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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인데 마왕과 몰래 연애 중입니다6화

성녀인데 마왕과 몰래 연애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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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안개 속의 마왕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어둠이 번져 왔다.

북부 회색 평원의 동틀 녘은 희미한 새벽빛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뼈마디를 시리게 파고드는 냉무가 대지를 낮게 훑었고 얼어붙은 진흙 위로 수천 명의 숨소리가 하얗게 엉겨 붙었다.

"전열 유지하라! 방패병들은 무릎을 굽히지 마라!"

루카스의 서슬 퍼런 호령이 얼어붙은 공기를 갈랐다. 은빛 갑주를 차려입은 제1성기사단원들이 방패를 촘촘히 맞물려 은색의 성벽을 세웠다.

하지만 방패를 쥔 기사들의 손가락마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쿵. 쿵. 쿵.

대지를 울리는 거대한 진동. 그것은 단순한 군화 소리가 아니었다. 마계의 깊은 밑바닥에서 기어 나온 듯한 불길한 고동이자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기괴한 중압감이었다.

"성녀님, 뒤로 물러서셔야 합니다."

루카스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엘레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칼자루를 쥔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적이 능선 전체를 둘러쌌습니다. 선발대의 규모만으로도 정벌대 전체를 압도합니다. 봉화탑 방호벽 안으로 들어가 마차에 오르십시오."

"물러서지 않아요."

엘레나는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성스러운 백금색 예복 위에 덧입은 흰 모피 망토가 칼바람에 펄럭였다. 맑은 금발 사이로 드러난 보랏빛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북쪽 안개를 응시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얼어붙은 땅 위에서 칼을 쥐고 서 있는데 신의 대리인이 어찌 홀로 안전한 마차 안에 숨겠습니까."

"하지만 전선이 무너지면 위험합니다!"

"무너지지 않게 제가 여기서 빛을 밝힐 거예요."

엘레나의 맑고 결연한 목소리가 주변 기사들의 귀에 스며들었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굳어가던 병사들의 턱 끝이 조금씩 들렸다. 성녀가 자신들의 뒤에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어붙은 손에 다시 미약한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루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성녀님께서 이토록 연약한 몸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계신다. 내가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내야만 한다.'

루카스의 충성심이 비장한 불꽃으로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우르르릉-!

갑작스럽게 대지가 요동쳤다. 평원의 마른 풀들이 검게 타들어가며 바스러졌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잿빛 구름이 소용돌이치더니 칠흑 같은 어둠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큭……!"

"숨, 숨이 안 쉬어집니다……!"

기사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짓누르는 거대한 악의이자 살아 있는 생명체의 영혼을 밑바닥부터 얼려버리는 절대적인 마압이었다.

능선 위를 덮고 있던 짙은 안개가 거인의 손에 찢겨 나가듯 양옆으로 갈라졌다.

어둠의 통로 사이로 한 명의 기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칠흑빛 군마. 그 위에 올라탄 사내의 어깨에는 밤하늘을 그대로 베어낸 듯한 검은 망토가 늘어져 있었다. 흑요석처럼 짙은 흑발 아래로 타오르는 핏빛 눈동자가 전장을 오만하게 굽어보았다.

마왕, 칼릭스 폰 발하이트.

수년 동안 제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마계의 절대 군주가 친히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마…… 마왕이다!"

"마왕이 직접 나타났다!"

누군가의 절규가 터져 나오자마자 정벌대의 전열이 모래성처럼 흔들렸다.

일개 마족 부대조차 아니었다. 마계의 수장이 직접 행차했다는 사실은 제국군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몇몇 병사들은 무기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려 창과 방패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덜그럭거리는 쇠붙이 소리가 전장의 침묵을 날카롭게 긁었다.

칼릭스는 미동조차 없이 군마를 멈춰 세웠다.

차가운 시선이 수천의 제국군을 벌레 보듯 훑었다. 전장 전체를 집어삼킨 살기 어린 침묵 속에서 칼릭스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평원 전체를 울렸다.

