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인형극단의 왕실 대역

2화: 대역 배우의 지워진 초상
대역 연습은 왕이 손가락을 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노담은 붉은 대역선을 허리에 맸다. 왕은 무대 가운데 서서 오른손을 들었다. 이번엔 그림자가 따라왔다. 한 박자 빠르지 않았다. 노담도 함께 손을 들었다.
“멈추시오.”
왕이 손을 내리기 전에 그림자가 내렸다. 노담의 팔꿈치가 뒤늦게 흔들렸다. 손바닥 통증은 없었다.
“어제와 달리 통증이 없네요.” 노담이 말했다.
“어제 네가 다친 탓이겠지.”
“전하의 손에는 상처가 없습니다.”
왕은 왼손을 펴 보였다. “여긴 아프지 않소.”
류백은 연습을 중단하자고 했지만 왕은 세 동작을 더 지시했다. 일어나기, 걷기, 칼을 드는 시늉. 마지막 동작에서 왕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자 노담의 손바닥이 타는 듯 아팠다. 그림자는 칼을 들지 않았지만, 주먹을 쥔 채 떨었다.
“그만!” 연화가 막을 걷었다.
왕이 손을 폈다. “왜 멈췄소?”
“대역이 통증을 느꼈습니다.” 류백이 말했다.
“대역은 왕의 몸짓을 흉내 내는 자리요. 불편함까지 함께 연기할 필요는 없소.”
“그건 연기가 아니었습니다.” 노담이 답했다.
왕은 그의 손을 바라봤다. “그럼 무엇이었소?”
“전하가 느끼는 고통을 제가 같이 느꼈습니다.”
왕은 왼손을 등 뒤로 감췄다. “그럴 리 없소.”
연화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전하, 공연에서는 손을 숨기셨습니다. 통증을 감추는 장면이었나요?”
왕은 침묵했다. 류백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연습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대역선의 구조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왕은 노담에게 다음 공연 전까지 왕의 동작을 모두 익히라고 명령했다. 그의 손이 문고리에 닿기 직전, 그림자가 먼저 문 쪽으로 돌아섰다. 왕은 그 움직임을 못 본 듯 방을 나갔다.
“왜 왕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걸 부정하죠?” 노담이 물었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겁니다.” 류백은 붉은 실을 풀었다. “왕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림자도 달라집니다.”
“그건 규칙이 아니라 핑계예요.”
연화는 무대 바닥을 쓸었다. “그림자 막을 바꾼 사람부터 찾자. 조명 명령에 이름이 없었어.”
류백은 극단의 오래된 보관실 열쇠를 꺼냈다. “이전 대역 기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까는 폐기된 공연이라고 했죠.”
“그래서 남아 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럼 열어봐야 알겠네요.”
보관실에는 소품 상자와 반쯤 썩은 천이 쌓여 있었다. 나무 인형은 관절이 빠져 있었고, 왕실 문장이 그려진 가면들은 얼굴 부분이 칼로 긁혀 있었다. 노담은 벽의 초상화 액자를 발견했다. 액자 속 그림은 텅 비어 있었지만, 벽지에는 누군가 오래 걸어 둔 자국이 남았다.
“누가 있었던 자리예요.” 그가 말했다.
연화가 벽지를 만졌다. “여기 못 자국이 네 개야. 큰 초상이 걸렸던 것 같아.”
류백은 보관실 안쪽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오래된 공연 명단이 있었다. 첫 대역 배우의 이름은 ‘강무찬’. 옆에는 왕실 검열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 사람은 기록에 없어요.” 류백이 말했다.
“초상만 지웠다고 사람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노담은 명단을 넘겼다. 마지막 공연 날짜는 18년 전. 장소는 지금 왕이 즉위하기 전의 별궁이었다.
연화가 다른 상자를 열었다. 낡은 거울 조각과 무대 대본이 나왔다. 대본에는 ‘왕이 손을 움켜쥐면 그림자가 칼을 든다’고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은 검은 잉크로 지워져 있었다.
“이 대본, 지금 공연하고 비슷해요.” 연화가 말했다.
“같은 그림자를 썼다면 연결이 반복된 거야.” 노담은 거울 조각을 들었다. 안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손보다 먼저 주먹을 쥐었다.
그는 손을 폈다. 그림자는 늦게 따라왔다.
“노담.” 연화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너 괜찮아?”
“내 그림자가 먼저 움직였어.”
류백이 거울을 낚아챘다. “이 물건을 보관실 밖으로 가져가면 안 됩니다.”
“왜요?”
“그때도 이런 현상이 있었어요. 강무찬이 대역을 맡은 뒤 그림자와 몸의 감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죠?”
“공연 다음 날 사라졌습니다.”
“왕실이 데려갔나요?”
“기록엔 자발적 퇴장이라고 적혀 있어요.”
연화가 대본을 펴 들었다. “그 기록을 믿어요?”
“아니요. 그래서 아직 이 방을 닫지 못했습니다.”
노담은 빈 액자를 바라봤다. “그 사람 초상은 누가 지웠어요?”
“왕실 기록관이요. 왕실에서 이름을 지우면 극단은 그 사람을 더는 고용할 수 없습니다.”
“그럼 누가 그를 기억하죠?”
연화가 말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해.”
그녀는 대본 안쪽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연화, 이 기록을 읽었다.’ 이름을 적자 종이 가장자리에서 검은 그림자가 번졌다. 그 그림자는 액자 빈 곳에 사람의 어깨와 턱선을 그렸다.
