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요괴 계약자

23화: 심연의 강림
콰아아앙!
강남역 지하 3층 환승 선로를 짓누르던 침묵이 찢겨 나갔다.
선로 중앙에 입을 벌린 거대한 공간 균열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 요기는 단순한 기운의 흐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의 물리 법칙을 뒤틀고 시멘트 벽면과 철골 레일을 검게 부식시키는 맹독성의 파동이었다.
"전원 결계 방패 전개! 방아쇠에서 손 떼지 마라!"
강현 수사대장이 뇌전이 번뜩이는 영검을 꼬나쥐며 고함을 질렀다.
수십 명의 정령청 특수 수사대원들이 일제히 푸른빛의 정령 방패를 펼쳤다. 하지만 공기를 찢고 뿜어져 나오는 령압은 그들의 방패 표면을 사정없이 긁어대며 날카로운 균열음을 토해냈다.
쩌저적!
"팀장님, 계측기가 파손됩니다! 령압 수치가 특급…… 아니, 상급 심연 마수의 임계치를 돌파했습니다!"
"말도 안 돼! 도심 한복판 지하 환승역에 이런 괴물이 강림한다고?"
대원들의 목소리에 짙은 공포가 서렸다.
그들이 훈련받은 대응 매뉴얼은 중급 이하의 마물이나 단독 주술 범죄자를 제압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지금 눈앞의 균열에서 기어 나오는 존재는 정령청 본청의 1급 퇴마관들이 팀을 꾸려 상대해야 할 재앙의 편린이었다.
쿠구구구궁!
경계의 틈새가 좌우로 넓게 벌어지며 거대한 이형의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장만 6미터에 달하는 거구였다. 칠흑 같은 외골격 표면에는 기괴한 보랏빛 균열이 실핏줄처럼 맥동하고 있었고 등 뒤에서는 수십 개의 검은 촉수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머리 한가운데에는 지맥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타오르는 거대한 자안(紫眼), 침식의 눈이 붉은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상급 요괴, 심연의 침식마(深淵의 侵蝕魔)였다.
크샤아아아악!
침식마가 허공을 향해 포효하자 지하 선로 전체의 조명이 일제히 폭발했다.
자욱한 어둠 속에서 오직 괴수의 보랏빛 안광과 정령청 대원들의 푸른 방패만이 희미하게 빛났다. 괴수는 눈앞에 늘어선 인간들을 발견하자마자 등 뒤의 촉수들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콰아아앙!
공기를 찢는 굉음과 함께 뿜어져 나온 보랏빛 요기 폭풍이 정령청의 화망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일제 사격! 뇌전 탄환으로 전두부를 노려라!"
강현의 호령과 함께 수사대원들이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타타타탕!
푸른 뇌전이 깃든 영력 탄환 수백 발이 침식마의 머리와 몸통을 향해 빗발쳤다. 보통의 중급 요괴라면 온몸이 벌집이 되어 산산조각 났을 화력이었다.
그러나 침식마의 몸 표면을 감싼 왜곡된 공간 장막에 탄환들이 닿는 순간 기괴한 굴절이 일어났다.
치지지직!
탄환들은 궤적이 꺾이며 천장과 바닥의 시멘트만을 박살 냈을 뿐 괴수의 외골격에는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공간 왜곡 외골격이다! 물리적인 영격이 굴절되고 있어!"
강현이 이를 악물며 도약했다. 그의 손에 쥐인 영검에서 벼락같은 청백색 전격이 뿜어져 나왔다.
"파사뇌인(破邪雷刃)!"
강현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침식마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꽂혔다. 정령청 특수 수사대장의 이름에 걸맞은 날카롭고 전광석화 같은 일격이었다.
채애앵!
그러나 영검이 침식마의 목덜미에 닿기 직전 검은 촉수 세 개가 얽히며 단단한 방패를 형성했다. 뇌전의 폭발이 일어났지만 촉수는 조금 그을렸을 뿐이었다.
크르르르!
침식마의 거대한 앞발이 강현의 흉부를 향해 번개처럼 쏘아졌다.
"큭……!"
강현이 급히 영검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으나 충격은 막대했다.
콰앙!
강현의 신형이 포탄처럼 튕겨 나가며 선로 벽면에 처박혔다. 콘크리트 벽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그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다.
"팀장님!"
