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요괴 계약자

22화: 지하 환승역의 균열
구영맥 심부 제단의 암벽 틈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겨운 요기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검붉은 지맥의 균열을 따라 거대한 전류처럼 지하 깊은 곳으로 빠르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벽면에 빽빽하게 박힌 놋쇠 주술 못들이 삐걱거리는 금속음을 내며 푸른 영맥을 검게 썩혀 들어갔다.
"이곳의 균열은 표면에 불과해."
하린이 휴대용 영력 단말기의 홀로그램 화면을 띄우며 다급하게 외쳤다. 화면 속 도심 지하망 입체 지도 위에서 붉은 경고등이 맹렬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주술 못으로 뒤틀린 지맥의 파동이 지하 배수로와 지하철 선로를 타고 한 방향으로 쏠리고 있어. 서울 남부 영맥의 최대 결절점인 강남역 환승 구역이야!"
민우는 손목에 감긴 조율환을 가볍게 쥐었다.
은은한 옥빛 고리 표면에서 백랑의 서리와 흑영의 그림자가 잔잔한 파문을 그리며 공명하고 있었다. 두 대요괴의 힘을 동시에 끌어올렸음에도 하단전의 령핵은 기적처럼 고요했다.
"강남역 지하에 경계의 틈새가 완전히 터지면 어떻게 되지?"
"새벽 첫차 운행이 시작되면 수만 명의 시민들이 지하로 쏟아져 들어와. 그 자리에 이면 세계의 요괴 군단이 쏟아져 나온다면 도심 한복판이 생지옥으로 변해."
하린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계약자여, 망설일 시간이 없다.]
백랑의 서늘한 음성이 민우의 귓전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지하 맥을 타고 흐르는 핏비린내가 짙어지고 있다. 이미 저쪽 바닥은 이면 세계의 놈들에게 갉아먹히기 시작했다.]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주인님.]
흑영이 민우의 발밑에서 짙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민우는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린 씨, 가장 빠른 경로를 안내해 줘요."
"이 제단 오른쪽 배수로가 폐쇄된 구영맥 관리 통로와 이어져 있어. 거길 통하면 강남역 지하 3층 환승 정비 구역으로 곧장 진입할 수 있어."
하린이 앞장서서 제단 우측의 낡은 철제 격자문을 발로 찼다.
녹슨 빗장이 부서지며 어둡고 축축한 지하 배수로가 입을 벌렸다.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지하 통로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지맥의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강하게 전해졌다.
천장에서는 시멘트 가루와 흙먼지가 비 오듯 쏟아졌고 벽면의 콘크리트 틈새마다 보라색 요기가 피어올랐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라 공간의 구조 자체가 비틀리며 현실의 물리 법칙을 침식하는 현상이었다.
민우는 달리면서도 손목의 조율환에 영력을 집중했다.
하단전에서 솟구치는 푸른 조율선이 조율환을 통과하며 한기와 암영을 정교하게 엮어냈다. 이전 같았으면 온몸의 혈관이 터져 나갈 듯한 격통이 밀려왔겠지만 지금은 차가운 냉수와 부드러운 비단이 온몸을 감싸는 듯한 안정감이 유지되었다.
'이게 둘째 고리의 힘……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어.'
민우의 영안에 지하 통로 끝의 거대한 공간이 잡혔다.
쾅!
지하 3층 환승 선로로 이어지는 육중한 방화문이 거대한 충격에 찌그러지며 굉음을 토해냈다.
"살려주세요!"
"괴, 괴물이다! 문 열어!"
방화문 너머에서 절박한 비명과 함께 무전기의 잡음이 섞여 들려왔다. 새벽 첫차 운행을 앞두고 선로와 전기 시설을 점검하던 정비 작업자들이었다.
"안에 민간인들이 갇혀 있어!"
하린이 권총 모양의 정령 퇴마기를 치켜들었다.
"흑영, 문을 뜯어내!"
민우의 명령과 동시에 바닥의 그림자가 거대한 칼날 형태로 치솟아 찌그러진 방화문의 경첩을 단숨에 베어 넘겼다.
콰아앙!
부서진 철문이 바닥으로 나가떨어지며 탁 트인 지하 환승역 선로 구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이미 생지옥의 전조를 띠고 있었다.
