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부장님은 반찬가게를 엽니다

3화: 접어 둔 장부
오후 4시 55분.
사무실 벽걸이 시계의 초침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지막 바퀴를 돌고 있었다.
강도윤은 프린터에서 막 출력된 서류 뭉치를 가지런히 추려 스테이플러로 찍었다. 표지에는 '푸른마루 식품관 시범 입점 제안 검토 및 원가 보정안'이라는 제목이 단정하게 박혀 있었다.
협력 업체가 일방적으로 떠안던 폐기 위험을 본사와 5대 5로 분담하고 새벽 배송 인력의 고정 인건비를 명시한 수정안이었다. 이대로 올리면 마진율 숫자는 3퍼센트 떨어지지만 비현실적인 가짜 흑자를 적어 내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부장님, 이거 진짜 이대로 올리십니까?"
옆자리에서 모니터를 멍하니 쳐다보던 박민석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보면 엄 부장님 뒷목 잡으실 텐데요."
"뒷목 좀 잡으시라고 쓴 거야."
도윤은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터리 숫자로 본부장 보고 들어갔다가 나중에 현장에서 펑크 나는 것보다는 지금 욕먹는 게 낫다."
"그거야 맞지만…… 승진 심사 앞두고 굳이 총대를 메실 필요가……."
민석이 말끝을 흐리며 도윤의 눈치를 살폈다.
도윤은 민석의 책상 모서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민석아. 너도 오늘 6시 되면 가방 싸라."
"예? 저 아직 메일 정리도 다 못 끝냈는데요?"
"내일 아침에 해. 밥 굶고 밤새워봤자 오타만 늘어난다."
도윤은 더 대꾸하지 않고 부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엄 부장은 결재판에 서명을 갈기며 안경 너머로 도윤을 흘겨보았다.
"5시 맞췄네. 어디 봐."
엄 부장은 도윤이 건넨 보고서를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장수가 넘어갈수록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강 부장. 마진율이 왜 이 모양이야? 내가 아침에 분명히 선을 맞추라고 했을 텐데."
"가짜 숫자를 맞추면 나중에 협력 업체가 터집니다. 물류 보관비랑 새벽 배송 인건비 빠진 거 채워 넣었습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안 넣었어? 일단 본부장님 승인부터 받고 현장에서 깎아내야 일이 돌아갈 것 아니야!"
엄 부장이 서류를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너 요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래? 이번 프로젝트 잘 넘겨야 다음 인사 때 이사님 추천 들어간다는 거 몰라? 너 하나 보고 팀원들이 밤을 새웠는데 혼자 고고한 척 선비질이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부장실 유리창을 울렸다.
전생의 도윤이었다면 즉각 고개를 숙이고 수정하겠다고 빌었을 것이다. 상사의 인정이 인생의 전부였고 승진 명단에서 밀려나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도윤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잔잔했다. 스무 해 동안 그 자리를 지키려 발버둥 치다 남겨진 것이 텅 빈 장례식장과 고독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나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선비질 아닙니다. 식품은 사람이 먹는 물건이고 사람이 나르는 일입니다. 숫자만 맞춘 기획서는 첫 달도 못 버티고 무너집니다."
"강도윤!"
"보고서는 이대로 올리겠습니다. 수정 지시가 공식으로 내려오면 그에 맞춰 다시 검토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오늘 6시에 퇴근합니다."
엄 부장의 입이 딱 벌어졌다. 평소 군소리 없이 주말까지 반납하던 에이스 팀장이 던진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도윤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뒤 부장실을 나왔다.
등 뒤로 엄 부장이 혀를 차며 서류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발걸음은 조금도 무겁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온 도윤은 컴퓨터 전원을 껐다. 시계 바늘이 정확히 6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팀원들을 향해 도윤이 겉옷을 걸치며 말했다.
"다들 오늘 고생 많았다. 남은 일 없으면 정리하고 퇴근들 해."
도윤은 가방을 들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를 지나 회사 정문을 빠져나오는 순간 저녁의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하늘은 아직 엷은 군청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남들이 한창 야근을 시작할 시간에 가방을 들고 퇴근길 전철역으로 향하는 기분은 낯설 만큼 서늘했고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자유로웠다.
은솔역 개찰구를 빠져나와 익숙한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 손목시계는 6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윤은 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골목 모퉁이를 돌자 낡은 빌라 2층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주황색 불빛이 보였다.
창문 틈으로 구수한 멸치 육수 냄새와 달큰한 소고기무국 냄새가 바람을 타고 번져왔다.
계단을 올라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신발을 벗기도 전에 안쪽에서 타닥타닥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빠!"
