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는 내 일기를 읽는다

3화: 시험 답안의 주인
서린은 황태자의 문서함을 열기 전에 혜주와 학생회 서기에게 자리를 지켜 달라고 했다. 이안은 서랍 열쇠를 책상 위에 놓았다. 그는 그 안에 든 것이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확인할 자료만 꺼내고, 나머지는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서린이 말했다.
“동의합니다.”
문서함 안에는 계승 시험의 옛 답안지와 학생 이름이 적힌 명부가 있었다. 답안지에는 이안의 글씨가 아닌 필체로 왕실 정책의 정답이 쓰여 있었다. 명부에는 시험에 응시한 학생이 열두 명 있었지만, 제출된 답안은 열세 장이었다.
혜주는 답안의 종이와 잉크를 비교했다. 추가된 답안은 다른 날 작성됐고, 작성자의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서린은 그 종이의 접힌 자국을 기억했다. 지난 강의에서 잘못된 배급표를 받았을 때 함께 끼워져 있던 자료였다.
“누군가 황태자의 답안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이안은 문서를 바라봤다. “이 답안이 공개되면 나는 시험을 부정하게 됩니다.”
“전하가 답안을 쓰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면 돼요.”
“그 증거가 사라지면?”
“그럼 원본을 보존하고, 누가 접근했는지 찾겠습니다.”
이안은 침묵했다. 이 문서가 공개되면 왕실은 시험을 취소할 수 있고, 북부 배급 계획을 다시 검토해야 했다. 반대로 숨기면 부정한 답안이 그의 이름으로 남을 터였다.
그는 답안지에 자신의 서명을 적어 본 뒤 어린 시절 서명과 비교했다. 획의 시작은 비슷했지만, 추가 답안에는 그가 어릴 때 아직 쓰지 못하던 글자가 있었다. 누군가 나중에 작성한 문서였다.
“이걸 공식 조사에 넘기겠습니다.” 이안이 말했다.
혜주는 학생회가 입회한 사실도 함께 기록하자고 했다. 서린은 동의했다. 자료를 문서함에서 꺼낸 사람과 시각, 페이지 번호를 적었다. 이안은 학생회 서기가 적은 내용에 자신의 이름을 덧붙였다.
문서함 아래쪽에는 일기장이 들어갈 만한 빈 공간이 있었다. 서린은 이안에게 그 위치를 아는지 물었다. 그는 몰랐다고 답했다. 책은 누군가 넣었을 수도 있고, 일기장 자체가 옮겨 왔을 수도 있었다.
“일기장이 움직이는 조건을 확인해야 해요.”
“어떻게 시험하죠?”
“하루 동안 각자 어디에 보관했는지 기록해요. 일부러 옮기거나 숨기지는 말고요.”
이안은 자신의 서재에 두지 않겠다고 했다. 서린은 일기장을 학생회 기록실의 잠금 상자에 넣고, 세 사람이 각자 열쇠를 나누어 갖기로 했다. 누구도 혼자 열 수 없었다.
그들은 일기장 첫 페이지를 확인했다. 새 문장이 나타나 있었다. ‘황태자는 아직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서린은 이 문장이 이안의 서명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여러 번 썼다고 했다.
“이름을 쓰는 것과 자기 이름을 선택하는 건 다를 수 있어요.” 혜주가 말했다.
이안은 그 말을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이름을 쓸 때마다 황실의 서명을 따라야 했다. 어린 시절 일기장에도 ‘이안’이라고 쓰고 싶었지만, 교관은 왕세자 칭호를 먼저 연습하게 했다.
서린은 일기 문장에 해석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건 전하의 선택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일기가 대신 결정하지는 않겠죠.”