노담은 손을 들지 않았는데도 거울 속 그림자가 먼저 손을 뻗었다. 이번엔 나무칼이 아니라 빈 액자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왕과 닮은 얼굴이 서 있었다.
류백이 숨을 멈췄다. “저건 강무찬이 아닙니다.”
연화가 물었다. “그럼 누구죠?”
그 순간 보관실 문 밖에서 근위대가 두드렸다. “대역 배우를 왕 앞에 데려가라. 지금 당장.”
류백은 보관실 문에 귀를 댔다. 근위병들이 복도를 지나가는 소리가 멀어졌다. 그는 자물쇠를 걸고 노담에게 낮게 물었다. “무대에서 그 얼굴이 보인 걸 본 사람이 더 있습니까?”
“왕실 대기실에서 전하가 보셨을 거예요.” 연화가 답했다. “그러니 대역을 부른 거겠죠.”
“전하는 거울 속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막에 비친 형체는 관객에게만 보였어요.”
“그럼 왕은 왜 저를 대역으로 골랐죠?”
류백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 그림자가 강무찬과 닮았습니다.”
노담은 손에 묻은 숯가루를 문질렀다. “저는 강무찬을 본 적 없습니다.”
“극단에 들어오기 전 이름은 기록에서 지워졌습니다. 그림자 인형을 만드는 사람 중에 같은 손 모양을 가진 이는 드물어요.”
연화가 노담의 화상 흉터를 봤다. “네가 처음 배운 인형극을 가르친 사람은 누구야?”
“이름을 모르는 떠돌이 장인이야. 극단에 잠깐 머물다 떠났어.”
“그 사람 손에도 같은 흉터가 있었어?”
“아니. 다만 손가락 두 개가 움직이지 않았어. 왼손으로 인형을 잡았지.”
류백은 벽의 빈 못 자리를 바라봤다. “강무찬도 왼손으로 인형을 조작했습니다. 오른손은 왕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다쳤다고 기록돼 있어요.”
“그 사람은 왕의 대역이었나요?” 연화가 물었다.
“대역이 아니라, 왕이 되기 전의 왕자와 함께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공연 뒤 왕자가 즉위했고, 강무찬은 사라졌죠.”
“왜 이름을 지웠어요?”
“왕자와 왕의 그림자가 겹치는 공연을 했기 때문입니다. 관객은 그 그림자에서 왕좌를 노리는 다른 얼굴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거군요.”
“그럴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 얼굴이 강무찬인지, 왕의 억눌린 기억인지는 아직 몰라요.”
노담은 거울 조각을 천 위에 놓았다. “확인할 방법은요?”
“공연을 다시 올리는 겁니다.”
연화가 코웃음을 쳤다. “왕실이 허락하겠어요?”
“허락하지 않아도, 다음 공연의 대본은 이미 내렸습니다.” 류백은 검열 도장이 찍힌 문서를 꺼냈다. “왕실은 그림자가 칼을 들지 않는 장면을 원합니다. 왕이 먼저 칼을 내리고, 대역은 그 동작을 따라 하라는 지시입니다.”
“그럼 관객은 그림자가 먼저 움직였다는 걸 다시 못 보겠네요.” 노담이 말했다.
“그게 왕실의 의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본에 없는 걸 연기하면 안 돼요?” 연화가 물었다.
류백은 문서를 찢지 않았다. 대신 왕실 도장 옆에 자기 이름을 썼다. “내가 감독 책임을 지겠습니다. 다만 당신들이 선택해야 합니다.”
문밖의 발소리가 멈췄다. 근위대장은 이미 문을 열 수 있었지만 일부러 두드리고 있었다. 류백은 그가 대기실에서 왕의 대역을 지켜본 적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감독님, 문서에 서명을 넣으시면 왕실 공연단에서 해임될 수 있어요.” 연화가 속삭였다.
“그럼 극단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극단도 왕실 돈을 받아요.”
“그 돈으로 입을 막으려는 순간부터 이미 빚을 졌지요.” 류백은 도장을 품에 넣었다. “이번에는 누구 이름도 지우지 않겠습니다.”
노담은 그 말이 약속인지, 오래 미뤄 둔 사과인지 알 수 없었다. 연화는 그 서명 옆에 자기 이름도 나란히 적었다. 왕실 문서가 아니라 극단의 대본 여백에. 노담도 보았다. 그의 손이 떨렸다. 조금 더. 하지만 류백이 문을 열기 전까지 서명을 지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보았다.
근위대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대역 배우를 지금 데려오라는 명입니다!”
류백은 거울 조각을 소품 상자에 감췄다. 연화는 빈 액자를 천으로 덮었다. 노담은 왕실 문장이 새겨진 나무칼을 허리춤에 꽂았다. 문을 열기 전, 류백은 세 사람을 돌아봤다.
“오늘 본 얼굴에 이름을 붙이지 마십시오. 이름이 생기면 왕실은 그 사람을 찾아낼 겁니다.”
노담은 거울을 내려놓았다. 그림자는 액자에 남아 있었다. 그 얼굴은 왕보다 젊었고, 한쪽 눈썹 아래에 칼자국이 있었다. 궁궐 초상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류백은 그 얼굴을 알아본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것은 류백뿐이 아니었다. 액자 안의 얼굴도 같은 순간 눈을 감았다. 소품 상자 속 거울 조각이 바닥을 세 번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