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인데 마왕과 몰래 연애 중입니다

3화: 새벽의 소환장
창틀 너머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차갑게 번져 나갔다.
대성전의 정적을 깨고 첫 번째 종소리가 울리자 기도실 안의 촛불이르르 흔들렸다. 커튼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 칼릭스는 엘레나의 뺨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아쉬움과 함께 짙은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새벽 종이 울렸다."
칼릭스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교황이라는 자의 소환장이 마음에 걸린다. 만약 저자가 너를 해치려 하거나 억지를 부리면 망설이지 말고 반지를 눌러라. 내가 즉시 이 대성전의 차원을 찢고 들어오겠다."
"칼릭스."
엘레나는 그의 검은 장갑 낀 손을 살포시 쥐며 미소지었다.
"우리가 아까 한 약속을 벌써 잊은 건 아니죠? 이 안에서는 피를 보지 않기로 했잖아요."
"네가 위험에 처한다면 약속의 조건이 바뀐다."
"당신은 걱정이 너무 많아요. 교황 성하께서 날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는 건 잘 아시잖아요. 제 뒤에는 제국 백성들의 지지와 성기사단이 있어요."
칼릭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엘레나의 손바닥에 쥐여 주었다. 주머니 입구를 열자 은은한 숲 향기와 함께 머리가 맑아지는 마력이 피어올랐다.
"마계 국경 지대의 은달빛 풀이다. 머리가 아플 때 향을 마셔라."
"남부의 몽블랑에 이어 마계 특산 약초까지. 밤마다 챙겨 오시느라 바쁘시겠네요."
"너를 위한 거라면 바쁘지 않다."
칼릭스는 무릎을 살짝 굽혀 엘레나의 장갑 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어둠이 그의 몸을 얇은 섬유처럼 감싸 안더니 창밖의 새벽 그림자 속으로 순식간에 녹아들었다. 흔적조차 남지 않은 완전한 은폐였다.
엘레나는 손바닥에 남은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흰 비단 장갑을 다시 정돈하여 손가락에 끼워진 월광의 맹세 반지를 완벽히 가렸다.
두 번째 종소리가 대성전 전체를 울렸다.
"이제 나갈 시간이야."
엘레나는 거울 앞에 서서 거친 숨을 고르고 성녀의 표정을 가다듬었다. 자애롭고 고결하며 세상의 모든 고통을 품어 안는 듯한 완벽한 미소였다.
회랑의 돌바닥은 새벽 기운을 머금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엘레나는 긴 사제복 자락을 정돈하며 교황의 집무실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백은빛 기둥 사이로 촛불을 든 신관들이 지나가며 그녀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교황 집무실의 커다란 묵직한 오크나무 문 앞에 다다르자 제삼 종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집무실 내부에는 짙은 침향 냄새가 자욱했다. 화려한 금실로 수놓아진 양탄자 끝에는 제국 교단의 최고 권력자인 교황 아르만이 성장을 짚은 채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측면에는 은빛 갑옷을 정갈하게 입은 성기사단장 루카스가 단단한 자세로 서 있었다.
"성녀 엘레나 로렌스. 성하를 뵈옵니다."
엘레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교황 아르만은 주름진 눈가를 지그시 누르며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성녀를 향한 검증과 탐색의 빛이 서려 있었다.
"어서 오게, 엘레나. 새벽 일찍 불러내어 미안하네. 하지만 성회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기도실 근처의 결계가 흔들렸다는 보고를 받고 염려가 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네."
교황의 시선이 엘레나의 얼굴을 날카롭게 훑었다.
"루카스 경의 보고에 따르면 어젯밤 서쪽 회랑 일대에 마력의 잔향이 짙게 감돌았다더군. 혹여나 마왕의 사악한 첩자나 저주가 대성전의 성역을 침범한 것은 아닌가?"
엘레나는 조용히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루카스가 아무리 의식을 감싸주려 했어도 결계 보강 건과 마력 잔향 보고는 정식 절차를 타고 교황에게 올라간 모양이었다.
아르만 교황은 성장의 윗부분에 박힌 붉은 보석을 은근히 내밀었다.
"내 자네의 신성 마력 상태를 직접 감정해 보고 결계의 손상 정도를 점검하려 하네. 손을 올리게."
교황의 성장에 손을 올리는 순간 그 안에 담긴 교단 특유의 탐색 마력이 엘레나의 몸 안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마력 구조를 파헤칠 터였다. 마왕과의 신성력 교류 흔적이나 장갑 밑의 반지가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엘레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손을 가슴 중앙에 모았다.
"성하. 저를 향한 걱정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제 마력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성장까지 거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엘레나는 눈을 감고 체내의 신성력을 가볍게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집무실 안 전체가 눈이 부실 정도의 맑고 순수한 금빛 신성력으로 가득 찼다. 촛불의 그늘마저 지워 버리는 압도적인 신성 마력이 양탄자와 벽화를 따라 부드럽게 물결쳤다. 짙게 깔려 있던 침향 냄새가 흩어지고 갓 핀 꽃밭처럼 맑은 기운이 공간을 채웠다.
교황 아르만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성장에 모으려 했던 탐색 마력은 엘레나가 방출한 신성력의 파도에 눌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정도로 맑은 신성력이라면…… 저주는커녕 어떤 사악한 기운도 범접할 수 없겠군요."
엘레나는 신성력을 거두며 온화하게 웃었다.
"어젯밤의 결계 흔들림은 외부 침입이 아닙니다. 제국 전역에서 몰려드는 어둠의 원망과 마왕의 저주 기운을 제가 홀로 기도실로 불러들여 정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진동이었습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루카스가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묵직한 주먹으로 가슴 갑옷을 쿵 소리가 나도록 치며 무릎을 꿇었다.