대원들이 경악하며 달려가려 했으나 이미 침식마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을 덮치고 있었다. 괴수의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수십 개의 촉수가 대원들의 머리 위로 낙하했다.
방패가 깨진 대원들에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선고였다.
바로 그 찰나였다.
"흑영, 심연의 장막을 쳐라!"
선로 구석에서 서늘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스스스!
바닥에 깔려 있던 칠흑의 그림자가 폭포수처럼 거꾸로 솟구치며 정령청 대원들과 강현의 앞을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콰지지직!
침식마의 거대한 촉수들이 그림자 방벽에 부딪히며 거센 마찰 스파크를 일으켰다. 하지만 단단하게 응축된 심연의 그림자는 털끝만큼도 밀려나지 않고 괴수의 맹공을 완벽하게 튕겨냈다.
"이, 이건……?"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던 강현이 충혈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테러범으로 지목하고 총구를 겨누었던 소년 강민우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민우의 오른손 손목에서 옥빛 조율환이 은은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백랑의 서늘한 백색 기운과 흑영의 깊은 암흑이 조율환을 중심으로 완벽한 음양의 소용돌이를 이루며 민우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은하린 씨, 부상당한 대원들을 데리고 배수로 뒤쪽으로 물러나요."
"알았어, 민우야! 조심해, 저놈은 단순한 중급 마수가 아니야!"
하린이 다급하게 강현의 팔을 부축하며 소리쳤다.
강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민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소년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인간 수련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산맥을 뒤흔드는 대요괴의 서슬 퍼런 살기와 심연의 그림자가 소년의 조율 속에서 기적처럼 통제되고 있었다.
[크하하하! 상급 찌꺼기 놈이 제법 껍데기가 단단하구나!]
백랑의 오만한 음성이 환승역 선로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계약자여, 놈의 왜곡 장막 따위 내 이빨로 통째로 얼려 부숴버리겠다!]
"백랑, 서두르지 마. 저놈의 핵은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
민우의 푸른 영안이 침식마의 거구를 꿰뚫어 보았다.
괴수의 외골격을 지탱하는 것은 놋쇠 주술 못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오염 맥류였다. 그 맥류가 심장의 핵과 연결되어 공간 왜곡의 방어막을 쉼 없이 재생하고 있었다.
크샤아아악!
자신의 먹잇감을 가로막힌 침식마가 분노로 울부짖으며 민우를 향해 돌진했다.
선로의 쇠 레일이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부서진 침목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놈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 침식 요기가 민우의 전방위 공간을 집어삼키려 들었다.
"백랑, 혹한의 영역을 펼쳐."
민우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콰아아앙!
민우의 발끝에서 시작된 백색 한기가 파도처럼 뿜어져 나갔다. 단순한 얼음이 아니었다. 절대영도에 수렴하는 서리 폭풍이 침식마의 왜곡된 공간 기류 자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찌르르르륵!
공간을 뒤틀며 굴절을 일으키던 보랏빛 요기가 하얗게 서리를 머금으며 굳어졌다. 왜곡의 흐름이 멈추자 괴수의 단단한 외골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흑영, 다리를 묶어!"
[그림자의 사슬, 결속합니다.]
선로 바닥의 얼음 틈새에서 수십 가닥의 칠흑 사슬이 솟구쳐 올랐다.
사슬은 침식마의 여섯 개 다리와 거대한 꼬리를 뱀처럼 칭칭 감아 바닥의 영맥 결절점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쿠웅!
단단히 묶인 침식마가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괴수는 필사적으로 촉수를 휘두르며 발악했으나 얼어붙은 한기와 그림자의 결속을 찢어내지 못했다.
"지금이다."
민우는 조율환을 가슴 높이로 끌어올렸다.
하단전의 조율선이 격렬하게 진동하며 백랑의 극저온 령격과 흑영의 심연 령격을 완벽한 하나의 칼날로 융합했다.
이전에는 단순한 서리 대검에 그림자를 덧씌우는 형태였다면 지금은 두 기운이 세포 단위로 교차하며 거대한 나선형 창검을 형성했다.
상극조율·빙아영섬(氷牙影閃).
푸른빛과 칠흑이 뒤섞인 나선의 칼날이 민우의 오른팔을 감싸며 허공을 찢는 공명을 토해냈다.