노란 머리핀을 꽂은 예나가 거실에서 달려 나와 도윤의 다리를 와락 껴안았다.
"아빠 진짜 왔다! 엄마, 아빠 안 늦었어! 7시 안 됐어!"
예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소리를 지르며 도윤의 품에 얼굴을 비벼댔다.
도윤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예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품 안에 가득 차는 아이의 무게와 따뜻한 체온이 하루의 피로를 단숨에 씻어 내리는 것 같았다.
"아빠가 약속 지킨다고 했잖아. 우리 예나 배고팠지?"
"응! 엄마가 아빠 오면 같이 먹는다고 해서 기다렸어!"
주방에서 국자를 들고 나온 하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도윤을 바라보았다.
"여보…… 진짜로 7시 전에 왔네요? 회사 일 괜찮아요? 부장님이 뭐라고 안 해요?"
하진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함께 도윤이 무리해서 일찍 온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아. 오늘 할 일 깔끔하게 끝내고 나왔어. 밥 먹자. 배고프다."
도윤은 겉옷을 걸어두고 세수를 한 뒤 식탁 앞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고기무국과 갓 지은 쌀밥이 놓여 있었다.
그 곁으로 파릇하게 무쳐낸 시금치나물, 바삭하게 볶아낸 잔멸치볶음, 잘 익은 깍두기가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이 멸치볶음은 삼촌 가게에서 가져온 거야?"
도윤이 멸치볶음을 한 젓가락 집어 먹으며 물었다. 꽈리고추의 알싸한 향과 조청의 은은한 단맛이 어우러져 멸치의 비린 맛을 완벽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응. 낮에 은솔시장 갔다가 외삼촌 가게 들렀거든. 삼촌이 당신 가져다주라고 넉넉하게 담아주셨어. 국은 입에 맞아요?"
하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도윤은 숟가락으로 소고기무국을 한술 떠 입에 넣었다.
맑은 국물 속에서 푹 익은 무의 시원한 단맛과 소고기 양지의 깊은 감칠맛이 입안 가득 부드럽게 퍼졌다. 간장을 많이 쓰지 않고 소금과 멸치 육수로 간을 맞춰 국물이 맑고 끝 맛이 텁텁하지 않았다.
"정말 맛있다. 속이 다 풀리네."
도윤이 진심으로 감탄하자 하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다행이네. 낮에 시장에서 좋은 무를 골라왔거든."
"아빠! 나도 무 먹을 줄 안다!"
예나가 질세라 숟가락으로 무 조각을 떠서 입을 크게 벌렸다.
세 식구가 둘러앉은 작은 식탁 위로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다.
전생의 도윤이 그토록 많은 밤을 기름진 배달 음식과 술자리로 채우는 동안 집에서 기다리던 이 소박하고 거룩한 밥상을 왜 그토록 쉽게 저버렸던 것일까.
도윤은 밥그릇을 깨끗이 비워내며 마음속으로 깊이 새겼다. 이 식탁의 온기를 두 번 다시 빼앗기지 않겠다고.
식사를 마치고 목욕을 한 예나는 9시가 조금 넘자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도윤은 예나의 이불을 턱 밑까지 덮어주고 방 불을 끈 뒤 조용히 주방으로 나왔다.
식탁 위에는 낡은 스탠드 조명 하나가 켜져 있었다.
하진은 식탁 구석에 앉아 낡은 대학 노트 한 권을 펼쳐놓고 볼펜을 굴리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하진이 화들짝 놀라며 노트를 덮으려 했다.
"어머, 예나 벌써 잠들었어요?"
"응. 오늘 낮에 신나게 놀았는지 눕자마자 자네. 당신 뭐 보고 있었어?"
도윤이 하진의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하진은 덮은 노트를 슬그머니 자기 쪽으로 당기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가계부 정리 좀 하느라."
노트 겉면은 세월의 흔적으로 모서리가 닳아 있었고 겉장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다.
도윤의 머릿속에 전생의 기억 한 조각이 스쳐 지나갔다.
스무 해 전, 하진이 식탁에서 이 노트를 만지작거리며 어렵게 입을 열었던 날이 있었다.
'여보, 은솔시장 입구 쪽에 아주 작은 가게 자리가 하나 났는데…….'
그때 도윤은 야근 서류를 검토하느라 쳐다보지도 않고 쏘아붙였었다.
'지금 내가 과장에서 팀장 올라가느냐 마느냐 하는 판에 반찬가게가 웬 말이야? 헛소리 말고 집안 살림이나 신경 써.'
그 한마디에 하진은 입을 다물었고 그 후로 다시는 가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손맛도, 자신만의 꿈도 서서히 시들어갔다.