복층 구조로 얽힌 지하 3층 환승 선로 중앙의 공간이 마치 깨진 거울처럼 허공에서 산산조각 나 있었다. 찢어진 공간의 틈새는 족히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타원형 균열을 형성하며 검붉은 요기를 폭포수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수백 마리의 기괴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진흙 같은 몸체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뜩이는 침식귀 무리뿐만이 아니었다.
공중에서는 반투명한 공간 파편을 날개처럼 펄럭이며 독침을 겨누는 비행 요괴 '극침마(棘針魔)' 수십 마리가 맴돌고 있었고 선로 바닥에는 검붉은 모피에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늑대 형상의 마수 '혈랑귀(血狼鬼)'들이 으르렁거리며 질주하고 있었다.
정비공 세 명이 선로 구석의 고압 변전실 철창 뒤에 웅크린 채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다.
크르르르!
선두의 혈랑귀 다섯 마리가 피비린내를 맡고 변전실 철창을 향해 맹렬하게 도약했다. 쇠창살이 종잇장처럼 휘어지며 날카로운 발톱이 정비공들의 목덜미를 덮치기 직전이었다.
탕! 탕! 탕!
하린이 정밀 사격으로 영탄을 쏘아 보냈다. 푸른 영력 탄환이 선두 혈랑귀 두 마리의 안면을 정확히 관통하며 폭발했다.
끼에에엑!
혈랑귀들이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지만 뒤따라오던 십여 마리의 무리가 일제히 방향을 틀어 하린과 민우를 향해 쇄도했다.
공중의 극침마들도 날카로운 날개짓 소리를 내며 수십 개의 독침을 비 오듯 쏟아부었다.
"민우야, 공중 공격이야!"
"걱정 마요."
민우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손목의 조율환이 눈부신 백색과 칠흑의 광채를 동시에 뿜어냈다.
"백랑, 선로를 얼려라!"
[크하하하! 쥐새끼 같은 놈들, 전부 얼어붙어 바스러져라!]
백랑의 거대한 백색 늑대 환영이 민우의 등 뒤에서 포효하며 도약했다.
콰지지직!
절대영도의 한기가 선로 바닥을 따라 폭풍처럼 번져나갔다. 쇄도하던 수십 마리의 혈랑귀와 침식귀들의 발이 선로 바닥에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얼음은 순식간에 놈들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 온몸을 단단한 빙상으로 굳혀버렸다.
"흑영, 하늘을 꿰뚫어!"
[주인의 뜻대로.]
민우의 발밑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지하 공간 전체로 그물망처럼 퍼져나갔다.
촤라라락!
수백 개의 그림자 가시가 허공을 향해 일제히 솟구쳤다. 공중에서 독침을 쏟아붓던 극침마들이 그림자 가시에 날개와 몸통을 꿰뚫리며 허공에서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서각! 푸우욱!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못하던 바닥의 혈랑귀들의 가슴팍에도 그림자 송곳이 자비 없이 꽂혔다.
단 3초.
수십 마리에 달하던 1차 요괴 군단이 단 한 번의 연계 공격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검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변전실 철창 뒤에 갇혀 있던 정비공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고 숨조차 쉬지 못했다.
하얀 서리 폭풍과 검은 그림자가 어우러져 수십 마리의 괴물들을 순식간에 소멸시키는 모습은 인간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하린 씨, 저분들을 배수로 통로로 대피시켜요."
민우가 침착하게 지시했다.
"알았어. 하지만 민우야, 틈새가……!"
하린이 가리킨 선로 중앙의 공간 균열은 요괴 무리가 쓸려나갔음에도 닫히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지하 암반에 박힌 주술 못들이 붉은 피를 흘리듯 진액을 뿜어내며 균열을 더욱 넓혀가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선로 바닥이 뒤틀리며 균열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검은 바위 같은 덩어리가 솟아올랐다.
온몸이 시커먼 지맥의 암석과 가시로 뒤덮인 거대한 쐐기형 요괴였다. 놈의 몸체 중앙에는 붉게 타오르는 거대한 외눈이 박혀 있었고 주변의 영맥을 빨아들이며 끔찍한 파동을 뿜어냈다.