조율환이 푸른 광채를 뿜어내며 령핵에 가해지는 역류 충격을 완벽하게 흡수했다. 민우의 시선이 괴수의 흉부 한가운데에서 맥동하는 놋쇠 주술의 오염 결절점을 포착했다.
파앗!
민우의 신형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침식마가 가슴의 거대한 자안을 번뜩이며 최후의 침식 광선을 쏘아 올렸다.
치이이익!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한 보랏빛 광선이 민우를 향해 직격했다.
하지만 민우는 피하지 않았다. 오른팔을 감싼 나선형 융합 창검을 그대로 앞으로 내질렀다.
콰아아아앙!
나선의 서리 그림자가 침식 광선을 정면에서 둘로 쪼개며 전진했다. 광선이 좌우로 흩어지며 지하 천장을 무너뜨리는 사이 민우의 칼날은 이미 침식마의 거대한 흉부 한복판에 도달해 있었다.
푸우우욱!
거대한 빙아영섬이 외골격을 부수고 들어가 괴수의 심장 핵을 정확히 꿰뚫었다.
크그그그극……!
침식마의 거구가 굳어졌다.
"파쇄(破碎)."
민우의 서늘한 읊조림과 함께 칼날에 응축되어 있던 백색 한기와 그림자 폭발이 괴수의 내부에서 동시에 폭발했다.
콰지지직! 콰아아앙!
내부에서부터 하얗게 얼어붙은 침식마의 몸체가 수만 조각의 얼음 파편과 검은 재가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선로 중앙을 가득 메웠던 맹독성 보랏빛 요기가 거짓말처럼 흩어지며 허공의 경계 균열이 급격하게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후두둑.
파괴된 요괴의 심장 파편 사이에서 시커멓게 그을린 놋쇠 주술 못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정적.
강남역 지하 3층 환승 선로는 기괴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와 얼음 조각들이 서서히 녹아내리며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뚝, 뚝 울려 퍼졌다.
민우는 바닥에 가볍게 착지하며 숨을 내쉬었다. 조율환의 회전이 잦아들며 맑은 옥빛으로 돌아왔다. 극심한 연속 고위 기술을 전개했음에도 단전의 령핵은 안정적으로 순환하고 있었다.
"괴물이…… 상급 마수가 일격에 소멸했어……."
정령청 수사대원 하나가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그것은 그들이 수십 년간 축적해 온 퇴마 전투의 상식을 완전히 박살 내는 광경이었다.
은하린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며 일어선 강현은 바닥에 떨어진 놋쇠 주술 못 파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민우를 응시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에는 이전의 적의 대신 깊은 충격과 경외가 가득 차 있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강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단순한 미등록 계약자가 아니군. 백색 대요괴의 한기와 그림자 마물의 령격을 한 몸에 담아 다루면서도 자아를 잃지 않다니."
민우는 바닥에 떨어진 주술 못을 주워 올려 강현에게 건넸다.
"저는 결계를 부수러 온 게 아닙니다. 이 주술 못으로 도심의 지맥을 망가뜨리고 경계의 틈새를 고의로 열어젖힌 자들을 쫓아왔을 뿐입니다."
강현이 주술 못을 받아 들었다.
그을린 놋쇠 표면에는 정령청의 봉인 문양이 아니라 사설 주술 기업 특유의 미세한 음각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세 개의 뫼비우스 고리가 얽힌 문양.
'신성(晨星).'
강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이 문양은…… 신성그룹 비밀 연구소의 식별 코드다. 정령청 내부 수장고의 결계 해제식과 정확히 일치해."
강현은 주술 못을 꽉 쥐었다. 마침내 상황의 전모가 그의 머릿속에서 맞춰지고 있었다.
민우는 침입자가 아니라 오히려 신성그룹이 조작한 도심 대참사를 막아낸 구원자였다.
"내가 오판했다."
강현이 영검을 거두며 깊게 숨을 토했다.
"정령청 특수 수사대장으로서 네게 빚을 졌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와 내 대원들은 이곳에서 전멸했을 거다."
"오해가 풀렸다면 다행입니다."
민우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안도할 틈은 없었다. 닫혀가던 경계의 틈새 너머에서 또 다른 이질적인 파동이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요괴의 살기가 아니었다.
인간 주술사의 차가운 기운이 환승역 상층 환기구를 통해 은밀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도심 테러의 실패를 확인한 신성그룹의 비밀 처리반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