적어 주세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마세요.”
이벨라는 손님의 말을 그대로 적었다. 추측은 넣지 않았다. 여성이 종이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차를 마저 마시고 동전 두 닢을 탁자에 놓았다.
“차값이 아니라는 규칙 아니었나요?”
“오늘은 고민을 말했지만, 찻집도 유지해야 하잖아요.”
여성은 고개를 숙이고 문밖으로 나갔다. 미라가 창으로 그녀의 방향을 살폈지만, 뒤쫓지는 않았다. 이벨라는 종이를 작은 상자에 넣고 봉했다. 상자에는 손님이 직접 접은 종이만 보관했다.
“아가씨, 이걸로 왕실을 조사할 건가요?” 미라가 물었다.
“아직은 아니야. 이 사람은 기록이 다른 데 쓰이지 않길 원했어.”
“그럼 누가 책임지죠?”
“우리가. 그리고 그 사람이 나중에 허락하면 함께.”
다음 손님은 새벽 네 시에 왔다.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망토도 장갑도 없이 들어와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손등에 칼자국이 있었지만, 검은 차를 주문했다.
“나는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첫마디로 말했다.
이벨라는 차를 따르며 물었다. “누가 배신했다고 했나요?”
“신문에 그렇게 났더군요. 내 이름은 아니지만, 다들 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하시지 않아도 돼요.”
남성은 잔을 잡지 않았다. “나는 궁정 문서고의 경비였습니다. 회색 표지의 장부를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 내 동료가 감옥에 갑니다.”
“누가 장부를 옮겼나요?”
“그걸 말하면 동료가 아니라 내 가족이 위험해집니다.”
이벨라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차를 마시고, 아무 비밀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났다. 미라는 문이 닫힌 뒤 창가에서 한숨을 쉬었다.
“저 손님은 뭔가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말하지 않기로 했어.”
“그럼 단서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 사람은 우리의 수사 도구가 아니야.”
미라는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럼 우리에게 남는 건 뭔가요?”
“믿을 수 있다는 기록.”
아침이 되기 직전 찻집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췄다. 마차 문이 열리고, 황태자 레온이 혼자 내렸다. 그는 평상복 위에 검은 외투를 걸쳤다. 경호원은 거리 건너편에 서 있었다. 레온은 간판을 올려다보고 문을 두드렸다.
미라가 문을 열지 말라고 속삭였다. 이벨라는 반지를 손바닥에 쥐었다. 파혼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문을 열자 레온은 찻집 안으로 들어와 어제와 다르게 행동했다. 그는 메뉴를 읽고 차를 주문한 뒤, 구석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손님으로 오셨나요?” 이벨라가 물었다.
“아니요. 조사하러 왔습니다.”
“그럼 찻집 규칙은 적용되지 않겠네요.”
“손님으로 앉아도 되겠습니까?”
레온은 잔을 받기 전에 먼저 허락을 구했다. 이벨라는 보리차를 내주었다. 그는 잔을 들지 않고 탁자에 놓인 손님 기록 상자를 보았다.
“안에 든 기록을 볼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왕실 군량의 비밀과 관련됐을 수 있습니다.”
“손님이 공개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레온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분에게 직접 요청하겠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모르시잖아요.”
“그래도 요청할 수는 있습니다.”
그는 상자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벨라는 그 사실을 기억해 두었다. 레온은 잠시 차를 마시고는, 자신이 궁정 회계 기록을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서쪽 기록실로 이동한 장부가 하나 사라졌고, 마지막 인수 기록에 벨로르 가문의 이름이 있다고 했다.
“제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직 모릅니다.”
“전하의 파혼 편지에는 제가 신뢰를 잃었다고 적혀 있던데요.”
“그 편지는 내가 보냈습니다. 신뢰를 잃었다는 문장은 쓰지 않았습니다.”
이벨라는 파혼 공문을 꺼냈다. 레온은 문장을 읽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알지 못한 채 왕실 사절이 이유를 덧붙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저는 그 문장을 바로잡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누가 썼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 전에 제가 왜 파혼에 동의했는지 물어보셔야죠.”
레온은 잔을 내려놓았다. “왜 동의했습니까?”
“이제 전하의 약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왕실이 제 이름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려고요.”
“그럼 찻집은 왕실을 공격하기 위해 열었습니까?”
“제 집의 빈 별채를 활용한 거예요. 차를 좋아하고요.”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새벽 종이 울리자 레온은 동전을 놓고 일어섰다. 문 앞에서 그는 뒤돌아보았다.
“내일도 와도 됩니까?”
“차를 마시러 오신다면요.”
“조사하러 오면요?”
“그때는 문을 닫을 거예요.”
레온은 웃지 않았지만, 입가가 조금 풀렸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 이벨라는 종을 울려 손님이 떠났음을 표시했다. 미라는 잔을 치우며 낮게 말했다.
“그분이 정말 매일 올까요?”
“그건 그분이 결정할 일이야.”
이벨라는 파혼 반지를 서랍에 넣었다. 손가락 자국은 옅어지고 있었지만, 공문에 적힌 거짓 문장은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찢지 않았다. 대신 날짜와 수신인을 적어 기록 상자에 넣었다. 원작의 이벨라라면 편지를 불태웠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벨라는 증거를 남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