공개 계승 수업이 시작됐다. 이안은 북부 배급 계획을 발표하고, 원본 자료와 학교 자료의 차이를 제시했다. 교수는 질문을 허용했다. 한 귀족 학생은 이안이 문서함에서 답안을 훔쳐 논리를 짜 맞췄다고 비난했다. 서린은 문서함에서 발견한 답안의 기록을 공개했다. 그녀는 작성자가 누구인지 단정하지 않았지만, 이안의 필체가 아니라는 점을 설명했다.
“그럼 누가 썼습니까?” 학생이 물었다.
“아직 모릅니다. 조사 중입니다.”
“모른다면 황태자를 변호할 수 없겠네요.”
“저는 황태자를 변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서가 언제 작성됐는지 설명하는 학생입니다.”
수업은 잠시 중단됐다. 이안은 서린의 발언을 이용해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부정 답안이 자기 서재에서 발견된 만큼 관리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대신 원본 배급표의 수량을 공개하고, 북부 창고의 실제 수령량을 조사하겠다고 제안했다.
교수는 계승 시험 점수를 보류하고 자료 진위를 확인하기로 했다. 귀족 학생들은 반발했지만, 장학생들은 공개 검증을 지지했다. 혜주는 학생회에 출처 표기 규정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수업이 끝난 뒤 이안은 서린과 복도를 걸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쓰고 싶은 이름을 적어 보고 싶다고 했다. 서린은 그 선택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아도 된다고 답했다.
“당신은 일기장 문장을 믿습니까?” 이안이 물었다.
“일기장이 쓴 말은 읽지만, 사실인지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아요.”
“그럼 나에 대해서는요?”
서린은 잠시 걸음을 늦췄다. “전하가 보여 준 행동을 보고 판단할게요.”
그는 그 대답을 받아들였다. 황태자의 신분이 그녀의 답을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이 낯선 듯했다.
저녁 무렵 일기장은 학생회 기록실의 잠금 상자 안에 있었다. 세 사람은 입회 아래 상자를 열었다. 책은 사라지지 않았고 페이지에도 새 문장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상자는 잠겨 있었지만 일기장은 안에 없었다.
서린은 출입 장부를 확인했다. 밤새 기록실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 이안은 학교 경비를 불러 확인했고, 혜주는 학생회 서기가 가진 세 열쇠가 모두 제자리에 있는지 살폈다.
일기장은 황태자의 서재 책상 위에서 발견됐다. 표지에는 물방울 자국이 있었고, 새 문장이 적혀 있었다. ‘기억을 읽는 사람은 이름을 대신 쓴다.’
이안은 문장을 읽고 어린 시절 일기장을 꺼냈다. 지워진 이름 아래에서 종이 결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얇은 칼로 종이 가장자리를 들춰 냈다. 그 아래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글씨로 ‘이안’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건 제 글씨가 아니에요.”
“그럼 누가 대신 썼죠?” 서린이 물었다.
이안은 오래된 잉크를 살폈다. “내 어머니의 필체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안이 세 살 때 죽었다고 기록된 황태자비였다. 공식 기록에는 그녀가 황태자 이름을 쓰기 전에 사망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안은 일기장을 닫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글씨를 따라 자기 이름을 다시 적었다. 이번에는 황실 서명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썼다.
그 순간 일기장의 마지막 장이 저절로 열렸다. 새 문장은 짧았다. ‘내일, 이름을 쓴 사람이 돌아온다.’
서린은 어머니의 필체가 남은 페이지를 손으로 만지지 않고 빛 아래에 비췄다. 잉크가 종이를 얼마나 깊게 눌렀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이안은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가 오래 들여다보자, 그는 물을 한 잔 가져왔다.
“저는 어머니의 얼굴을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가 말했다. “초상화는 있지만, 그 초상화가 웃던 모습은 기억나지 않아요.”