도윤은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게 조여오는 것을 느끼며 차분하게 물었다.
"낮에 은솔시장 다녀왔다고 했잖아. 삼촌은 잘 계시고?"
"응. 삼촌 여전하시지. 무뚝뚝하게 반찬통 툭 던져주시면서도 당신 밥 잘 챙겨 먹이냐고 묻더라."
하진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시장 골목 지나오는데…… 상철찬 맞은편 모퉁이에 있던 분식집 자리가 비었더라고. 임대 쪽지가 붙어 있었어."
하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가게가 작아서…… 딱 반찬 대여섯 가지 놓고 팔기 좋은 크기였는데."
말을 내뱉은 하진은 스스로 놀란 듯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그냥 지나가다 눈에 띄어서 해본 소리예요. 신경 쓰지 마요. 요즘 경기도 안 좋은데 무슨 장사야. 당신 회사 일도 바쁘고 예나도 이제 손 많이 갈 때인데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네."
하진은 자책하듯 노트를 서랍 쪽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자신의 꿈을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가족에게 죄를 짓는 것처럼 여기는 아내의 조심스러움.
전생의 자신이 심어놓았던 잔인한 상처가 아내의 마음속에 그대로 굳어 있는 것 같아 도윤은 목이 메었다.
"하진아."
도윤이 손을 뻗어 하진이 밀어 넣으려던 노트를 부드럽게 붙잡았다.
"잠깐 봐도 돼?"
"어……? 별거 없는데…… 그냥 옛날에 어머니 보면서 적어뒀던 거라."
하진이 당황하며 손을 뗐다.
도윤은 노트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첫 장을 넘기자 하진의 단정하고 꼼꼼한 손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계절별로 나는 나물들의 손질법, 멸치와 다시마를 우리는 시간과 불 조절, 짠맛을 줄이면서 감칠맛을 내는 찹쌀풀 배합 비율까지.
그 옆에는 반찬 한 통당 들어가는 재료비와 포장 용기 단가, 하루에 만들어낼 수 있는 적정 수량이 오밀조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대기업 식품사업부에서 십수 년간 유통과 원가를 다뤄온 도윤의 눈에도 그것은 단순한 취미 메모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연구하고 다듬어낸 완벽한 조리 지침서이자 철저한 사업 계획서였다.
하진은 어머니의 가게가 빚보증으로 넘어가 문을 닫은 뒤에도 이 노트를 버리지 못하고 밤마다 꺼내보며 혼자만의 꿈을 키워왔던 것이었다.
도윤의 손끝이 노트 가장자리를 떨리며 쓸어내렸다.
"이렇게 꼼꼼하게 다 적어놓고…… 왜 접으려고 했어?"
도윤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하진이 고개를 숙이며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무섭잖아. 어머니 가게 망했을 때 우리 집안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내가 다 봤는데……. 내가 욕심부리다 우리 세 식구 먹고사는 것까지 흔들릴까 봐. 당신 승진 앞두고 짐이 되기 싫었어."
하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스탠드 불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도윤은 노트를 덮고 식탁 너머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차갑게 식어 있는 하진의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하진아, 내 눈 봐봐."
하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도윤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깊고 단단했다.
"접지 마."
"여보……."
"네 손맛, 네가 밤마다 적어둔 이 장부, 절대 쓸데없는 욕심 아니야. 네가 얼마나 음식에 진심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도윤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전생에서 스무 해를 낭비하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던 진실. 가족의 행복은 승진이나 높은 연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얼굴을 마주보고 같은 길을 걸어갈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내가 도울게."
도윤의 단호한 목소리가 조용한 주방에 울려 퍼졌다.
"당신은 맛있는 반찬을 만들고 나는 원가 계산하고 유통이랑 가게 운영 맡을게. 나 회사에서 그런 거 십 년 넘게 한 사람이야."
하진의 눈동자가 거대하게 흔들렸다.
"당신…… 회사 그만두겠다는 소리예요? 그 좋은 직장을 왜……."
"좋은 직장이 가족의 저녁을 빼앗아간다면 그건 좋은 자리가 아니야. 예나 손잡고 유치원 보내고 당신이랑 마주 앉아서 저녁 먹는 거…… 그게 내 진짜 꿈이야."
도윤은 잡은 하진의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진아, 우리 같이 하자. 당신 반찬가게, 우리 둘이서 같이 열자."
스탠드의 따스한 주황색 불빛 아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하진의 눈에서 툭 하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식탁 위의 낡은 노트 표지를 적셨다.
스무 해의 후회를 넘어 마침내 새로운 운명의 첫 장이 은솔동의 작은 식탁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