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부장님은 반찬가게를 엽니다

2화: 전철 한 대의 평온
유치원 문이 닫힌 뒤에도 강도윤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담장 안쪽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터졌다. 예나의 목소리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도윤은 그 소리만으로도 발을 떼기 어려웠다.
손바닥에는 아직 작은 손가락이 남긴 온기가 있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화면에는 식품팀 엄 부장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부재중 전화는 벌써 네 통이었다.
전생의 도윤이라면 식은땀을 흘리며 곧장 뛰었을 것이다. 지하철 계단을 두 칸씩 내려가고 사람들 사이를 밀치며 회의실로 달려갔을 것이다.
도윤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전철 한 대 놓쳤다고 세상 안 무너진다."
아침 식탁에서 하진에게 했던 말이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말은 쉬웠다. 몸은 아직 회사 쪽으로 먼저 반응했다.
그는 전화기를 뒤집어 주머니에 넣고 전철역 쪽으로 걸었다.
골목은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갓 문을 연 분식집에서는 어묵 국물 냄새가 났고 세탁소 앞 비닐 덮개에는 밤새 맺힌 물방울이 반짝였다. 은솔시장 입구에서는 낡은 셔터 올라가는 소리가 철컥철컥 이어졌다.
스무 해 뒤에는 이 소리들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같은 자리에 밝은 조명의 식품관이 들어섰고 사람들은 포장된 반찬을 집어 들었다.
편했다. 깨끗했다.
그런데 하진이 좋아하던 골목 냄새는 없었다.
도윤은 시장 쪽을 오래 보지 않으려 했다.
기억은 정답지가 아니었다. 전생에서 사라진 것들이 지금도 반드시 사라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걸 핑계로 하진의 마음을 앞질러 결정해서도 안 됐다.
휴대폰이 세 번째로 진동했다.
도윤은 이번에는 전화를 받았다.
"강도윤입니다."
"강 부장! 지금 어디야?"
엄 부장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전철역입니다. 회의에는 늦습니다."
"늦는다고 그렇게 차분하게 말할 일이야? 오늘 푸른마루 쪽 벤치마킹 자료 보고하는 날인 거 몰라?"
도윤은 잠깐 발을 멈췄다.
푸른마루.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리 안쪽이 얇게 저렸다. 전생에서 은솔시장 주변을 천천히 잠식하던 대형 유통사의 이름이었다. 지금 회사가 그 흐름에 닿아 있었다는 사실을 도윤은 이상하게도 잊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알면 뛰어. 엄살 부릴 시간 없어. 민석이가 밤새 자료 묶어 놨으니까 너는 들어와서 방향만 잡아."
민석.
도윤은 그 이름에도 숨이 걸렸다. 늘 농담을 하던 후배. 보고서 구석에 작은 글씨로 위험 조건을 적어 놓고도 윗선의 한마디에 지워버리던 직원. 나중에는 웃는 법조차 잊어버렸던 얼굴.
"부장님."
"왜."
"회의는 먼저 시작하십시오. 저는 도착하는 대로 원가 표와 납품 조건부터 보겠습니다. 방향은 오전 안에 드리겠습니다."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너 지금 나랑 기싸움하자는 거야?"
"아닙니다. 늦은 건 제 책임입니다. 대신 빈말로 맞추지 않겠습니다."
엄 부장이 낮게 욕을 삼켰다.
"삼십 분 안에 와."
전화가 끊겼다.
도윤은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떨렸다. 겨우 지각 보고 하나 했을 뿐인데 가슴이 뻐근했다.
그래도 뛰지는 않았다.
그는 개찰구를 지나 전철을 기다렸다. 플랫폼에는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모두 어딘가로 밀려가는 표정이었다.
전철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따뜻한 사람 냄새와 신문 잉크 냄새가 흘러나왔다.
도윤은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창밖 어두운 터널을 바라보았다.