"빛의 신을 섬긴다는 미물들이 겁도 없이 짐의 영토 앞마당을 밟았군."

서늘한 음성이 귓가를 때리는 순간 수십 명의 병사들이 그대로 무릎을 꺾으며 쓰러졌다. 마압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

"더는 다가오지 마라!"

찢어질 듯한 외침과 함께 루카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빛 신성 검기가 장검 위로 사납게 타올랐다. 루카스는 한 줄기 섬광처럼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제국 제일의 검사다운 날카롭고 결사적인 돌격이었다.

"성녀님께 다가서려거든 내 시체를 먼저 밟고 넘어가라!"

루카스의 칼끝이 칼릭스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했다. 공기를 가르는 검격은 얼어붙은 평원을 갈라놓을 듯한 위력이었다.

그러나 칼릭스는 안장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칼릭스는 그저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왼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파아앙-!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얇은 어둠의 파동이 루카스의 칼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다음 순간 루카스의 검을 감싸고 있던 푸른 검기가 유리창 깨지듯 산산조각 났다. 압도적인 질량의 마력이 루카스의 온몸을 그대로 강타했다.

"커헉……!"

루카스의 신형이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사납게 내동댕이쳐졌다.

얼어붙은 흙바닥을 대여섯 번 구른 끝에 간신히 멈춰 선 루카스는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손목 뼈가 부러진 듯 검을 쥔 손이 처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단 한 합. 검을 맞댄 것도 아닌 가벼운 마력의 튕겨냄만으로 제국 최강의 성기사단장이 바닥에 뒹굴었다.

"단장님!"

"괴물이다…… 저건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정벌대 전체가 완전한 패닉에 빠져들었다. 뒤로 물러서려는 병사들의 발소리가 어지럽게 뒤엉켰다. 방진은 이미 무너졌고 도망치려는 공포가 전선 전체를 집어삼키기 직전이었다.

칼릭스는 천천히 군마에서 내려섰다. 검은 군화를 딛고 땅에 내려서는 순간 주변 십 리 안팎의 서리가 검은 얼음으로 뒤바뀌었다.

"교단 놈들이 내세운 가장 빛나는 장난감이 이곳에 와 있다고 들었다."

칼릭스의 붉은 눈이 제국군의 뒤편에 선 흰 망토를 두른 여인을 정확히 꿰뚫었다.

"나와라, 성녀. 네가 이 미물들의 목숨을 대신 짊어질 것이냐."

살벌하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도발이었다.

"성녀님…… 안 됩니다……!"

바닥에 쓰러진 루카스가 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엘레나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바둥거렸다.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가 하얀 턱을 적셨다.

"저자는……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마물이 아닙니다…… 제발 도망치십시오……!"

엘레나는 허리를 숙여 루카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손끝에서 맑고 순수한 온기가 흘러나와 루카스의 부러진 뼈와 뒤틀린 기혈을 감싸 안았다. 고통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자 루카스는 멍하니 엘레나를 올려다보았다.

"루카스 경은 충분히 최선을 다해 우리를 지켜 주었어요."

엘레나는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부터는 제 몫입니다."

"성녀님……!"

엘레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주변의 성기사들이 경악하여 손을 뻗었지만 엘레나의 몸을 감싸고 피어오른 성스러운 기운에 압도되어 감히 앞길을 막아서지 못했다.

스슥, 스슥.

얼어붙은 평원 위로 엘레나의 흰 구두 소리가 정적을 깼다.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하던 수천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무너진 방진을 넘어 칠흑의 악마가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공간 한복판으로 성녀가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엘레나는 칼릭스와 백 보 남짓 거리를 둔 채 멈춰 섰다.

그리고 가슴 앞에 양손을 모았다.

화아아아악-!

순식간에 평원 전체가 눈부신 황금빛으로 뒤덮였다.

성녀의 심장부에서부터 솟구쳐 오른 정화의 신성력이 거대한 빛의 기둥이 되어 잿빛 하늘을 꿰뚫었다. 칠흑같이 어둡던 구름이 갈라지고 찬란한 아침 햇살 같은 온기가 얼어붙은 대지 위로 쏟아져 내렸다.

