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대공의 수면제가 되었습니다

1화: 목을 조이던 밧줄이 끊어질 때
거친 삼베 밧줄이 목덜미의 여린 살갗을 파고들었다.
서늘한 겨울바람이 살을 에는 수도 루메리온의 중앙 광장. 높게 솟은 처형대 아래에는 마레나 벨로아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 군중의 함성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반역자의 수괴 벨로아 백작 영애에게 사형을 집행하라!"
"제국을 팔아넘긴 마녀를 단죄하라!"
마레나는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짓씹었다. 목을 가누기조차 힘든 쇠사슬의 무게 속에서도 그녀의 시선은 정면의 귀빈석을 향해 있었다.
화려한 금실로 수놓인 황실 천막 아래 백금발을 단정히 빗어 넘긴 사내가 앉아 있었다.
아르켈 제국의 황태자 루시안 에르데른.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마치 사랑하던 약혼녀의 비극적인 타락을 애도하는 성자처럼.
'가증스러운 것.'
마레나는 속으로 피를 토하듯 읊조렸다.
벨로아 백작가의 광산에서 금지된 마석을 채굴했다는 누명. 가문의 기사단이 황실에 반기를 들었다는 거짓 장부. 그 모든 증거를 조작하고 열세 살배기 남동생 테오를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숨지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저 루시안이었다.
그는 마레나의 목소리와 마력을 온전히 손에 넣지 못하자 가문을 통째로 짓밟아 파멸시켰다.
루시안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집행관을 향한 무자비한 신호였다.
덜컹.
발밑을 받치고 있던 나무 발판이 허공으로 꺼져 내렸다.
순간 목뼈를 부러뜨릴 듯한 끔찍한 충격과 함께 숨통이 콱 틀어막혔다. 폐부의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가며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머릿속에서 핏줄이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광장의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코끝을 스치는 것은 처형장의 비린 피 냄새와 루시안의 몸에서 늘 풍기던 성궁 특유의 흐릿한 백합 향이었다.
'이렇게……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테오의 식어버린 작은 손. 억울함에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가던 가문의 사람들.
이대로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절망과 증오가 온몸의 신경을 불태우던 찰나 목을 죄던 밧줄에서 툭 하는 파열음이 울렸다.
그리고 세상이 암전되었다.
"허억——!"
마레나는 비명을 삼키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차갑고 맑은 공기가 한꺼번에 기도로 쏟아져 들어오며 격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 쿨럭…… 하아, 헉……!"
마레나는 떨리는 양손으로 제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살을 찢고 뼈를 으스러뜨리던 거친 밧줄의 감촉은 없었다. 거칠게 일어난 흉터도 피딱지도 만져지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것은 오직 부드럽고 매끄러운 살결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마레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비린내 진동하던 차가운 광장이 아니었다.
창가로 쏟아져 들어오는 따스한 아침 햇살과 은은한 라벤더 향이 감도는 레이스 커튼 그리고 벽면에 걸린 벨로아 가문의 은빛 백합 문장.
이곳은 마레나가 열아홉 살 때까지 머물렀던 수도 벨로아 백작가 저택의 침실이었다.
바닥을 딛고 일어서려던 마레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침대 기둥을 짚고 간신히 몸을 지탱한 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참혹한 죄수가 아니었다.
은빛이 감도는 풍성한 갈색 머리칼과 생기 있는 회녹색 눈동자. 창백하지만 아직 고문과 굶주림으로 피폐해지지 않은 앳된 얼굴.
열아홉 살의 마레나 벨로아였다.
"이게…… 정말 나라고?"
마레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제 뺨을 매만졌다. 온기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환각이나 임사체험이라기엔 피부에 와닿는 햇살의 따스함과 심장의 고동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시선을 돌리자 화장대 위 탁상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제국력 713년 3월 4일]
마레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제국력 713년 봄…….'
자신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던 날은 제국력 716년 12월이었다. 정확히 3년 전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3월 4일이라는 날짜는 마레나의 뇌리에 지옥의 낙인처럼 새겨져 있는 날이었다.
전생에서 황태자 루시안이 황궁 봄맞이 연회에서 마레나에게 공식적으로 춤을 청하며 사교계에 둘의 약혼설을 퍼뜨린 바로 그날이었다.
그 다정한 관심이 벨로아 백작가를 옭아매는 덫의 시작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누나! 일어났어?"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틈으로 불쑥 튀어나온 얼굴을 본 순간 마레나는 숨을 멈추었다.
붉은 갈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뛰어 들어오는 작은 체구와 맑고 커다란 회녹색 눈망울.
"테오……?"
마레나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열세 살의 테오 벨로아였다.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피를 토하며 누나의 이름을 부르다 숨을 거두었던 내 어린 동생.
"누나, 왜 그래? 어디 아파? 얼굴이 왜 그렇게 하얗게 질렸어?"
테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총총 뛰어와 마레나의 소매를 붙잡았다.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동생의 따뜻한 체온. 작은 어깨의 들썩임. 살아 숨 쉬는 심장 소리.
순간 마레나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리려는 것을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억눌렀다.
마레나는 주저앉듯 무릎을 꿇고 테오를 품에 힘껏 끌어안았다.
"누, 누나? 갑자기 왜 이래? 숨 막혀……."