서린은 일기장을 덮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해 주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그 말에 서린은 자기 어머니를 떠올렸다. 서린의 어머니는 가족을 떠난 뒤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서린은 그 침묵을 버림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이안의 말을 들으며, 기록이 없다는 사실과 마음이 없었다는 결론은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주가 학생회 서류를 들고 서재에 들어왔다. 계승 시험 답안지의 제출 명부가 조작됐다는 증거를 찾았다고 했다. 열두 명이 등록했는데 열세 장이 접수됐고, 추가 답안의 종이는 황태자 서재에서 나온 원본과 같았다. 그 종이를 납품한 서기는 지금 학교를 떠났다고 했다.
서린은 일기 문장을 다시 펼쳤다. ‘내일, 이름을 쓴 사람이 돌아온다.’ 그 말은 어머니를 뜻할 수도, 종이 납품 서기를 뜻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일기장을 창가에 두고 기다렸다. 그날 밤 문장은 변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학교 정문에 한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황태자의 어머니와 같은 이름을 가진 왕실 전직 서기관이었다. 여인은 이안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전하의 이름을 대신 썼습니다.”
이안은 왜 그랬는지 물었다. 여인은 자신이 황태자비의 명령을 받았고, 어린 이안이 계승 의무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이에게 이름을 쓰는 연습을 시키면서, 공식 답안에는 황태자 이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대신 서명했다.
“어머니는 제가 왕관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그분은 전하께서 선택할 시간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이안은 여인의 말을 믿으려 했지만, 공식 문서의 위조가 계승 시험과 배급표에 어떻게 쓰였는지는 확인해야 했다. 그는 그 시절 자신의 서명을 복제한 책임도 함께 기록하겠다고 했다. 여인은 협조하되, 황태자비의 남은 서신은 모두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서린은 그 요청을 존중했다. 그녀는 편지의 존재와 여인의 증언만 기록하고, 서신 내용은 공개 범위가 정해질 때까지 봉인하기로 했다. 여인은 서린을 바라보며 “당신은 그의 이야기를 대신 쓰지 않는군요”라고 말했다.
“그건 그가 직접 선택할 일이니까요.”
여인은 가방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황태자비가 남긴 문장 하나였다. ‘이안은 자신의 이름으로 답할 것이다.’ 그녀는 문장을 공개하는 데 동의했지만, 나머지 편지는 보관하기로 했다.
그날 공개 수업에서 이안은 부정 답안의 관리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이 작성하지 않은 답안으로 정책 점수를 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교수는 계승 시험을 다시 치르기로 했다. 북부 배급 자료는 학생회와 함께 공개 검토하게 됐다. 혜주는 장학생 대표로 검토단에 참여했다.
수업 뒤 이안은 서린에게 물었다. “내가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나와 이야기했을까요?”
“지금도 전하가 황태자라서 대답하는 건 아니에요.”
“그럼 무엇 때문이죠?”
서린은 일기장을 들어 보였다. “제 물건을 존중했고, 제게 선택권을 줬으니까요.”
그는 그 대답을 오래 생각했다. 서린은 자신이 그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일기장에 적힌 문장을 두 사람의 약속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며칠 뒤, 일기장의 이동 규칙이 다시 작동했다. 서린이 잠든 동안 책은 학생회 기록실에서 이안의 어머니 초상화 앞에 옮겨져 있었다. 표지 안쪽에는 새 문장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직접 말한다.’
초상화 뒤에서 봉투가 떨어졌다. 이안은 봉투를 바로 열지 않았다. 그는 서린에게 함께 읽을지 물었다. 그녀는 동의했고, 혜주를 증인으로 불렀다. 봉투에는 어머니의 편지와 왕실 계승 시험의 원본 명부가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계승 답안이 단순한 학업 평가가 아니라, 북부 곡물 배분과 왕위 계승을 함께 결정한다고 적혀 있었다. 시험의 정답을 바꾼 사람은 황태자를 대신해 답을 쓴 서기관이 아니었다. 그 서기관에게 답을 바꾸라고 지시한 이는 현재도 학교의 계승 평가위원이었다.
이안은 명부의 마지막 서명을 가리켰다. 그 이름은 황태자비의 동생이자 지금의 학교 총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