병사들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던 끔찍한 마압이 봄눈 녹듯 부드럽게 지워졌다.

검게 타들어갔던 마른 풀들이 파릇한 생기를 되찾고 공포로 질려 있던 병사들의 뺨 위로 따뜻한 바람이 스쳤다.

"아…… 아아……!"

"성녀님의 은총이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던 전장이 단 한 번의 기도만으로 신성한 성역으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방패를 쥐고 있던 기사들의 눈에 경외감과 희망이 가득 들어찼다.

'성녀님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홀로 마왕의 저주를 정면으로 받아내고 계신다!'

루카스는 피눈물을 흘리며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혔는데 저 가녀린 성녀가 전군을 위해 스스로 방패가 되어 어둠과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평원 한가운데 서 있는 두 당사자의 내막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빛과 어둠이 맹렬하게 부딪쳐 불꽃을 튀기는 그 중심에서 엘레나의 흰 장갑 안쪽에 숨겨진 반지가 은밀하게 진동했다.

'엘레나.'

칼릭스의 목소리가 반지를 통해 귓가에 선명하게 울렸다. 겉으로는 세상 모든 것을 멸망시킬 것 같은 잔혹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목소리는 지나치게 다정하고 조심스러웠다.

'기운을 너무 많이 쓰지 마라. 네 손목이 떨리고 있다.'

엘레나는 겉으로는 성녀의 위엄을 갖춘 채 서늘한 표정을 유지했으나 속으로는 기가 차서 혀를 찰 뻔했다.

'……누구 때문에 신성력을 이렇게 쏟아부었는데요? 폼은 혼자 다 잡고 와서는 병사들을 다 기절시켜 놓으면 어떡해요!'

'네가 기를 펴고 설 수 있게 해 주려면 내가 이 정도는 악명을 떨쳐 줘야지.'

'너무 과하잖아요! 아까 루카스 경은 진짜로 죽을 뻔했다고요!'

반지 너머로 칼릭스가 흠칫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힘 조절을 했다. 뼈만 살짝 금이 갔을 뿐이다. 네가 그 기사 놈을 너무 걱정하니까 불쾌해서 조금 밀어냈을 뿐이야.'

'질투할 자리가 따로 있지 전장에서 무슨 짓이에요!'

'전장이든 침실이든 네가 다른 사내를 감싸는 꼴은 보기 싫다.'

엘레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수천 명의 병사와 기사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올리고 있는 마당에 성녀가 피식 웃어버리면 모든 각본이 물거품이 될 터였다.

엘레나는 허리춤에서 의식용 세검을 뽑아 들었다. 맑은 금빛 칼날이 칼릭스의 가슴을 겨누었다.

"마왕 칼릭스! 어둠의 군세를 거두고 당장 마계로 물러나세요! 신의 이름을 걸고 더 이상 당신의 악행을 묵과하지 않겠습니다!"

엘레나의 쩌렁쩌렁한 일갈이 평원에 울려 퍼지자 제국군 병사들이 환호성을 삼켰다. 성녀의 용맹한 선언에 전율한 것이었다.

칼릭스 역시 냉혹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는 허공을 움켜쥐었고 칠흑의 마력이 뭉쳐져 거대한 대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가소롭구나, 루미나스의 성녀. 네 하찮은 빛으로 짐의 심장을 벨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두 거대한 힘이 일촉즉발의 위기로 팽팽하게 맞물렸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대치 속에서 칼릭스의 목소리가 다시 반지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약속대로 세 번째 검격이다. 내 오른쪽 어깨를 스치듯 베어라.'

'너무 깊게 베이지 않게 조심해요. 알았죠?'

'네 손에 베이는 거라면 상처라도 좋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요!'

'보고 싶었다. 엘레나.'

엘레나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심장이 붉게 물드는 기분에 그녀는 황급히 검을 고쳐 쥐었다.

빛과 어둠, 성녀와 마왕.

세상을 속이는 지상 최대의 연극이 마침내 그 막을 올리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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