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인형극단의 왕실 대역

3화: 극단에 내려진 다음 공연 명령
왕실의 다음 공연 명령은 세 장짜리 대본이었다.
첫 장에는 왕이 칼을 내리고 백성을 용서하는 장면이 있었다. 둘째 장에는 대역 배우가 왕의 선택을 그대로 따르는 지시가 있었다. 셋째 장은 비어 있었다.
“결말은 공연 당일 왕께서 직접 말씀하신답니다.” 류백이 말했다.
연화는 대본을 덮었다. “그럼 우리가 연습할 장면은 두 개뿐이네요.”
“왕실은 세 번째 장을 채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은 세 장분으로 세워야 해요?”
“막은 그대로 두되 빈 장면에는 조명을 비추지 말라고 했습니다.”
노담은 명령서의 도장을 살폈다. 왕실 서기관의 인장 아래에 다른 압인 자국이 겹쳐 있었다. 종이를 옆으로 기울이자 왕실 문장과 다른 작은 새 모양이 드러났다.
“이 인장, 공연 명령을 내린 사람 것과 다릅니다.”
류백이 종이를 빼앗듯 받아 들었다. “어디서 봤습니까?”
“명령서 봉투의 봉랍에도 찍혀 있었어요.”
“그건 왕실 서고의 오래된 인장이오.”
“누가 쓰죠?”
류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는 그를 노려봤다. “또 숨기려는 거예요?”
“숨기는 게 아니라, 말하면 당신들까지 기록에 남을 겁니다.”
“우리는 이미 대역선에 묶였어요.” 노담이 말했다. “기록에서 이름 지운다고 안전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류백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 “왕의 형이 쓰던 인장입니다. 왕자였을 때 죽었다고 공표됐지요.”
연화는 첫 공연에서 보인 그림자를 떠올렸다. “그럼 빈 액자 속 얼굴이 왕의 형이었어요?”
“가능성은 있지만 확정할 수 없습니다.”
“왕이 칼을 든 그림자는 형을 향했나요?” 노담이 물었다.
“그 방향에 형이 있었다면 그랬을 겁니다.”
“그 사람은 정말 죽었어요?”
류백은 입을 다물었다. 왕실 명령서의 빈 세 번째 장이 바람에 들렸다. 그 종이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지만, 노담의 그림자가 먼저 손을 뻗어 가장자리를 눌렀다.
연화는 노담의 손을 확인했다. “너는 움직이지 않았어.”
“알아.”
“그러면 그림자가 네 뜻을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야.”
“왕의 뜻을 따라가는 걸 수도 있어.”
류백이 대역선을 가져왔다. “오늘부터 연습을 중단하겠습니다. 연결이 위험해요.”
“공연을 취소하면 극단이 해산됩니다.” 연화가 말했다.
“그럼 대본을 바꿔서 올리죠.”
“명령을 어기면 감독님이 먼저 잡혀갈 거예요.”
“그럴 수 있습니다.”
“노담이 다칠 수도 있고요.”
류백은 답하지 않았다. 노담은 붉은 실을 허리에 둘렀다. “누군가 다치는 걸 막으려면, 어디서 연결이 생기는지 알아야 해요. 오늘은 공연을 연습하는 게 아니라 끊는 방법을 찾겠습니다.”
공연 준비실에서는 배우들이 대본을 나눠 읽고 있었다. 칼을 든 대군 역을 맡은 단원은 배역에서 빠지겠다고 했다. “다음에는 실물 칼이 나올 수도 있잖아요. 저한테 가족이 있어요.”
연화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나가도 돼. 다만 왕실이 다른 배우를 세우면 네 이름은 대본에서 지워질 거야.”
“그러면 이름을 지키려고 칼 앞에 서라는 거예요?”
“아니. 네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기록하자는 거야.” 연화는 빈 대본 세 번째 장에 그의 이름을 적었다. 배우는 한참 그 글씨를 바라보다가 대군 역을 맡겠다고 했다. 단, 칼을 든 장면 대신 무대에서 자리를 비우는 것으로 바꾸자고 요구했다.
노담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군이 퇴장하면 그림자가 빈자리를 향해 칼을 들 이유도 달라져요. 무대의 비어 있는 자리가 권력을 가질 수 있겠죠.”
류백이 막의 가장자리를 당겼다. “왕실이 이 장면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공연 기록을 남겨요. 배우가 왜 자리를 비웠는지, 관객이 무엇을 봤는지.” 연화가 말했다. “누구를 용서했는지가 아니라, 누가 무대에서 밀려났는지를 보여 주면 돼요.”
단원들은 각자의 역할을 다시 나눴다. 음향 담당은 칼이 떨어지는 소리를 두 번 내지 않기로 했다. 조명 담당은 왕실 장식등의 스위치를 직접 관리하겠다고 했다. 대군 역 배우는 대사를 줄이고, 이름을 남기는 장면을 맡았다.
노담은 붉은 대역선을 허리에 감았다. 이번에는 실을 세 번 감지 않았다. 연결은 약해졌지만 끊기지는 않았다. 그는 왕의 동작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자신의 몸이 어떤 순간에 통증을 받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거울은 그림자의 뒤편을 비추도록 세웠다. 노담이 막을 당기고 연화가 대본 첫 줄을 읽자 왕의 그림자가 관객석을 향했다. 류백은 반광등을 껐다 켰다. 칼의 윤곽은 사라졌지만, 왕의 왼손은 계속 주먹 모양으로 남았다.
