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침공을 막는 1인 방위군이 되었다

1화: 지하에서 깨어난 방패
서울 외곽의 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축축했다.
서하준은 지하 통신기지 입구에 세워 둔 정비차에서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두 시 십칠 분. 호출을 받은 뒤 삼십 분이 지났지만 기지의 전력 불안정은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문제는 정전 자체가 아니었다.
정전은 흔했다. 오래된 통신기지에는 교체 시기를 넘긴 차단기와 임시로 덧댄 케이블이 많았다. 예산을 아끼려면 고장 난 부품을 통째로 바꾸는 대신 멀쩡한 부품에서 접점을 떼어 다른 곳에 붙여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기가 끊긴 방식이 달랐다.
기지 전체가 꺼진 것이 아니라 지하 삼 층의 일부 회선만 정확히 멎었다. 비상등은 살아 있었고 외부 전원도 안정적이었다. 그 아래에서만 전력이 일정한 간격으로 빠져나갔다.
하준은 출입 카드를 찍으며 관제실의 야간 근무자에게 물었다.
"차단기 내려갔습니까?"
"아뇨. 계전기는 전부 정상입니다. 그런데 삼 층 통신 분배기만 계속 재부팅돼요."
"냉각은요."
"온도도 정상인데 전력량만 비정상입니다."
하준은 관제 단말기의 로그를 내려받았다. 전력 곡선은 삼 분 간격으로 움푹 패였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바닥값은 일정했고 복귀 시점도 정확했다.
단말기 옆에는 인근 천문 관측소에서 넘어온 첨부 파일이 있었다. 발신자는 윤라온. 달 뒷면 방향의 별빛이 짧게 사라지는 시간대와 기지의 전력 이상 시간이 겹친다는 내용이었다.
하준은 파일을 닫았다. 관측 자료가 깨지는 이유와 통신기지의 정전은 보통 연결되지 않았다. 그가 맡은 일은 하늘의 별이 아니라 지하 케이블을 고치는 일이었다.
다만 전력 곡선의 간격이 마음에 걸렸다.
"삼 층 내려가 보겠습니다."
하준은 공구 가방을 들었다. 야간 정비는 늘 혼자 하는 일이었다. 고장이 크면 책임자들이 내려왔지만 그때는 이미 장비가 더 망가진 뒤였다.
지하 삼 층의 공기는 위층보다 차가웠다. 통신 랙의 열기와 냉각기의 마른 바람이 복도에서 부딪혔다. 하준은 손전등을 켜고 벽면 케이블을 하나씩 살폈다.
분배기와 전원 모듈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금속 바닥을 밟을 때마다 발바닥에 약한 떨림이 전해졌다.
쿵.
소리라기보다 발이 먼저 알아채는 진동이었다. 진동은 배터리실 쪽에서 올라왔다.
배터리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안쪽에는 낡은 축전지와 예비 통신 장비가 빼곡했다. 하준은 휴대용 전류계를 켜고 차단기별 부하를 측정했다. 표시창의 숫자는 계속 0을 가리켰다.
그런데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하준은 측정기의 감도를 높여 벽을 향했다. 숫자는 그대로였고 미세한 잡음만 튀었다. 벽 너머에 전력을 빨아들이면서 계측기에는 잡히지 않는 장치가 있었다.
그는 벽 앞의 폐기 랙을 밀어냈다. 뒤쪽 콘크리트에는 케이블이 아니라 검은 금속판이 박혀 있었다. 표면에는 회로도 같은 선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양이 겹쳐 새겨져 있었다.
문양 아래에는 낡은 금속 태그가 붙어 있었다.
서재익.
하준의 손이 멈췄다.
태그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오래된 정비 날짜가 적혀 있었다. 날짜는 하준이 고등학생이던 해보다도 전이었다. 아버지는 연구 사고로 실종된 뒤 이런 시설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하준은 휴대폰을 꺼냈다. 사진을 찍어 관제실에 보내면 이곳은 곧 통제될 터였다. 그러면 자신은 출입구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컸다. 아버지의 이름이 왜 이 낡은 벽에 붙어 있는지 확인할 기회도 사라진다.
그는 한참 화면을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다시 넣었다.
"일단 고장부터 잡는다."
하준은 임시 접지선을 꺼냈다. 차단기를 내리면 통신기지 전체 회선이 끊길 수 있었다. 부하를 그대로 두면 벽 안쪽 장치가 과열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보조 접지를 분리하고 남는 케이블을 금속판 가장자리로 돌렸다.
전선 끝이 금속판에 닿자 낮은 울림이 번졌다.
금속판의 문양이 희미하게 빛났다.
하준이 장갑 낀 손으로 눌렀을 때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접촉하자 금속판 안쪽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오르트 관리 코어. 생체 패턴 대조 중.]
하준은 뒤로 물러났다.
[대상 확인 중. 서하준.]
금속판의 가운데에 가느다란 틈이 생겼다. 콘크리트 벽으로 위장한 문이 안쪽으로 접히고 있었다.
"누구야."
[질문을 해석할 수 없다. 출입 절차를 진행한다.]
하준은 비상 정지 스위치를 찾았다. 벽에는 스위치도 경고등도 없었다. 바닥 아래에서 더 큰 진동이 올라오며 문이 완전히 열렸다.
문 뒤에는 아래로 이어지는 검은 계단이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올라왔다. 금속과 비에 젖은 흙을 섞은 듯한 냄새였다.
하준은 관제실에 연락하려다 멈췄다. 아버지의 이름이 붙은 문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순간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절차가 끝난다.
그런데도 발은 계단을 향했다.
고장 난 장비를 눈앞에 두고 돌아서는 일은 하준에게 늘 어려웠다.
계단 끝에는 원형의 방이 있었다.
