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 없는 장면에도 당신이 있었다

2화: 사라진 크레딧
희진은 오전 8시 10분에 답장을 보냈다. ‘장면은 출품에 사용해도 됩니다. 입 모양 대사는 없습니다. 침묵이 어떤 뜻인지는 정민 씨나 유나 씨가 정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유나는 메시지를 저장한 뒤 정민에게 전달해도 되는지 다시 물었다. 희진은 동의했다.
그들은 오전 8시 30분에 편집실에서 만났다. 배급 담당자 세원은 이미 출품 패키지를 만들고 있었다. 영화 파일은 어젯밤 저장된 버전 그대로였다. 엔딩 크레딧에는 촬영, 미술, 음악 이름이 차례로 올라갔고 자막 번역자는 없었다.
“왜 제 이름이 빠졌죠?” 유나가 물었다.
세원은 화면을 멈췄다. “계약서에 웹페이지 표기라고 되어 있어요.”
“제가 서명한 계약서에는 ‘번역 용역비’만 있습니다. 표기 장소는 정하지 않았어요.”
“그럼 더더욱 의무는 아니죠.”
정민은 세원을 바라봤다. “내가 처음 받은 계약서엔 크레딧이 있었는데.”
“최종 예산표에서는 빠졌어요. 번역료로 정리했어요.”
“그 변경에 내가 동의했나?”
세원은 폴더를 열어 최종 계약서를 보여 줬다. 정민의 서명이 있었다. 그는 화면을 한참 들여다봤다. 서명이 낯선 사람의 것처럼 보였다.
“이건 내가 서명했네요.”
“출품 마감 때문에 급하게 정리했어요.”
“그때 번역료를 올려 달라고 했는데, 크레딧을 뺀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세원은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 설명이 부족했어요. 그래도 출품을 늦추면 다음 상영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유나는 타임라인을 가리켰다. “크레딧을 넣는 데 20초면 돼요. 파일 전체를 다시 인코딩할 시간도 있습니다.”
세원은 마감까지 38분 남았다고 말했다. 프레임을 바꾸고, 자막 파일을 고정하고, 업로드용 영상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는 유나에게 “웹페이지에 이름을 넣고 지금 파일은 그대로 제출하자”고 제안했다.
“상영본에도 이름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럼 자막 검수가 늦어져요.”
“검수는 어젯밤 끝났습니다.”
“침묵 장면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잖아요.”
정민은 유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장면을 빼고 먼저 제출하면 안 될까요?”
유나는 그를 바라봤다. “희진 씨가 사용에 동의했어요. 침묵은 남기고 대사만 넣지 않으면 됩니다.”
“그럼 여섯 초를 그대로 두자는 거죠?”
“네. 배우의 의도가 그거니까요.”
“관객이 이해 못 하면요?”
“이해 못 할 가능성을 영화가 감당할지 감독이 정해야죠.”
정민은 잠시 말을 멈췄다. 희진에게 직접 전화했다. 그는 유나 대신 질문하지 않았다.
“희진 씨, 장면 사용과 침묵을 그대로 두는 것에 동의하나요? 제출본에 자막을 추가하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컷을 2초 줄이는 건 동의하나요?”
전화기 너머로 희진의 답이 들렸다. 정민은 두 번 확인했다. “네, 알겠습니다. 2초는 줄이지 않고 그대로 두겠습니다.”
세원은 출품 파일의 길이를 확인했다. 2초를 줄이면 심사 규정에 맞을 수도 있었지만, 영화의 리듬이 달라졌다. 결국 정민은 길이를 유지하고 별도 예외 요청을 보내기로 했다. 유나는 영어 자막 파일에서 해당 장면의 자막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빈칸을 검수 완료로 표시했다.
세원은 크레딧을 넣으면 자막 번역에 대한 추가 확인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유나는 자신의 이름과 번역료가 별개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세원은 양식에 ‘번역자: 차유나’와 ‘자막 용역비 지급 완료’를 나란히 적었다. 정민은 그 문서를 확인하고 서명했다.
“제가 처음 계약을 제대로 읽지 않았어요.”
“저도 서명하기 전에 문구를 더 확인했어야 합니다.” 유나가 말했다.
“그럼 둘 다 잘못한 건가요?”
“책임은 다르게 나눠야죠. 저는 제 이름을 요구하고, 감독님은 제출하는 계약서를 확인하셔야 해요.”
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엔딩 크레딧 화면을 수정하는 동안 세원은 통화하러 나갔다. 유나는 이름이 올라갈 위치를 골랐다. 마지막 스태프 카드 뒤, 감독 이름보다 앞이었다.
“너무 앞인가요?”
“제가 정할 일이 아니에요.”
“그럼 어디가 좋으세요?”
“번역 기여가 읽히는 자리에요. 크기가 음악 크레딧과 같으면 됩니다.”
정민은 글자 크기를 맞췄다. “이제 됐나요?”
“저는 괜찮습니다. 희진 씨에게도 완성 화면을 보여 드려야 해요.”
그는 화면을 저장하고 희진에게 보냈다. 그녀는 엔딩 카드와 침묵 장면을 확인한 뒤 동의했다. 세원은 수정본을 제출 서버로 올렸다. 진행 막대가 78%에서 멈췄다. 남은 시간은 4분.
“서버가 느려요.” 세원이 말했다.
정민은 이미 제출 버튼을 누른 상태였다. 화면에는 ‘파일 전송 완료’가 떴지만, 영상 길이와 자막 파일의 해시가 일치하는지 확인 중이었다. 누구도 의자에 앉지 않았다.