테오가 당황해 웅얼거렸지만 마레나는 동생의 작은 등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살아 있다. 정말로 내 동생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신이 내게 두 번째 기회를 준 거야.'
마레나는 엄지손톱을 손바닥 안쪽으로 꾹 쥐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정신을 서늘하게 각성시켰다.
이번 생에서는 절대로 테오를 잃지 않을 것이다. 벨로아 가문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황실의 손아귀에서 반드시 동생과 영지를 지켜낼 것이다.
마레나는 마음을 다잡고 테오를 품에서 떼어놓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다정하지만 차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악몽을 조금 꿨을 뿐이야. 괜찮아, 테오."
"정말이지? 누나 요즘 잠도 잘 못 자더니 무서운 꿈 꿨구나? 내가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테오는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씩씩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금박이 화려하게 박힌 서신 한 통을 꺼내 들었다.
"아, 맞다! 이것 때문에 뛰어온 건데 깜빡할 뻔했네. 황궁에서 전령이 와서 누나 앞으로 이걸 주고 갔어."
테오가 내민 서신의 중앙에는 황실의 상징인 태양 문양 인장이 붉은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마레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3년 전 오늘 도착했던 바로 그 초대장이었다.
마레나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어 양피지를 펼쳤다.
유려하고 기품 있는 필체로 적힌 문장들.
[존귀한 벨로아 백작 영애 마레나에게.
제국의 찬란한 봄을 여는 황궁 만찬에 영애를 정중히 초대합니다. 영애의 아름다운 미소로 연회장을 밝혀주시길 고대하며.
— 황태자 루시안 에르데른]
활자 하나하나에서 루시안의 오만하고 위선적인 미소가 묻어나는 듯했다.
전생의 마레나는 이 초대장을 받고 가문의 영광이라며 가슴 설레어 했다. 황태자의 호의가 몰락해 가는 가문을 구원해 줄 동아줄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달콤한 독이 든 미끼에 불과했다.
루시안은 이 연회에서 마레나를 에스코트하며 사교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를 빌미로 벨로아 가문의 남서부 광산에 황실 감찰관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산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고대 마석의 소유권을 빼앗기 위해 치밀하게 반역 혐의를 엮어 넣었다.
'절대로 전생과 같은 길을 걷지 않겠어.'
마레나는 초대장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오늘 밤 연회를 피할 수는 없다. 황태자의 공식적인 초대를 정당한 사유 없이 거절하는 것은 황실 모독으로 트집을 잡힐 빌미가 될 뿐이었다.
연회에는 참석해야 한다. 다만 전생처럼 순진하게 그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 중앙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루시안의 시선을 피하고 그가 내미는 덫을 교묘하게 비껴가며 가문의 독립성을 지킬 방책을 찾아야 했다.
그때 테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누나, 근데 오늘 연회에 북부의 대공님도 오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야?"
"북부의 대공……?"
마레나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응.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어. 북부의 괴물이라 불리는 카시안 발테르 대공이 어제 수도에 입성했대. 전쟁터에서 사람을 하도 많이 죽여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밤마다 광증으로 사람을 찢어 죽인다는 그 무서운 사람 말이야!"
테오가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카시안 발테르.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마레나의 뇌리에 전생의 기억 한 조각이 스쳐 지나갔다.
발테르 공국을 다스리는 북부의 지배자. 황실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막강한 군권을 쥔 사내.
전생에서 그는 수도 사교계에서 '피에 젖은 흑막'이자 '북부의 살인귀'라 불렸다. 심각한 불면과 발작으로 이성을 잃고 날뛴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결국 황실과 대립하다 제국을 혼란에 빠뜨린 장본인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전생의 마레나는 그가 두려워 연회장에서 멀찍이 피해 다녔을 뿐 단 한 번도 말을 섞어본 적이 없었다.
'북부 대공 카시안 발테르가 오늘 연회에 참석한다고……?'
마레나는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황태자 루시안은 북부 발테르 공국을 극도로 경계했다. 루시안이 황권을 강화하고 절대 권력을 쥐기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할 첫 번째 표적이 바로 카시안 대공이었다.
황실과 대립하는 북부의 거대한 힘.
어쩌면 그것은 루시안의 독선적인 폭주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균열일지도 몰랐다.
물론 카시안 발테르가 소문대로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라면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이 될 터였다. 하지만 얌전히 루시안의 꼭두각시가 되어 단두대로 걸어 들어가는 것보다는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하는 편이 나았다.
"테오."
마레나가 조용히 동생을 불렀다.
"응, 누나?"
"오늘 밤 누나가 궁에 다녀올 동안 저택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서재 밖으로 나오지 마. 알겠지?"
"왜 그래, 누나? 무슨 일 있어?"
테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마레나는 동생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누나가 다 해결할 테니까 테오는 누나만 믿고 공부하고 있으면 돼."
"응! 나 누나 말 잘 들을게!"
테오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레나는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며 결의를 다졌다.
단두대의 밧줄이 끊어지고 다시 주어진 삶.
이번에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다. 가문을 지키고 테오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제국 제일의 흑막이라 불리는 괴물 대공의 앞이라도 당당히 마주하리라.
어스름한 저녁노을이 수도 루메리온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마레나는 단정한 짙은 남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황궁으로 향하는 백작가 마차에 몸을 실었다.
황궁의 거대한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