예나는 저녁에 꼭 오라고 했다. 안 오면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그 말이 보고서 결재선보다 무거웠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9시 1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식품사업부 1팀 자리에는 낯익은 피로가 가라앉아 있었다. 책상마다 종이컵이 쌓였고 밤샘한 직원들의 셔츠 소매는 구겨져 있었다. 프린터는 아직도 뜨거운 종이를 토해내고 있었다.
"부장님 오셨다."
누군가 작게 말했다.
박민석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 손에 계산기를 들고 다른 손으로 두꺼운 출력물을 끌어안고 있었다.
"부장님, 살아 돌아오셨네요. 저희는 이미 반쯤 갔습니다. 농담입니다. 아니 사실 농담 반 진담 반입니다."
민석은 웃었지만 눈 밑이 검었다.
도윤은 그 얼굴을 보자 목 안쪽이 씁쓸해졌다. 전생의 자신은 민석의 이런 농담을 좋아했다. 버틸 만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사실은 살려 달라는 말에 가까웠는데도.
"밤샜나?"
"새벽 두 시까지만 했습니다. 그 뒤는 눈 감고 숫자 봤습니다."
"그럼 밤샌 거야."
민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부장님 오늘 되게 인간적이십니다."
"자료 줘."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엄 부장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강 부장. 들어와."
도윤은 민석에게서 자료를 받아 들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푸른마루 식품관 분석 자료가 펼쳐져 있었다. 깔끔한 매대 사진과 대량 납품 단가표가 줄줄이 이어졌다. 회사가 새로 밀고 있는 가정식 반찬 라인의 시범 유통안이었다.
도윤은 첫 장을 넘기자마자 알 수 있었다.
겉보기에는 숫자가 맞았다. 납품가를 낮추고 회전율을 올리면 본사 수익률은 올라갔다. 문제는 그 아래였다.
반품 위험은 협력 업체에 떠넘겨져 있었고 신선도 손실은 계산에서 빠져 있었다.
전생의 그는 이런 표를 능숙하게 다듬었다. 모난 부분을 둥글게 만들고 윗선이 좋아할 문장으로 포장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계약서가 누군가의 새벽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은 너무 늦게 알았다.
"어때."
엄 부장이 물었다.
"단가표가 가볍습니다."
"좋다는 거야?"
"아닙니다. 빠진 비용이 많습니다. 반품과 폐기, 새벽 배송 인력, 협력 업체 보관비가 빠졌습니다."
회의실 공기가 차가워졌다.
엄 부장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오늘 아침부터 왜 이래. 원래 그런 건 실행 단계에서 맞추는 거야."
"실행 단계에서 맞추면 누군가는 손해를 떠안습니다."
"우리가 자선 사업하나?"
도윤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예전 같으면 여기서 웃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며 부장의 말에 맞장구쳤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의 된장찌개 냄새가 아직 목 안쪽에 남아 있었다. 하진이 숟가락으로 거품을 걷어내던 손. 예나가 셔츠 끝을 잡던 손.
손해라는 단어가 갑자기 사람 얼굴을 갖고 다가왔다.
"자선 사업은 아닙니다. 그런데 손해를 안 보이게 숨기는 것도 사업은 아닙니다."
엄 부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강 부장. 오늘 지각한 사람이 말이 많네."
"지각은 따로 책임지겠습니다. 자료는 다시 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오늘 밤까지 고쳐. 일곱 시에 다시 회의하자."
일곱 시.
도윤의 손가락이 출력물 모서리를 세게 눌렀다.
순간 귀 안쪽에서 낮은 이명이 울렸다. 회의실 형광등이 흐릿하게 번졌다.
전생의 어느 저녁이 겹쳤다. 예나가 케이크 앞에 앉아 졸린 눈으로 문 쪽을 보던 장면. 휴대폰 화면에 찍힌 밤 10시 43분.
아빠 또 회사야?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만은 또렷했다.
도윤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건 예언이 아니었다. 후회가 남긴 잔향일 뿐이었다. 붙잡아 쥐고 흔들면 미래가 아니라 기억만 부서질 것 같았다.