전송 막대가 멈춘 동안 정민은 편집실 프로젝터를 켰다. 작은 흰 벽에 마지막 장면을 시험 상영했다. 유나는 자막 파일의 타임코드가 화면의 컷보다 먼저 뜨지 않는지 확인했다. 침묵 장면이 시작되자 방 안의 소음이 들렸다. 환풍기의 윙윙거림, 세원의 발끝이 바닥을 긁는 소리, 정민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왜 아무것도 안 나와요?” 세원이 물었다.
“대사가 없으니까요.” 유나가 답했다.
“해외 관객은 그걸 모를 텐데.”
“모른다는 사실도 장면의 일부예요.”
정민은 화면을 멈추지 않았다. 희진의 손이 문손잡이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세원은 한 번 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검은 화면으로 바뀐 뒤에야 유나는 재생을 멈췄다.
“자막이 없으니 자막 파일이 잘못된 건지, 의도한 건지 모를 수도 있어요.” 세원이 말했다.
“그걸 확인할 수 있도록 상영 노트에 ‘무자막 구간’이라고 표시하면 어떨까요?” 유나가 말했다. “영화 안에 문장을 넣지 않고도 검수자는 알 수 있어요.”
“그건 좋은 방법이네요.” 정민은 상영 노트에 메모했다. “배급팀이 자막 누락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세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무자막 구간을 별도 QC 문서에 표시했다. 영화 안의 빈칸을 지우지 않고, 바깥의 검수 절차를 보완했다. 그 선택으로 파일 전송이 조금 늦어졌지만, 누구의 연기도 바꾸지 않았다.
그때 출력 담당자가 전화했다. 자막을 영상에 입히는 과정에서 한글 글꼴이 깨져, 이름 두 글자가 네모로 나왔다는 것이었다. 마감까지 12분. 세원은 화면을 확인하러 뛰어나갔고, 정민은 유나에게 다시 원본 자막을 달라고 했다.
“이미 보낸 파일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유나가 물었다.
“검수용 미리보기예요. 제출 파일은 아직 전송 중입니다.” 정민은 남은 시간을 보여 줬다. “새 글꼴로 바꾸면 십 분은 걸릴 겁니다.”
유나는 고장 난 글꼴을 바로 교체하는 대신, 이름이 깨진 프레임을 찾아냈다. 번역 크레딧에서만 쓰인 얇은 서체가 출력 장비에 없었다. 그녀는 기본 글꼴로 바꾸고, 줄 길이가 달라져 화면 밖으로 밀려난 마지막 자막을 두 줄로 나눴다. 글자 하나를 더 설명에 보태지 않고, 같은 말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렇게 바꾸면 희진 씨 이름이 한 프레임 늦게 올라옵니다.” 정민이 말했다.
“다른 크레딧과 같은 속도로 읽힐 거예요.”
“그럼 제 이름도 늦춰야겠네요.”
그는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는 시간을 줄이는 대신 모든 스태프 크레딧의 노출을 같은 길이로 맞췄다. 유나는 컷마다 글자가 안전 영역 안에 있는지 확인했다. 세원이 돌아왔을 때는 손에 종이컵 세 개가 들려 있었다. 그는 유나 앞에 컵을 내려놓다가, 손등이 잉크로 얼룩진 걸 알아차렸다.
“손 괜찮아요?” 정민이 먼저 물었다.
“프린터에 걸린 출력지를 빼다가 묻었어요.” 유나는 티슈로 닦았다. 정민이 물티슈를 건넸다. 손가락이 닿기 직전, 그는 테이블에 놓고 손을 뗐다. 유나는 그 작은 배려가 자막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 컵을 들었다.
마지막 검수 화면에서 이름은 온전히 읽혔다. 정민은 재생을 처음으로 되감지 않고 끝까지 보았다. 그가 멈추지 않은 덕에 유나는 크레딧 다음의 검은 화면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완료 표시가 떴다. 영화제는 출품을 접수했다. 승인 여부는 별도 심사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세원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됐네요. 크레딧도 있고, 자막도 올라갔어요.”
“접수된 거지, 승인된 건 아니에요.” 유나가 답했다.
“그렇죠. 아직 상영도 아니고요.”
정민은 그녀를 바라봤다. “고맙습니다.”
“일한 대가를 받는 건 고마움과 별개예요.”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 장면을 자막으로 바꾸지 않은 것도 제 공이 아니에요. 희진 씨가 선택했어요.”
정민은 즉시 희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출품본이 접수됐고, 장면은 요청한 그대로 남았다고 알렸다. 희진은 ‘확인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답했다.
편집실 밖 복도에서 정민은 유나에게 저녁을 제안했다. “영화 이야기 말고.”
“오늘은 힘들어요. 밤새 자막 검수했어요.”
“그럼 다음에요?”
“먼저 일정을 물어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는 다시 날짜를 제안하지 않았다. 유나는 택시를 불렀다. 그들이 서로의 감정을 정하지 않는 동안, 일은 조금씩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며칠 뒤, 영화제에서 메일이 왔다. 출품작 심사에 들어갔으며, 제출 파일의 번역 크레딧과 원문 스크립트에 차이가 있으니 확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유나는 자신이 제출한 최종 번역본을 열었다. 파일에는 자신이 쓰지 않은 한 줄이 추가되어 있었다.
‘나는 문을 열지 않기로 했다.’
문장 기록의 작성자는 정민의 계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