“빛이 사라져도 그림자가 남아요.” 연화가 말했다.
“그림자가 아니라 막에 남은 자국일 수도 있습니다.” 류백은 천을 바꿔 걸었다.
노담은 대역선의 매듭을 풀었다. 왕의 모형 인형에서 몇 걸음 물러나자 손바닥의 통증이 옅어졌다. 다시 가까워지자 통증이 돌아왔다. 연결은 조명이나 막만이 아니라 왕과의 거리에도 반응하고 있었다.
“왕이 무대에 가까워지면 통증이 커져요.”
“그럼 공연에서 왕을 뒤로 물리면 그림자도 약해질 수 있겠네.” 연화가 말했다.
“아니면 그림자가 더 멀리 손을 뻗을 수도 있어요.” 노담은 매듭을 다시 묶지 않았다. “그건 실제 공연에서 확인해야 해요.”
그들은 막을 세우고 관객석에 작은 거울을 놓았다. 조명을 낮추고 왕의 손과 대역의 손을 한 번씩 비췄다. 처음엔 그림자가 정해진 동작을 따라왔다. 왕이 왼손을 움켜쥐자 노담의 손바닥에 통증이 번졌다.
“멈춰요.” 연화가 외쳤다.
노담은 손을 펴려 했다. 붉은 실이 당겨졌지만 그의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왕의 손이 주먹을 쥔 채 떨리고 있었다.
“전하, 손을 펴십시오.” 류백이 말했다.
“괜찮소.”
“괜찮지 않잖아요.” 연화가 무대 안으로 들어갔다. “연습도 멈추세요.”
왕은 그녀를 노려봤다. “대역이 해야 할 일을 배우가 정하오?”
“그가 다치면 대역이 없어집니다.”
“그럼 다른 장인을 부르면 되겠지.”
노담은 붉은 실을 끊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리고 왕의 왼손을 바라봤다. “전하, 그림자가 주먹을 쥔 건 통증 때문입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잡으려는 겁니까?”
왕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 질문은 명령서에 없소.”
“빈 세 번째 장에 답이 적혀 있나요?”
왕은 손을 폈다. 그림자도 따라 움직였다. 대역선의 압력이 느슨해졌다. 노담은 손바닥의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연화가 물었다. “형의 인장은 왜 지금 쓰였죠?”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류백을 불렀다. “공연 결말은 내가 직접 쓰겠다고 했소. 그 명령을 따르시오.”
“명령서의 인장이 두 개입니다.” 노담이 말했다.
왕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왔다. “무슨 뜻이오?”
“왕실 인장 말고 다른 인장이 찍혀 있어요. 형의 문장이라고 들었습니다.”
류백이 얼른 말했다. “대역이 문서를 해석하는 건 업무가 아닙니다.”
“그럼 대역은 왕의 움직임만 따라 하면 됩니까?”
왕은 손을 내렸다. “다음 공연에서 그림자가 칼을 들면 멈추지 마시오.”
연화가 숨을 삼켰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칼을 내릴 때까지 연기하시오.”
“그림자는 왕보다 먼저 움직입니다.” 노담이 말했다.
“그래서 대역이 필요한 것이오.”
“그럼 제가 왕보다 먼저 칼을 들어야 합니까?”
“그림자가 칼을 들면 대역도 들어야 하오.”
류백은 왕실 수행관에게 명령을 취소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연화 쪽을 봤다. 연화는 대본의 첫 장을 찢지 않고 공연 대본 사이에 넣었다.
“우리는 명령을 받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세 번째 장은 우리가 채울 수 있어요.”
“무슨 장면을 할 건데?” 노담이 물었다.
“왕이 칼을 내려놓는 장면이 아니라, 손을 펴는 장면.”
“그 장면을 관객에게 보여 주면 왕이 화낼 거야.”
“이미 화낼 거야. 그러니 적어도 우리가 왜 무대에 서는지는 선택하자.”
노담은 왕의 허리춤에 걸린 칼을 보았다. 진짜 칼이었다. 나무 소품과 달리 검은 문양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는 칼의 손잡이에서 왕실 문장 아래 작은 새 문양을 발견했다. 그 인장은 왕의 형이 쓰던 것이었다.
“그 칼도 명령서와 같은 문장이에요.”
왕이 칼을 뽑았다. 그림자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대역선은 노담의 몸을 당겼다. 노담은 칼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붉은 실이 노담의 허리를 더 세게 조였다. 연화가 숨을 죽였다. 노담은 실을 놓지 않았다. 그날은. 류백은 왕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무대 뒤의 단원들은 서로 손을 붙잡았다.
왕은 손을 멈췄다. “대역은 따르지 않는군.”
“대역은 그림자를 따라갑니다. 전하를 따라가는 건 아니에요.”
왕은 칼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 빈 세 번째 장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 장면을 올려 보시오. 다만 결말은 공연 중에 정하겠소.”
왕이 떠난 뒤 류백은 대본의 빈 장을 받아 들었다. “그는 정말로 결말을 바꿀 생각일까요?”
“모르죠.” 연화가 말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장면을 고를 수 있어요.”
노담은 막 위에 자기 손을 비췄다. 그림자는 손가락을 펴고 있었다. 왕은 아직 무대에 없었다. 그런데 그림자의 왼손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무대 뒤에서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의 칼을 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