"교황 성하! 성녀님의 말씀이 사실입니다!"
루카스의 목소리에는 비장함과 숭고한 감격이 가득 차 있었다.
"어젯밤 제가 직접 서쪽 회랑을 순찰하며 목격했습니다. 성녀님께서는 제국 백성들이 받아야 할 마왕의 악의와 고통을 홀로 몸으로 감내하고 계셨습니다! 그 감당하기 힘든 악의를 억누르느라 기도실 내부의 공물이 으깨지고 결계가 크게 흔들렸던 것입니다!"
교황이 눈썹을 찌푸렸다.
"공물이라니? 그것이 무슨 소린가, 루카스 경?"
"성녀님께서는 달콤한 순수성을 지닌 특수한 공물을 매개로 악의를 흡수하는 고대의 정화 의식을 치르고 계셨습니다! 제 무지함 탓에 자세한 의식의 비밀을 다 알지는 못하나 그 숭고한 광경과 마력의 잔향은 제 눈과 피부로 똑똑히 느꼈습니다!"
루카스는 감정에 겨운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성녀님은 어둠의 저주와 맞싸우느라 매일 밤 피를 말리는 정화를 올리고 계십니다. 그런 분의 신성력을 의심하거나 기도실에 경호 인력을 추가 배치하여 의식을 방해하는 것은 제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엘레나는 겉으로는 엄숙하고 그윽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이마를 짚고 싶었다.
몽블랑 디저트 상자와 으깨진 딸기 하나가 루카스의 머릿속에서 '달콤한 순수성을 지닌 고대의 정화 공물'로 완벽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그의 눈부신 착각과 충성심이 이토록 든든하면서도 민망할 수가 없었다.
교황 아르만은 루카스의 열렬한 증언과 엘레나가 보여 준 압도적인 신성력에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
교황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성녀의 영향력이 성기사단장과 백성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높아진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녀의 성스러운 힘이 완벽하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흠…… 성녀가 홀로 제국의 악의를 정화하느라 노고가 많다는 것은 잘 알겠네."
교황 아르만이 성장을 바닥에 툭 치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잘된 일 아닌가. 자네의 그 위대한 정화 능력이 전장의 병사들에게 전달된다면 제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것이네."
엘레나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교황은 집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금빛 인장이 찍힌 양피지 서류를 집어 들었다.
"오늘 새벽 최고 성제회에서 최종 결정이 내렸네. 마계의 침공을 저지하고 마왕을 단죄하기 위해 제국 정벌대가 사흘 뒤 북부 국경 전선으로 출정한다."
교황의 눈동자에 흉흉한 욕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성녀 엘레나 로렌스 자네가 이번 정벌대의 수장이자 정신적 지주로서 직접 전선에 참전해 주어야겠네."
"제가…… 전선으로 출정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성녀가 직접 전장에 나서서 신의 축복을 내리고 마왕의 군세를 정화한다면 제국은 완벽한 승리를 거둘 것이네. 자네의 고결한 성성이 전장의 피비린내를 씻어 줄 것이야."
루카스는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성녀님의 보좌는 저와 제1성기사단이 목숨을 바쳐 수행하겠습니다!"
엘레나는 가슴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마왕 정벌대에 성녀로 참전한다는 것은 전선에서 마왕인 칼릭스와 직접 대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남들 보는 앞에서는 칼과 신성력을 휘두르며 서로를 죽일 듯이 연기해야 하고 눈을 피해 몰래 만나 염장을 질러야 하는 가혹한 이중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참전을 거부한다면 교황의 의심을 사고 교단의 압박이 더욱 강해질 터였다.
엘레나는 입가에 세상에서 가장 차분하고 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신의 빛이 머무는 곳에 평화가 온다면 소첩 기꺼이 그 전장으로 향하겠습니다. 백성과 병사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성녀의 소명이니까요."
교황 아르만은 만족스러운 듯 껄껄 웃었다.
"좋아! 역시 루미나스의 성녀답군. 출정 준비를 서두르게."
접견이 끝나고 교황 집무실을 나온 엘레나는 백은 회랑을 따라 걸었다. 루카스는 출정 경비 계획을 점검하겠다며 먼저 성기사단 본부로 달려갔다.
홀로 남겨진 회랑에서 엘레나는 장갑을 살짝 당겨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장갑 안쪽에 숨겨진 월광의 맹세 반지가 기분 좋은 온도를 내며 가볍게 진동했다. 마력의 공명을 통해 먼 마왕성에서 칼릭스가 전해 오는 은밀한 기척이었다.
반지 너머로 칼릭스의 무뚝뚝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음성이 귓가에 아련하게 환청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전장에서 만나자는 교황의 선물이군. 전장에서 베는 척하면서 밤에 어디서 만날지 정해야겠어.'
엘레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교황은 성녀를 전장에 끌고 가서 마왕을 멸하려 생각하고 있었고 성기사단장은 성녀를 목숨 바쳐 지키며 마왕을 찢으려 칼을 갈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성녀와 마왕은 전장 데이트 장소를 어디로 잡아야 걸리지 않을지 고민하게 된 셈이었다.
"전선이라…… 정말이지 쉽지 않은 연애네요."
엘레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아슬아슬하고 달콤한 기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어떤 시련과 오해가 가로막더라도 그녀와 칼릭스의 비밀스러운 사랑은 결코 꺾이지 않을 것이었다.
새벽의 햇살이 대성전의 지붕을 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성녀의 가장 달콤하고 살벌한 출정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