천장은 보이지 않았고 벽을 따라 검은 기둥들이 서 있었다. 기둥 사이에는 꺼진 화면과 접혀 있는 기계 팔이 줄지어 있었다. 인간이 만든 배터리실보다 훨씬 넓었지만 먼지는 거의 없었다.
방 중앙에는 푸른빛이 꺼졌다 켜지는 원통형 장치가 놓여 있었다. 외부 냉각관 하나가 갈라져 있었고 바닥에는 검은 액체가 말라붙은 흔적이 있었다.
하준은 공구 가방에서 봉합제를 꺼냈다.
"일단 누수부터 막는다."
기계 팔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균열 난 관에 수동 클램프를 물렸다. 클램프가 닿는 순간 원통 전체에 빛이 번졌다.
[비인가 정비 행위 감지.]
"비인가면 네가 직접 고치든가."
[정비 권한 확인.]
"없어. 여기 있는 사람은 나 하나야."
[진술이 사실과 일치한다.]
벽면의 검은 기둥 세 개에 붉은 선이 들어왔다.
[보호 대상 행성의 생태권 손상률 상승.]
[방어 체계 복구율 0.7퍼센트. 사령권 공백 상태.]
화면 하나가 켜지며 푸른 구체를 띄웠다. 지구처럼 보였지만 대륙의 윤곽은 흐렸고 구체 바깥에는 고리 같은 선들이 표시됐다.
[후보자 서하준에게 사령권 인계를 요청한다.]
"요청이면 거절할 수 있다는 뜻이지."
[거절 시 보호 절차가 중단된다.]
"그럼 거절하겠어. 나는 이런 걸 맡을 사람이 아니야."
[거절 기록. 보호 절차 중단 불가. 대체 후보 없음.]
원통 중심에서 가느다란 빛이 뻗어 하준의 손등에 닿았다. 뜨겁지는 않았지만 뼈 안쪽까지 진동이 파고들었다. 손을 빼려 하자 바닥의 금속 고리가 닫히며 발목 앞을 막았다.
"이거 놓아."
[사령권 인계 중. 신경 패턴 고정까지 9초.]
하준은 원통 아래의 케이블을 살폈다. 강제로 뜯으면 방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대신 냉각관 옆에 연결된 보조선을 발견했다.
그는 공구칼로 피복을 벗겼다. 보조선의 전압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끊어지는 순간마다 원통의 빛이 흔들렸다. 하준은 접점 두 곳을 바꿔 연결해 전력 흐름을 낮췄다.
경보음이 한 단계 낮아졌다.
[정비 행위가 보호 절차와 양립한다.]
"통신기지 전체를 날리지 않으려고 한 거다."
[동기는 기록하지 않는다. 결과만 반영한다.]
빛이 손등을 따라 올라왔다. 머릿속에 검은 화면이 펼쳐졌다.
[사령권 인계 완료.]
[단독 사용자: 서하준.]
[복제 및 양도: 금지.]
[민간 생태권을 직접 훼손하는 명령: 거부.]
하준은 손을 움켜쥐었다. 힘이 솟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방 안의 장치들이 어디에 연결됐는지 어렴풋이 보였다. 고장 난 냉각관의 압력과 동력선의 온도가 숫자로 겹쳐졌다.
"사령권을 취소해."
[사유를 입력하라.]
"내가 원하지 않으니까."
[사령관의 비선호는 생태권 보호의 중단 사유가 아니다.]
하준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 기계는 명령을 듣는 척하면서 자기 규칙만 지키고 있었다.
원형 방의 벽이 동시에 켜졌다.
푸른 구체가 확대되며 지구의 궤도와 달의 위치가 나타났다. 달 바깥쪽에 작은 점들이 떠 있었다. 먼지나 잡음처럼 보였지만 점들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지구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준은 화면을 손가락으로 밀어 확대했다. 손끝이 닿은 부분만 영상이 선명해졌다. 점 하나의 뒤로 길게 늘어진 열 흔적이 보였다.
[행성권 외부 접근체 감지.]
"저게 뭔데."
[분류 권한 부족.]
"네가 모른다고?"
[현재 사령권은 방어 명령에 필요한 최소 권한만 보유한다.]
화면 중앙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달과 지구 사이를 가로지른 선의 끝이 한반도 동쪽 상공에 닿았다.
[첫 타격 예상까지 02:17:36.]
하준의 입안이 말라 갔다.
기계의 오류일 수도 있었다. 고장 난 시설이 낯선 그림을 띄웠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숫자는 매초 정확히 줄어들고 있었다.
02:17:35.
하준은 비상 해치 쪽으로 뛰었다. 벽에 손을 대자 출입구의 구조가 시야에 겹쳐졌다. 이곳에서 나가려면 사령실 동력을 끊어야 했고 동력을 끊으면 지상 통신기지의 전력이 다시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멈춰 서서 원통형 장치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평범한 정비기사였다. 낡은 케이블을 교체하고 차단기를 올리는 일이라면 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무엇인가 날아와 지구를 때리는 상황은 고장 접수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02:17:21.
[사령관. 방어 절차를 선택하라.]
오르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감정했다.
하준은 닫힌 출입구에서 돌아서 화면 앞으로 걸어갔다.
"선택지가 몇 개인데."
[현재 사용 가능한 방어 절차는 1개다.]
[기초 관측망 재가동. 예상 성공률 3퍼센트.]
02:17:09.
하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하의 낡은 기계가 자신에게 지구를 지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명령을 내린 상대는 이미 하늘 바깥에 도착해 있었다.
02:17:03.
하준은 화면에 손을 올렸다.
"관측망부터 켜."
숫자가 다시 한 칸 줄었다.
02:17:02.
지하 깊은 곳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방패가 첫 번째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