"오늘 일곱 시 회의는 어렵습니다."
회의실 안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엄 부장이 짧게 웃었다.
"뭐?"
"오후 다섯 시까지 수정안 올리겠습니다. 필요한 결정 사항은 문서로 남기겠습니다. 일곱 시에는 선약이 있습니다."
"강도윤."
엄 부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 승진 심사 앞둔 거 잊었어?"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더 정확하게 하겠습니다. 밤까지 붙들고 있으면 좋은 자료가 되는 게 아니라 오래 붙든 자료가 됩니다."
말을 끝낸 뒤 도윤은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심장이 세게 뛰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찼다.
그래도 말을 주워 담지는 않았다.
자리로 돌아오자 팀원들이 눈치를 보았다.
민석이 의자를 끌고 다가왔다.
"부장님, 방금 회의실에서 무슨 독립 선언 같은 거 하셨어요? 엄 부장님 표정이 식품 냉장고보다 차갑던데요."
"자료부터 보자."
"예. 현실 도피 좋습니다."
민석이 출력물을 펼쳤다.
도윤은 빨간 펜을 들고 표 아래쪽을 짚었다.
"여기 반품률 기준 어디서 가져왔어?"
"작년 편의식 납품 평균입니다."
"반찬은 달라. 유통 기한이 짧고 온도 이탈에 민감해. 같은 평균 쓰면 안 돼."
"그럼 새로 잡을까요?"
"잡아. 거래처에 떠넘기는 방식 말고 우리가 부담할 비용과 업체가 부담할 비용을 나눠."
민석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 쓰면 위에서 싫어하실 텐데요."
"싫어할 거야."
"그럼 왜..."
"나중에 더 싫은 일이 생기니까."
민석은 농담을 하려다 말았다. 도윤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도윤은 말을 돌렸다.
"새벽 두 시까지 했다고 했지."
"예."
"오늘은 네 몫만 끝내고 들어가. 빠진 근거만 채워. 문장 꾸미기는 내가 한다."
"부장님이요? 평소엔 문장 꾸미기까지 저한테..."
민석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도윤은 쓴웃음을 삼켰다.
"그랬지."
"아니 뭐, 제가 또 문장 미남 아닙니까."
"민석아."
"예."
"농담으로 버티는 것도 체력 있을 때나 된다."
민석의 얼굴에서 웃음이 잠깐 사라졌다.
그 짧은 틈에 도윤은 전생에서 보지 못했던 후배의 피로를 보았다. 계산기 두드리는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점심 먹고 시작하자."
"점심이요?"
"밥 먹고 해. 굶은 머리로 숫자 보면 꼭 하나씩 틀린다."
민석은 이상한 사람을 보듯 도윤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부장님 오늘 정말 어디 교육 다녀오셨어요? 사람답게 일하기 과정 같은 거."
"나도 배우는 중이야."
도윤은 출력물을 한 장 넘겼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하진의 문자였다.
[예나 잘 들어갔죠? 오늘 정말 7시에 오는 거 맞죠? 장 보러 은솔시장 들렀다가 외삼촌 가게도 잠깐 보려고요.]
도윤은 답장을 치려다 멈췄다.
상철찬.
하진의 외삼촌 가게. 하진이 언젠가 조심스럽게 꺼냈던 반찬가게의 꿈과 어머니가 잃었던 가게의 그림자가 모두 그곳 근처에 있었다.
이번 생에서는 그 말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도윤은 짧게 답장을 보냈다.
[맞아. 7시에 갈게. 시장 얘기 저녁에 들려줘.]
전송 버튼을 누르자 이상할 만큼 마음이 조용해졌다.
회사 창밖으로 봄 햇살이 책상 끝까지 밀려와 있었다. 출력물 위 숫자들은 여전히 빽빽했고 엄 부장의 압박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하루의 끝은 회의실이 아니었다.
도윤은 빨간 펜으로 첫 줄을 그었다.
오후 다섯 시까지.
그리고 저녁 일곱 시에는 집으로.