"저건…… 지맥포식귀(地脈捕食鬼)! 지하의 영맥을 먹어 치워 공간 틈새를 고정하는 중급 마수야!"
하린이 경악하며 외쳤다.
"저놈이 영맥의 핵을 완전히 집어삼키면 이 균열은 영구적인 차원문으로 변해!"
크구구구구!
지맥포식귀가 붉은 외눈을 번뜩이며 선로 양쪽의 고압 전선과 지맥 에너지를 한꺼번에 흡수하기 시작했다. 놈의 등 뒤에서 수십 개의 암석 가시가 솟아오르며 민우를 향해 미사일처럼 발사되었다.
민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조율환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리며 두 요괴의 기운을 극대화했다.
"백랑, 한기를 칼날로 압축해. 흑영, 그 칼날을 그림자로 감싸."
[흥, 재미있군! 마음껏 휘둘러봐라!]
[영격의 결을 맞추겠습니다.]
푸른 서리의 냉기가 민우의 오른손에 날카로운 얼음 대검의 형태로 응축되었다. 그 위로 흑영의 심연 같은 그림자가 덧씌워지며 칠흑의 서리 검기가 완성되었다.
상극조율·빙연영인(氷淵影刃).
두 개의 상반된 령격이 조율환의 완충 속에서 완벽한 회오리를 그리며 회전했다.
날아오는 암석 가시들을 가볍게 쳐낸 민우가 선로를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스팟!
민우의 신형이 허공에서 세 갈래의 그림자 잔상을 남기며 지맥포식귀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서늘한 칠흑의 서리 검기가 놈의 거대한 붉은 외눈을 정면으로 관통했다.
쩌저적! 콰아아앙!
지맥포식귀의 단단한 암석 피부가 극저온의 한기에 얼어붙는 순간 흑영의 그림자 폭발이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내부에서부터 산산조각 난 지맥포식귀가 끔찍한 단말마와 함께 거대한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파사사삭.
중급 요괴가 소멸하며 뿜어내던 검은 요기가 서서히 흩어졌다.
민우는 가볍게 바닥에 착지하며 숨을 골랐다. 손목의 조율환이 은은한 온기를 발하며 격렬했던 영력의 파동을 매끄럽게 가라앉혀 주었다.
령핵의 마모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둘째 고리를 얻기 전이었다면 이 정도의 연속 고위 영격 전개는 단전 파열로 이어졌을 터였다.
"작업자분들은 배수로 통로로 무사히 올려보냈어."
하린이 달려오며 민우의 상태를 살폈다.
"몸은 괜찮아? 령핵에 무리는 없어?"
"괜찮아요. 조율환 덕분에 부담이 전혀 없어요."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지맥포식귀를 처단했음에도 선로 중앙의 공간 균열은 닫히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더 깊은 심연의 바닥에서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불길한 고동 소리가 쿵, 쿵 울려 퍼졌다.
[……온다. 방금 쓰러뜨린 잡것들과는 격이 다른 놈이다.]
백랑이 으르렁거리며 털을 곤두세웠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상층 환승 통로와 연결된 거대한 비상 정비용 철문이 강력한 주술 폭약에 의해 박살 나며 날아갔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짙은 감색 제복을 입은 무장 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진입했다.
정령청 특수 수사대였다.
"전원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선두에서 서슬 퍼런 영검을 뽑아 든 남자가 연기를 뚫고 걸어 나왔다.
특수 수사대장 강현이었다.
강현의 날카로운 시선이 찢어진 경계의 틈새와 바닥에 흩어진 요괴들의 잔해 그리고 민우의 오른손 손목에서 빛나는 조율환을 차례로 훑었다.
"구영맥 결계를 훼손하고 도심 지하에 경계의 틈새를 발생시킨 주동자가 바로 네놈들이었나."
강현의 영검에서 푸른 뇌전이 파지직거리며 뿜어져 나왔다. 수사대원 수십 명의 총구가 일제히 민우와 하린을 겨누었다.
"오해야, 강현 팀장님! 우리는 틈새를 막으려고……!"
하린이 다급하게 외쳤으나 강현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쿠구구구궁!
두 세력의 대치를 비웃기라도 하듯 중앙의 경계 틈새가 거대한 보랏빛 기둥을 뿜어내며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상급 요괴의 령압을 토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